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광주와 전남의 역사를 바꿔놓은 친일파 윤웅렬

 

 

 

 

4. 광주와 전남의 역사를 바꿔놓은 친일파 윤웅렬
■전남도 관찰사 윤웅렬, 구한말 광주와 전남의 역사를 바꾸다

윤웅렬과 윤치호 가족사진. 앉아있는 이가 윤웅렬이고 서 있는 이가 윤치호다. 앞에 있는 꼬마들은 윤치호의 이복동생들이다.

호남사람들, 특히 광주와 전남사람들은 윤웅렬(尹雄烈)이라는 사람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윤웅렬은 구한말 때 일본인들이 광주에 정착할 수 있도록 절대적인 도움을 준 인물이다. 또 나주에 뒤쳐져 있던 광주가 전남의 행정중심지가 되도록 작용했다. 한편으로는 전라도 지역에 들어온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을 후대해 그들에게 전라도 선교의 의욕을 불어넣어준 인물이기도 하다.

전남도관찰사 윤웅렬이 나주의병들로부터 목숨을 빼앗길 까봐 나주에서 광주로 도망을 와 머물렀기 때문에 전남관찰도가 광주에 들어서게 됐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다소 허망한 생각을 갖게 한다. 무엇인가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나주라는 큰 고장을 놔두고 광주에 관찰부를 정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은 착각이었다. 쓴 웃음이 절로 지어진다.

■구한말 격랑의 세월에 출세가도를 달린 윤웅렬

윤웅렬은 1840년 음력 4월 17일 충청도 아산군 둔포면에서 아버지 윤취동과 어머니 안동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고아가 된 윤취동은 자수성가로 재산을 모은 인물이다. 윤취동은 40세가 넘어 아들 웅렬을 얻었고 또 둘째 아들 영렬도 보았다.

아산 둔포에 있는 윤웅렬, 윤치호 선정비/민족문제연구소제공

윤웅렬과 영렬은 기골이 장대하고 담력이 컸다. 윤웅렬은 17살이었던 1856년, 혼자 한양으로 올라가 무과시험에 급제해 관직에 올랐다. 윤웅렬은 고종 즉위 후 흥선대원군에 의해 발탁돼 1864년 절충장군에 올랐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을 배웠기에 학문에도 뜻이 깊었다.

그는 박규수로부터 신학문을 접하였으며 그의 문하에서 김옥균과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박영효, 유길준 등을 만나 친분을 쌓았다. 1880년 별군관(別軍官)의 신분으로 제2차 수신사 김홍집(金弘集) 등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이때 윤웅렬은 일본의 근대적인 군대조직과 훈련에 충격을 받고 조선군사의 개혁방안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영렬 또한 동학농민군을 토벌한 공으로 관직이 높아져 후에는 육군참장까지 지냈다.

1884년 10월 김옥균 등 급진개혁세력이 주도한 갑신정변에 참여해 형조판서를 맡았으나 갑신정변이 3일 만에 실패로 끝나자 전남 능주(綾州)로 유배됐다. 사간원과 사헌부 대신들은 갑신정변에 동조한 그를 처벌해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했다.

어윤중의 수제자였던 윤웅렬의 아들 윤치호 역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1885년 중국 상하이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능주로 유배됐던 윤웅렬은 고종의 비호로 곧 풀려나 한성부좌윤이 됐다. 1894년 청일 전쟁 후 김홍집의 친일 내각에서 군부대신의 자리에 올랐다.

1896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른 13도제 시행으로 전라도가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로 나눠지자 초대 전라남도 관찰사(全羅南道觀察使)로 부임했다. 그는 4대 전라남도 관찰사를 다시 지내기도 했다. 1910년 한일합방 조약이 체결된 후 일제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1911년에 사망했다. 윤웅렬의 후손들은 집안의 권력과 재력을 바탕으로 광복 후에도 대한민국 각 분야의 최고의 자리에 올라 부와 명예를 대대손손 누리고 있다.

1960년 윤보선 대통령 취임 후 경무대에서 찍은 윤보선 가문 사람들의 기념사진

 

윤웅렬 가계도

■일본인의 광주진출을 도운 윤웅렬 관찰사

구한말, 윤웅렬은 일본인들이 광주에 들어와 사는데 윤웅렬이 큰 힘을 발휘했다. 광주에 들어와 일본인들이 살 수 있는 터전을 닦은 사람은 바로 오쿠무라 엔싱(奧村圓心)이었다. 엔싱은 일본불교 승려였지만 사실 조선을 침략하려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사주를 받는 인물이었다.

