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의병장 최경회와 화순이 시댁인 논개

 

 

 

최혁 주필의 전라도 역사이야기
5. 의병장 최경회와 화순이 시댁인 논개
논개, 최경회 장군과 의병 수발들며 왜병과 혈전
진주성싸움 패해 남편 최경회 순절하자 복수기회 노려
승리축하연에 관기로 변장, 왜장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

악전고투 끝에 진주성이 함락되자 의병장 최경회는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했다. 이에 논개개는 진주성 함락을 자축하는 왜병들의 잔치에 관기로 변장해 참여한 뒤,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촉석루 의암(義巖)으로 유인해 끌어안고 남강에서 뛰어내려 남편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했다. 이 논개의 시댁이 바로 화순에 있었다. 최경회를 봉사(奉祀)하고 있는 충의사에는 논개를 기리고 있는 의암영각(義岩影閣)이 있다.

■최경회와 논개, 논개와 화순의 인연

충의사 전경.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많은 전공을 세우고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삼장사의 일원으로 순국한 최경회 선생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한 곳이다. 충의사에는 의암영각을 세워 논개를 함께 기리고 있다.
충의사에 봉안돼 있는 최경회 장군 영정

예부터 전남 화순은 충절의 고장이다. 임진왜란과 동학농민혁명, 구한말 의병활동, 6·25전쟁, 5·18항쟁 등 나라와 민족을 구하고 정의를 지키는 일에 많은 이들이 목숨과 삶을 바쳤다. 화순은 산과 물이 맑으면서 사람들 또한 품은 뜻이 장대한 곳이다. 풍요로운 산천을 닮아 사람들의 품성 또한 너그럽다.

화순에는 이 땅을 지키기 위해 장렬히 숨져간 이들을 기리는 곳이 많다. 능주 포충사와 삼충각(三忠閣)과 충의사(忠毅祠), 고사정(高士亭), 쌍산의소 등이 바로 그런 곳들이다. 포충사는 임진왜란 당시 가장 처절했던 2차 진주성싸움에서 순절한 충의공 최경회 장군과 경암 문홍헌, 청계 구희, 상의재 오방한과 을묘왜변 때 순절한 월헌 조현 등 화순·능주 출신의 다섯 충신을 향사한 곳이다. 화순군 한천면 모산리 산15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삼충각은 최경회·문홍헌·조현 장군 등 세 충신의 애국 충정을 추모하기 위해 1685년(숙종 11) 능주향교 유림들이 건물 3동을 건립한 것이다. 능주면 잠정리 산 33-1에 자리하고 있다. 충의사는 최경회 장군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한 사우이다. 화순군 동면 충의로 409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고사정은 임진왜란 때 화순의 최경운·최경장·최경회 3형제와 최경장의 큰아들 최홍우, 최경운의 아들 홍재·홍수 등 6명이 각 고을에 격문을 띄워 의병을 모집했던 의병청이 있던 곳이다. 화순읍 삼천리에 있다. 최경운 등 3형제는 의병청을 설치한 뒤 가장 젊은 최경회에게 의병장을 맡도록 하고 일어선 의병을 전라우의병(全羅右義兵)이라 이름 지었다.
 

의병청 표석과 고사정. 고사정 중창이 진행중이다.
신축중인 고사정

임진왜란 후 인조는 최홍우(최경장의 아들)에게 남주고사(南州高士:남쪽 지방의 이름 높은 선비라는 뜻)라는 칭호를 내렸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후손 최후헌(崔後憲)은 1678년(숙종4년)에 정자를 세웠는데 이 정자가 고사정이다. 현판 글씨는 당대의 명필 이광사의 것이다.

쌍산의소는 구한말 양회일을 중심으로 화순의병들이 활동했던 곳이다. 이양면 증리 일대에 있는데 ‘쌍산’은 이곳 계당산의 별칭이다. 그런데 포충사와 삼충각, 충의사, 고사정은 모두 최경회 장군이 봉사(奉祀)돼 있거나 깊은 관련이 있는 곳이다. 최경회 장군의 활약상과 충정이 그만큼 컸다는 반증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최경회 장군을 아는 이가 드물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의로운 여인 논개의 남편이 바로 화순출신 최경회 장군이다. 논개(論介 ?∼1593)의 성은 주(朱)씨다. 따라서 논개의 정식 이름은 주논개다.

그녀는 2차 진주성싸움에서 의병을 이끌고 왜군과 싸우던 남편 최경회 장군이 항복하지 않고 남강에 몸을 던지자 관기로 변장해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남강가로 유인해 같이 죽은 여인이다. 이 논개의 시댁이 바로 화순에 있었다.

