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전라도 농업을 빛낸 선구자>

② ‘유기농쌀’ 보성의 故 강대인 명인

‘하늘과 땅 기운으로 곡식에 생명을 불어넣다’

세상과 이별할 때까지 30년간 친환경 농업 ‘한우물’

국내 최초 유기농쌀 품질인증 획득·80여종 품종 개량

여러 농업인에 자신의 농업철학·비법 전수도 최선 다해
 

故 강대인 명인
벼를 탈곡하고 있는 강대인 명인의 모습./ 전남도 제공
故 강대인 명인의 딸 선아<왼쪽>씨와 부인 전양순씨가 자신의 논을 둘러보고 있다./우리원 제공

故 강대인 명인의 딸 선아<왼쪽>씨와 부인 전양순씨가 자신의 논을 둘러보고 있다./우리원 제공‘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농업은 천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큰 근본이라는 말이다. 그만큼 농업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표현이다.

현대 사회에서도 농업은 여전히 국민의 먹거리와 건강을 책임지는 핵심 산업으로 불린다. 모두가 그 소중함을 부인하지 않는다.

전남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농도(農道)’이다. 유기농 중심의 친환경 농업은 전남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됐다. 농도의 위상에 걸맞게 유기농 인증면적이 전국 1위이고, 친환경 농업은 전국의 50%를 차지하고 있다.

전남쌀은 전국 고품빌 브랜드 쌀 평가에서 13년 연속 최다 선정됐다. 전남의 친환경 농산물은 아이쿱 등 3대 생협과 학교 급식을 통해 인기를 끌고 있다. 이런 전통과 명성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긍지를 잃지 않고 땅을 일궈온 전남 농업인의 노력과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우리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신감과 긍지를 잃지 않고 미래를 일궈온 전남 농업인들의 공훈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산다. 오래 전부터 우리 농업을 꾸려온 인물들의 굳센 성품과 열망이 ‘농도 전남’의 전통을 세워왔건만, 이제껏 관심 밖이었다.

남도일보가 연재를 시작하는 ‘해방 이후 전라도 농업을 빛낸 선구자’는 여러 농업인들 중에서도 선도적이면서 진취적인 업적을 쌓은 이들에 관한 글이다.

무엇보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창의적인 사고와 불굴의 의지로 전남 농업을 개척하고 발전시키며 나아가 대한민국 농업을 이끈 대표 농업인 70명을 재조명해 우리 농업인 모두의 자랑으로 삼고자 한다.

■평범한 농부에서 ‘친환경 농법의 대부’로=전남 보성군 벌교읍 마동리에서 평생 유기농쌀 농사를 고집했던 대한민국 친환경 농업의 선구자 고(故) 강대인씨.

그가 쌀 농사를 시작한 것은 순천농림고등전문학교(현 순천대) 졸업을 앞둔 1974년부터다.

그의 아버지(강영정)는 ‘걸어다니는 농업백과사전’으로 불릴 정도로 탁월한 농사꾼이자 유능한 농업기술자였다.

어릴 적부터 어버지의 일을 돕는 것이 일과였던 그는 자연스럽게 농사꾼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쓰러졌다. 감기 한 번 안 걸릴 정도로 건강했던 아버지가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암이었다. 아버지를 대신해 농사를 떠맡은 그는 후일 아버지의 죽음이 ‘농약중독’ 후유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처럼 화학비료와 농약의 과다 살포가 인간과 자연에 얼마나 해로운지 통감한 그는 4년여 뒤 ‘정농회’에 가입하면서 땅을 살리고 자연을 소생시키기 위한 유기농 실천을 다짐한다. 그것만이 사람이 사는 길이고, 또한 자연이 사는 길이라는 확신으로 때문이었다.

그러나 의지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유기농법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이미 지워져 버렸고, 땅은 병들어 있었다. 더구나 농부들도 농약과 화학비료에 이미 길들여져 있었다.

■숱한 실패 경험의 누적…‘생명역동농법’ 만들어=그는 실패를 거듭했다. 잡초는 뽑으면 된다지만 병충해는 손수무책이었다.