엔싱은 선진문물 견학명분을 내세워 개화파 인물들을 일본으로 보내 친일인사로 만들었다. 윤웅렬도 엔싱과 개인적인 교분이 있었다. 엔싱이 1877년 동래 본원사에 있을 때 윤웅렬은 동래의 관직에 있었다. 이 때 윤웅렬이 어려움을 당해 몸을 피신할 때 엔싱이 그를 숨겨준 인연이 있다.

엔싱은 1897년 목포개항 직후 전남에 왔다. 그렇지만 일본인들에 대한 반감이 너무 커 엔싱은 본원사 분원을 세울 땅을 구할 수가 없었다. 조선인들이 일본인 승려였던 엔싱을 적대시한 것이다. 그런데 마침 윤웅렬이 전라남도 관찰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윤웅렬은 엔싱이 서문 밖(지금의 광주시 동구 불로동 1번지 일대)에 땅을 구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엔싱이 광주에서 마침내 땅을 마련했다는 소식을 듣고 엔싱의 여동생 오쿠무라 이오코(奧村五百子)가 일본에서 목포를 거쳐 광주로 건너왔다. 이오코는 일본식 농업과 잠업을 보급하기 위해 광주에 실업학교를 세웠다. 오쿠무라 남매는 실업학교를 세우면서 일본인 목수와 건축인부들을 부산과 일본에서 불러들였다.

1898년 실업학교 공사가 본격화되면서 광주의 일본인들은 크게 늘어 100명을 넘어섰다. 그들은 지금의 양림동 광주천변에 집을 짓고 살았다. 일본인 수가 크게 증가하자 보작촌(洑作村:지금의 황금동)일대에 일본인을 상대로 한 음식점과 술집들이 생겨났다.

1910년 한일 강제 합방 이후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거주지를 비롯한 광주 구도심과 광주면 일대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정비에 착수했다. 광주읍성과 광주관아를 다 헐어내고 도로를 뚫었다. 수도와 하수도를 정비하고 일본식으로 거리를 조성했다. 일본식 여관과 요정·양조장·은행·병원 등이 곳곳에 생겨났다. 지금 충장로의 골격이 그 때 만들어졌다.

광주역사의 저 먼 끝자락에는 윤웅렬 관찰사가 있다. 일본인들에 대한 그의 호의는 일본사람들이 쉽게 광주에 정착하게 된 계기가 됐다. 일본인들이 자녀교육을 위해 세운 학교는 지금 우리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학교들의 모태가 됐다. 충장로와 황금동 곳곳에도 일본인들이 상술이 스며있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지만 윤웅렬이라는 인물은 광주라는 도시의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미국 남침례교 선교사들을 도운 윤웅렬 관찰사
 

1881년에 찍은 윤웅렬과 윤치호 부자사진

윤웅렬의 첫 번째 부인은 진사 이현표(李玄豹)의 딸 전의 이씨다. 둘 사이에서 딸 한명이 태어났다. 1861년 전주 이씨 이일영의 딸 이정무(李貞武)를 소실로 맞아들였다. 이정무에게서 딸 윤경희(尹慶姬)와 아들 좌옹 윤치호(尹致昊)를 얻었다. 그 뒤 다른 첩인 김정순(金貞順)에게서는 일찍 죽은 아들과 윤치왕·윤치창이 태어났다.

윤웅렬은 영리한 윤치호가 서자로 태어난 것이 안타까웠다. 윤웅렬 자신이 서얼출신인 탓에 받았던 수모와 고통을 윤치호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본부인 전의이씨가 죽자 윤치호를 호적에 적자(嫡子)로 올리기 위해 첩이었던 전주이씨 이정무를 정실부인으로 올려 주었다.

윤웅렬은 윤치호를 어윤중의 문하에 보내 공부하도록 했다. 갑신정변에 동조한 윤웅렬을 처벌해야 한다는 대신들의 참소가 계속되자 윤치호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1885년 중국으로 유학하게 된다. 상해에 있는 남감리교 미션학교인 중서서원(中西書院)에 입학, 중등과정을 이수했다.

윤치호는 1888년 중서서원 선교부의 도움을 받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는 감리교 본부가 있는 네슈빌의 밴더빌트 칼리지에 입학하는데 조선인으로서는 첫 유학생이었다. 이 때 미국 네슈빌에서 미국 세계선교신학생대회가 열리는데 안식년이었던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선교대회 강사로 참가했다.

윤치호는 이 선교대회에서 조선선교를 호소했다. 이 선교대회에는 미국 남장로교 소속 신학생들이 많이 참가하고 있었는데 언더우드 선교사와 윤치호의 설교·간증을 듣고 많은 신학생들이 조선선교사로 가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미국 유학생활을 마친 윤치호는 1895년에 귀국했다. 그는 고종으로부터 신임을 받아 실력학무협판(문교부 차관)에 임명됐다. 그러다 1897년 독립협회에 가담하여 서재필, 이상재 등과 함께 독립협회 활동을 주도하면서 계몽운동에 헌신했다.

