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를 경영했던 거문도 바다 사나이

최혁 주필의 전라도역사이야기 연재를 시작하며

전남의 산하(山河)에는 참으로 많은 사연이 담겨져 있다. 이 땅위에 살아왔던 수많은 선인들의 자취가 고스란히 배어있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호남의 땅과 바다가 안고 있는 웃음과 설움, 그리고 환희와 절망을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역사의 소용돌이 흔적을 바위나 나무, 건물, 하다못해 길가에 아무렇게나 피어있는 들꽃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전남 땅 곳곳에 어우러져 있는 선인들의 삶 자취와 정신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산다. 무심코 펼쳐져 있는 듯싶지만 여기 전남의 논배미와 밭도랑에는 어떻게든 질긴 세상을 살아내려 했던 조상들의 피와 땀이 스며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밟고 서 있는 이 땅의 역사를 알아 가는데 열심을 내야 한다.

남도일보가 새로 연재를 시작하는 최혁 주필의 ‘전라도역사이야기’는 우리가 무심코 넘기던 우리 주변의 강과 산, 그리고 역사 속에 파묻혀 있던 이름 없는 이들에 관한 글이다. 이 글들은 현장취재와 고문헌의 고증, 전문가들의 검증을 통해 엮어질 예정이다. 아무쪼록 이 시리즈가 전라도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울릉도를 경영했던 거문도 바다 사나이

“해마다 춘삼월이 되면 거문도 사람들은 동남풍과 동한난류를 이용해 울릉도로 향했다. 거문도 사람들은 도착 직후부터 나무를 베어 새 배를 만들었고 여름 내내 미역을 채집했다.

가을철 북서풍이 불면 목재와 해조류, 말린 고기를 가득 싣고 거문도로 돌아오면서 중간에 경상도 포구에 들려 해산물을 판매하거나 물물교환을 하며 귀향했다. 거문도에 도착하고 나서는 뗏목(목재)만 남겨두고 곧바로 진남포까지 가서 팔았다.”

■ 거문도와 울릉도의 100년 넘은 인연
 

거문도에서 온 어부들. 일본인들이 1880년대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네 명이 배에 타고 있는데 한 가족으로 추정된다. 거문도 바닷사람들은 조류와 바람을 타고 여름이면 울릉도로 건너가 해산물을 채취하고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든 뒤 가을에 돌아왔다./Steven J. Barber
거문도 바다 사나이들의 울릉도 및 진남포 항해도

바다를 무대로 살아갔던 남도 사람들은 예부터 기개와 개척정신이 대단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남도의 사람들은 배를 모는 일에 능숙했다. 바닷길을 잘 알고, 배를 다루는 일에 거침이 없었다. 남도의 바닷사람들은 거친 풍랑을 헤치며 일본과 중국을 오갔다.

해양인 기질이 다분한 남도의 바닷사람들은 조상들의 기질을 닮아 150여 년 전에도 깜짝 놀랄만한 일을 하고 다녔다. 여수를 비롯한 고흥, 순천지역 바닷사람들이 거문도 일대에서 울릉도까지 배를 타고 가 울릉도를 개척한 것이다.

거문도는 전남 여수에서 남쪽으로 약 110km 떨어진 곳에 있다. 지금도 쾌속선을 타고 여수항에서 2시간 30분 정도를 가야 하는 거리다. 거문도 일대에 있는 초도, 손죽도 바닷사람들은 돛단배를 이용해 바람과 해류를 타고 동쪽으로 500km 떨어진 울릉도를 오갔다.

그뿐만이 아니다. 남도의 바닷사람들은 여름이면 낡은 배를 몰고 가 그곳에서 전복과 미역 등 해산물을 가득 채취했다. 독도까지 가서 바다사자를 포획하고 해산물을 거뒀다. 울릉도에 지천인 나무를 잘라 현지에서 배를 만들었다. 가을에 북서풍을 이용해 그 배에 나무를 가득 싣고 돌아왔다.

