세종의 조세개혁(3)

세종의 조세개혁(3)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1430년(세종 12년) 8월 10일자 세종실록을 읽어보면 조선왕조 관리들의 기탄없는 의견 제시에 감탄할 따름이다. 전제군주 시절에 조선의 관료들은 호조가 만든 공법에 대하여 거침없이 비판하고 있다.

이 의견들은 단순히 1결당 10말 정액 징수에 대한 가부(可否)가 아니라, 공법과 답험손실법을 병행하자는 의견에서부터, 공법을 적용하되 토지의 비옥도와 풍·흉년에 따라 차등과세를 하자는 의견, 현행 답험손실법을 그대로 유지하자는 의견 등 각양각색이었다.

먼저 공법과 답험손실법을 병행하자는 의견은 전 병조판서 조말생·전 판목사 황자후, 그리고 전 동지총제 박초의 의견이었다.

조말생과 황자후는 아뢰기를, ‘사전(私田)에 10분의 1의 세를 부과한 것은 곧 삼대(三代)의 공법을 본뜬 것입니다. 우리 태조께서 건국하시면서 맨 먼저 백성들의 폐해부터 제거하시고, 농사를 실패한 백성에게는 고을에다 소장(訴狀)을 내게 하시고 다시 고을 아전에게 소장을 낸 전지(田地)를 답사해 살펴 세금을 감하게 하시니, 그 법이야 말로 지당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하오나 백성들 중에 혹시 어떤 사정이 있어서 소장을 내는 기간을 놓쳐 버리게 되면 전지가 묵거나 재해를 입었더라도 세금의 징수를 면치 못하는 경우도 있으니, 이것 역시 한탄할 일입니다.

우리 태종께서 그러한 사정을 깊이 이해하시고 주(周)나라 때에 농정을 맡은 관원이 들판을 순회하면서 농작의 실태를 관찰하던 법에 의하여, 모든 전지(田地)를 순회 심찰하여 손실에 따라 세금을 감면하는 법(답험손실법)을 제정하여 시행하시니, 백성을 사랑하시고 기르시는 뜻이 또한 지극하셨다 하겠습니다.

그러하오나, 순회 심찰할 때에 조관(朝官)을 나누어 파견하기도 하고, 감사와 수령에게 위임하기도 하는데, 그 조관과 수령이 다 답사하지 못하고 위관(委官)을 나누어 보내고 있습니다. 이 위관이란 자는 거의가 각 고을의 아전으로 배운 것이 없고 아는 것이 없어, 성상께서 백성을 사랑하여 법을 세우신 본의를 본받지 못하고 공정성을 잃기 때문에, 농민들은 여러 날을 두고 그들의 대접에만 바쁠 뿐 실제로는 아무런 혜택도 입지 못하는 실정이니, 이는 다년간의 통환(通患)이었습니다. 이제 호조에서 그 폐단을 알아차리고 공법의 실시를 청하였습니다.

(중략) 신이 지금 어리석은 생각으로 청하고 있는 공법은 오늘의 현실로 보아 행함직한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신이 민간에서의 가부의 의논을 듣자오니, 평야에 사는 백성으로 전에 납세를 중하게 하던 자는 모두 이를 즐겨서 환영하고, 산골에 사는 백성으로 전에 납세를 경하게 하던 자는 모두 이를 꺼려 반대하고 있사온데, 이는 각기 민심의 욕망에서 나온 것입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길이란 마땅히 민심을 따라야 할 것이니, 좋다고 말하는 백성들에게는 그 뜻에 따라 공법을 행하고, 좋지 않다고 말하는 백성들에게는 그 뜻에 따라 지금처럼 답험손실법을 행하소서’하였다.

또한 전 동지총제 박초가 아뢰기를, “공법이 비록 좋긴 하오나 전지의 비옥과 척박을 분별하지 않고 전부 행한다면, 백성들 사이에는 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걱정하는 사람이 자연 있게 될 것입니다. 각도에 염문계정사(廉問計定使)를 나누어 보내어 그 전지를 심사하여 좋고 나쁜 것을 분별하고, 이를 분류해서 지적(地籍)을 만든 뒤에, 공법을 시행할 만한 전지에는 공법을 시행하고, 그 나머지의 척박한 산전(山田)으로 공법을 시행하기에 부적당한 전지는, 매년 반드시 경작자의 신고를 상고한 후에 작황을 답사하고 답험손실법을 시행하여, 두 가지 법을 겸행토록 하소서”하였다.

조말생과 황자후, 그리고 박초는 세제개혁으로 인한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공법을 시행하기에 적당한 토지에 대해서만 공법을 시행하고, 산간 토지는 현행대로 답험손실법을 시행하자고 주장한다. 이는 모든 백성들이 고루 혜택을 보는 세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현실성 높은 대안이었다.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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