이때 조선선교를 위해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조선에 도착, 호남지방으로 떠나게 되자 아버지 윤웅렬에게 미국선교사들을 잘 보살펴달라는 편지를 보내게 되는 것이다. 나주에 선교의 근거지를 잡지 못한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이 광주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윤웅렬이 여러 가지 배려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윤웅렬은 조선민족을 힘들게 한 일제의 앞잡이 역할을 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호남의 조선인들이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기독교 신앙을 갖는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윤웅렬의 두려움이 결정해버린 광주와 나주의 운명

고종은 1896년 지방제도를 개편하면서 전국을 23부로 나눴던 것을 13도로 바꿨다. 과거의 전라도는 전라남북도로 나뉘어졌다. 전라남도관찰사로는 윤웅렬이 임명됐다. 윤웅렬은 당연히 관찰부가 있는 나주에서 관찰사로서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윤웅렬은 나주 관찰부로 부임하기는 했으나 나주의병들의 기세가 워낙 당당해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윤웅렬은 나주에서 계속 근무하다가는 언젠가 화를 당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과거 부(府)업무를 보던 광주로 도망을 갔다. 광주에 머물면서 관찰사 업무를 본 것이다. 불안한 마음에 진위대영 군사들을 광주관찰부 건물 곁에 두었다. 그러면서 조정에 관찰부를 광주군으로 옮겨줄 것을 요청했다.

조선총독부는 후에 전라남도 관찰부를 광주군에 두게 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전라도를 2개도로 나눈 뒤 (광주군에 있는)전라남도 관찰부를 나주로 복귀시켜야 한다는 논의가 없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윤웅렬 관찰사가 (의병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광주 관찰도청사 가까운 곳에 진위대영을 세우고 중앙정부에 간청해 광주에 영주하는 방침을 수립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광주군에 도청을 설치한 이유다.”

만약 윤웅렬이 나주에 계속 머물렀다면 나주는 근현대사에서 전남의 행정·경제 중심지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을 것이다. 그러나 윤웅렬이 광주에 관찰사 숙소를 두고 일제와 협의해 도청건물을 광주군로 두어버림에 따라 광주와 나주의 운명이 뒤바꿔져 버린 것이다. 전남도청이 광주에 들어선 것은 나주의병을 두려워한 윤웅렬의 불안 때문이었다. 사소한 것 하나가 역사를 바꾼다는 말이 실감나는 대목이다.

■광주공원과 화순 능주에 있는 윤웅렬 선정비
 

광주공원에 있는 윤웅렬 선정비
광주공원에 있는 이근호 선정비
선정비훼손을 자제해줄 것을 호소하는 안내문
광주공원비문안내문

윤웅렬의 선정을 기리는 비는 광주광역시 남구 광주공원과 충남 아산시에 있다. 윤웅렬 영세불망비는 전남 화순군 능주면 잠정리 삼충각 근처에 있다. 1882년 광주시내에 세워졌던 ‘관찰사 윤공웅렬 선정비’(觀察使尹公雄烈善政碑)는 광복 이후 훼손당할 위기에 처해졌으나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아 1957년 광주공원 입구로 옮겨졌다. 1965년 다시 동쪽 언덕에 세워졌다.

윤웅렬 선정비 옆에는 이근호 선정비가 있다. 이근호는 1878년 무과에 급제한 뒤 전라남도 관찰사를 거쳐 1906년 육군참모장을 지냈다. 동생 이근택·이근상과 함께 친일매국노 3형제이다. 군부대신 이근택은 을사오적 중 한명이다. 윤웅렬과 이근호는 1910년 한일합병에 대한 공로로 남작 작위와 2만5천원의 은사공채를 받았다. 이근호 선정비는 제5대 관찰사 재직 중인 1903년 5월에 세워졌다.

광주공원 내 사적비 중에 친일반민족행위자 윤웅렬과 이근호의 선정비도 포함돼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논란이 일었다. 비를 철거해야한다는 여론과 그 옆에 단죄비를 설치해 이들의 죄상을 널리 알려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여론이 맞섰다. 지금도 그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화순 능주에 있는 윤웅렬영세불망비/화순군 심홍섭 제공

화순군 능주면에 있는 윤웅렬의 영세불망비는 지금은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 자리하고 있다. 예전에는 행인들의 왕래가 잦은 길가에 위치했는데 길가 옆으로 철로가 놓이고 불망비문이 새겨져 있는 바위 위쪽의 산이 깎이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있는 꼴이 돼버렸다. 윤웅렬의 영세불망을 기원하는 비문이 새겨져 있는 바위는 현재 낙석방지용 철망에 덮여있다. 이근호 불망비는 화순군 능주향교와 고창읍성 앞에도 자리하고 있다.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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