■최경회 장군과 주 논개의 인연

논개는 1574년 9월 3일생이다. 전북 장수군 계내면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주달문으로 주촌의 훈장이었다. 논개는 주달문이 40세에 얻은 딸이다. 주달문은 논개가 4살 때인 1578년 세상을 떴다.

논개는 이후 작은아버지 주달무의 집에 자라났다. 그런데 주달무는 도박에 빠져 빚에 쪼들려 살던 인물이었다. 어느날 인근에 살던 김풍헌이 논개를 민며느리로 보내주면 큰 돈을 주겠다고 제안해왔다. 주달무는 어린 조카를 민며느리로 주겠다고 약조하고 돈을 받았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안 논개 어머니 밀양 박씨는 논개를 데리고 경상도(慶尙道) 안의현에 있는 친정으로 피해버렸다. 그러자 1579년 김풍헌은 이를 관가에 고발했고 결국 밀양박씨와 논개 두 모녀는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이때 두 모녀를 구해준 사람이 있었다. 바로 최경회 장수현감이었다. 당시 최경회 현감은 두 모녀의 사정이 매우 억울하다고 여겼다. 최경회 현감은 두 모녀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두 모녀는 돌아갈 곳도, 생계를 꾸려갈 방법도 없었다.

논개의 어머니는 침방관비(寢房官婢)를 자청했다. 최경회 현감의 부인 나주 김씨는 이들 모녀가 내아 심부름을 하며 지내게 했다. 그 뒤 최경회 현감은 무장현감과 영암군수로 전직되는데 두 모녀 역시 따라가 최경회 부부를 섬겼다. 최경회가 영암군수에 부임한 때는 1582년으로 논개의 나이는 9살이었다. 논개모녀는 이후 계속해 최경회의 곁을 지켰다.

논개는 17살 되던 1590년에 최경회의 부실(副室)이 된다. 논개의 곧은 성품을 지켜본 최경회의 부인 나주김씨가 그리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나주 김씨는 몸이 허약해 남편의 수발을 제대로 들지 못했다고 한다. 나주 김씨는 젊고 총명한 논개라면 남편을 잘 뒷바라지하고 기쁘게 해줄 것을 믿고 논개를 부실로 삼도록 남편에게 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경회는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전라우도 의병장이 돼 최경운·최경장 두 형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고 훈련시켰다. 19살이던 논개는 의병훈련을 뒷바라지하며 남편을 도왔다. 이듬해인 1593년 최경회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제수돼 2차 진주성 전투를 할 때도 논개는 성안의 부녀자들과 함께 관군과 의병들의 수발을 들었다.

악전고투 끝에 진주성이 함락되자 의병장 최경회는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했다. 이에 논개개는 진주성 함락을 자축하는 왜병들의 잔치에 관기로 변장해 참여한 뒤,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촉석루 의암(義巖)으로 유인해 끌어안고 남강에서 뛰어내려 남편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했다.
 

촉석루의 옛사진
촉석루와 의암

수주 변영로 시인은 시 ‘논개’에서 논개를 이렇게 노래했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 맞추었네.

아! 강낭콩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그 마음 흘러라.‘

<해주최씨세보>에 따르면 최경회의 첫부인 나주김씨와 재취 부인 여흥민씨는 모두 정경부인(貞敬夫人)의 칭호를 받았다. 정경부인은 종1품 문·무관의 정실부인에게 내리던 봉작이다. 여기에 논개를 뜻하는 ‘의암부인 신안주씨’는 ‘부실’로 기록돼 있다.

■최경장 선생 후손이 보관중인 일본군 장수의 언월도

충의사에 세워져있는 최경회 의병장 동상
활쏘는 모습의 최경회 의병장

최경회 장군은 활을 매우 잘 쏘았는데 우지치전투에서 200보 밖의 일본군 장수를 활을 쏴 죽이기도 했다. 무주대첩에서 선생은 왜군의 장수가 사용하던 언월도(偃月刀)를 빼앗았다. 

이 언월도는 길이 53cm, 자루가 135cm인 총길이 193cm의 큰 칼이다. 양날이 서있고 등은 굽었는데 칼날에 ‘모루미치(盛道) 작(作)’이라는 칼을 만든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칼은 풍신수길(豊臣秀吉)이 다이묘(大名)급 장군에게 하사한 칼인데 원래는 자웅검이라 해서 한 쌍의 칼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에 남아 있는 다른 한 개의 언월도는 일본의 국보급 문화재이다. 이 언월도는 최경회 장군이 2차 진주성전투에서 순절하기 직전 조카 최홍우에게 건네져 후손들에게 전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충의사에는 이 언월도 모조품이 최경회 장군이 입었던 갑옷등과 함께 전시돼 있다. 진품은 최경장 선생의 후손들이 보관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 경찰은 이 언월도를 빼앗기 위해 후손들을 마을 앞 향나무에 매달아 놓고 고문했으나 후손들은 이 칼을 땅속에 묻어놓고 끝끝내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일휴당 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언월도와 갑옷. 언월도는 최경회 의병장이 왜장을 살해하고 빼앗은 것이다. 일본에서는 같은 종류의 언월도가 국보로 지정돼 있다. 갑옷은 최경회 의병장이 입던 것이다. 전시된 것은 모조품으로 진품은 후손들이 보관중이다.