남도 사람들은 울릉도와 독도에서 채취한 해산물과 나무들을 금강·한강·대동강 하구에 부렸다. 거문도를 중심으로 해 동해안과 남해안, 서해안 일대를 종횡무진 누빈 것이다. 거센 도전정신과 강인한 체력, 그리고 바다에 능숙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해마다 춘삼월이 되면 거문도 사람들은 동남풍과 동한난류를 이용해 울릉도로 향했다. 보름에서 한 달이 걸리는 긴 여정이었다. 출발 전에는 서 말의 콩을 볶아서 가지고 갔다. 긴 항해 기간에 키를 잡은 사공의 졸음을 쫓기 위해서였다. 거문도 사람들은 도착 직후부터 나무를 베어 새 배를 만들었고 여름 내내 미역을 채집했다.

가을철 북서풍이 불면 목재와 해조류, 말린 고기를 가득 싣고 거문도로 돌아오면서 중간에 경상도 포구에 들려 해산물을 판매하거나 물물교환을 하며 귀향했다. 거문도에 도착하고 나서는 뗏목(목재)만 남겨두고 곧바로 서해로 나가 울릉도의 건어물과 해조류를 서해안 곳곳의 포구에서 팔았다. 이들은 평안남도에 위치한 진남포까지 가서 거래했다. 마포나루와 금강하구에도 들러 생필품과 쌀을 구해왔다.
 

뗏목 위에 서있는 어부
거문도를 점령한 영국군 병사들. 1885년 4월~1887년 2월까지 러시아의 조선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거문도를 불법 점령한 영국군의 모습이다.

■ 개척정신으로 무장하고 독립운동까지 했던 초도주민들

울릉도를 오가며 활동했던 초도와 거문도 사람들의 기록이 적힌 기념비. 삼산면 주민 115명이 울릉도에서 활동했다는 기록이 적혀있다. 왼쪽에는 고종의 칙령이 붙어있다./정채수씨 제공
1905년 조선의 쇄환정책으로 비어있던 울릉도에는 약 1천여 명의 일본인들이 살았다./Steven J. Barber

풀이 많은 섬이라 해서 명칭이 붙은 초도(草島)는 여수시 삼산면에 속하는 섬이다. 여수에서 서남쪽으로 약 67㎞ 떨어져 있어 여수와 제주의 중간에 위치한다. 초도 의성리 바닷가에는 귀중한 사료가 적힌 석조기념비가 있다. 기념비에는 ‘1882년 임오년 이전부터 목숨 걸고 울릉도와 독도를 개척하여 영토를 확보한 선각자들이 사셨던 흥양현 초도사람들!’, ‘일본에 나라를 뺏기지 않으려고 활약하신 김성택?이병현 의병이 사셨던 초도의성!’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흥양은 고흥의 옛 이름이다. 1892년에는 초도가 흥양 현에 속했었다.

남도의 바다사나이들은 동해와 남해, 서해의 거센 파도를 가르며 바다의 주인으로 살았다. 울릉도를 개척하고 독도 일대의 바다에서 생계를 꾸렸다. 전라도 바다사나이들이 돛배에 의지해 여수 거문도를 기점으로 해 울릉도와 진남포 등 그 먼 곳을 오갔다는 사실은 경이롭기만 하다. 그리고 자랑스럽다.

그들은 생계 때문에 동해를 넘나들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조선의 바다를 지켰다. 거문도 바다사나이들의 끈기와 개척정신은 유전자적 기질(DNA)인지도 모른다. 먼 옛적부터 우리 조상들은 바다를 건너 중국과 일본을 오갔다. 장보고는 동북아시아의 바다를 호령했다. 바다의 후예였기 때문에 거문도 바다사나이들은 심해를 넘나들었던 것이다. 거문도의 역사에 담겨 있는 우리 선인들의 개척정신과 담대함, 그리고 용기를 모두가 본받아야 한다.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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