10년 동안은 그저 넋이 나가 논만 쳐다 보는 것이 일이었다는 게 그의 아내이자 우리원 농장의 대표인 전양순 씨의 전언이다.

하나하나 유기농업의 틀을 잡고 그에 맞는 종자를 개발하고 그것들을 제대로 키워내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주위에선 이상한 농사를 짓는다며 ‘빨갱이’ 취급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화학비료를 쓰지 않겠다’는 신념 하나로 옛 농서를 뒤져가며 땅심을 키우고 벼가 튼튼하게 자라는 방법을 독학했다. 병충해에 강한 품종을 개발하는 한편, 해충 방제용 산야초를 채집하고 목초액에 물을 섞어 농약 대신 뿌렸다. 전국은 물론 세계를 돌아다니며 유기농법을 공부해 오리 농법과 우렁이 농법을 우리나라에 최초로 도입했다. 벼를 도정하면 나오는 쌀겨를 논에 뿌려 양분을 보충하고 잡초를 예방하는 그의 쌀겨농법은 전국적인 인기를 끌었다. 생명을 죽이지 않고 생명을 지키는 쌀 ‘강대인 생명의 쌀’ 브랜드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는 조선시대 실학자 홍만선이 쓴 농법서인 ‘산림경제’와 땅의 활력에 따라 특별한 일정에 맞춰 재배하는 독일의 ‘바이오 다이나믹 농법’을 참고해 만든 자신의 농법을 ‘생명역동농법’이라 불렀다.

■생명 가득한 들 꿈꾸던 농업예술가로 거듭=이러한 그의 노력은 1995년 국내 최초의 벼 부문 유기재배 인증 획득으로 이어졌다. 또 쌀 종자 400여종을 관리하며 80여종의 품종 개량을 이루기도 했다. 주변의 의심스런 시선을 뒤로 한 채 그의 끊임없는 노력과 연구가 세상의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그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친환경 농법에서 한발짝 더 나아가 ‘기능미’ 생산으로 한국 농업에 희망을 던졌다.

우리원 농장에서 개발한 녹미(청량미), 적미, 흑향미 등 기능성 쌀은 침체된 벼 농가에 활로를 제시했다.

기능쌀은 전국의 소비자들에게 입소문을 타면서 일반 쌀보다 두 배 이상의 가격에 팔려나가고 있다.

그는 2004년 전남도 농업인 대상을 수상하고, 같은해 ‘세계 쌀의 해’ 기념식에서 석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이어 자랑스런 전남인상, 친환경농업대상 생산자 부문 최우수상 수상 등의 결실로 나타났다.

더군다나 그의 결실은 우리나라 친환경 농업의 발전 방향도 제시하고 있다.

그는 대학 강단과 현장을 통해 자신의 농업철학과 비법을 전수하는 일에도 최선을 다했다. 2005년부턴 전남 생명농업대학 학장을 맡아 친환경 농가 육성에도 힘을 보탰다. 2008년에는 그가 살았던 보성군 벌교읍 마동리에 우리교육관을 세워 생명의 쌀, 백초액, 어성초, 함초액 들의 제조비법을 여러 농민들에게 전수했다. 우리교육관은 해마다 6천명에 가까운 농민들이 다녀간다.

그는 지난 2010년 다신수련 중이던 전남 고흥군 팔영산의 한 토굴에서 세상과 이별할 때까지 30년이 넘는 세월을 오로지 자연을 살리고 인간을 살리는 생명농업에 진력했다.

그의 친환경 농법은 부인 전양순씨와 처녀 귀농인으로 잘 알려진 딸 선아씨가 이어갈 계획이다.

/안세훈 기자 ash@namdonews.com

<강대인 명인 약력>

1951년 보성출생

2005년 전남 생명농업대학 초대학장 역임

2008년 전남 보성군에 우리원교육관 설립

2010년 작고

수상

2004년 친환경농업 보급 공로로 자랑스런 전남인상 수상/‘세계 쌀의 해’ 기념식 석탑산업훈장

2005년 제1회 친환경농업대상 생산자부문 최우수상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