언월도는 오랜 세월 땅에 묻혀 있었던 탓에 나무로 된 손잡이 부분은 없어지고 말았다. 칼날 곳곳에 녹이 슨 언월도는 광복과 함께 빛을 보았으나 6·25 전쟁 때는 경찰에 압수당해 경찰서 화로 부지깽이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최경장 선생 후손들은 우여곡절 끝에 이 언월도를 다시 찾아와 가보로 보관하고 있다.

최경회 장군을 모시고 있는 충의사에는 전라우의병의 깃발도 전시돼 있다. 깃발에는 골(?)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골입아군(?入鴉郡)이라는 글귀에서 따온 것이다. 골입아군은 송골매가 갈까마귀 무리 속으로 들어가 갈까마귀를 흩어지게 한다는 뜻이다. 즉 용맹한 자가 사악한 사람들을 단숨에 흩어버린다는 것으로 의병이 왜병을 쉽게 무찌를 수 있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최경운 선생과 오성산 전투
 

최경장 의병장(최경회 의병장의 둘째 형)의 15대손인 최현신씨가 고사정에서 오성산을 가리키고 있다. 최 씨는 대한석탄공사 자원기술처장을 지냈으며 해외자원개발 연구소 이사이다.

최경운 의병장은 동생 경장·경회, 아들 홍재·홍수, 조카 홍우 등과 함께 화순 삼천리 고사정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의병을 모집했다. 사재를 털어 병마와 군량미를 마련한 뒤 의병들을 훈련시켜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73세라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일본군이 화순으로 들어오자 집안 가솔들과 인근 백성 등 200여명을 이끌고 화순 오성산성으로 들어가 일본군 3천여명을 상대로 3일간을 싸웠다. 1597년 10월 17일 최경운 의병장은 차남 홍수 및 2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포로로 잡혀 참수 당했다. 정조는 오성산 정상에 ‘진사 최경운 전망 유허비’를 세우고 그의 장한 뜻을 기렸다. 1789년(정조13)에는 다산마을(다지리)에 삼충사(三忠祠)를 건립해 최경운·최경장·최경회 3형제를 배향했다.

■최경회 장군과 논개의 묘

최경회 장군과 논개의 묘는 경남 함양군 서상면 방지리의 당산 뒤편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다. 진주성싸움에서 살아남은 의병들은 낙동강에서 최경회 장군과 논개의 시신을 낙동강에서 건져냈다. 일본군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운구해오다가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어 몰래 한밤중에 방지리 골짜기에 묻었기 때문이다.

최경회 장군과 논개의 묘는 지난 1976년 발견돼 최근 사적지로 지정됐다. 그렇지만 논개의 신분에 대해서는 상당한 오해가 남아있다. 국민적인 재인식이 절실하다. 논개가 관기(官妓)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유몽인이 <어우야담>을 지으면서 논개를 진주 관기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의암영각. 논개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지난 2004년에 건립돼 최경회를 봉사(奉祀)하고 있는 충의사에는 논개를 기리고 있는 의암영각(義岩影閣)이 있다. 의암영각에는 논개의 영정이 두 개 걸려있다. 그런데 그중 하나는 친일 화가인 이당(以堂)김은호(金殷鎬)가 그린 것이다. 후손들은 논개를 이중삼중으로 욕보이고 있다. 후손들의 무관심은 논개를 왜장의 여인으로 여기게 하고 있으며 친일 화가가 논개의 영정을 그리도록 방관했고, 그 영정은 버젓이 충의사에 놓여 있다.
 

왼쪽 영정이 이당 김은호가 그린 ‘미인도 논개’이다. 쪽머리를 한 평범한 조선 미녀의 모습니다. 오른쪽은 윤여환 교수의 ‘표준논개영정’ 이다. 열 손가락에 옥반지를 끼고 있는 모습과 결의에 찬 눈빛에서 남편의 원수를 갚고야 말겠다는 조선 여인의 기개를 엿볼 수 있다.

논개는 기생이 아니다. 의병장의 아내다. 남편인 최경회 의병장의 분통한 죽음에 대한 복수를 아녀자의 몸으로 장하게 해낸 의롭고 기개 높은 조선의 여인이다. 그런 여인을 우리가 제대로 모시지 못하고 있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주논개의 시댁이 화순인 만큼 화순군과 전남도의 적극적인 논개 알리기와 선양노력이 필요하다.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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