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왜구의 고려 침략과 고려를 지킨 정지 장군

 

 

 

최혁 주필의 전라도 역사이야기
6. 왜구의 고려 침략과 고려를 지킨 정지 장군
왜구, 169년 동안 529회 고려 침략 노략질
많을 때는 7천여 명 왜구 내륙깊이 들어와 여자·곡식 약탈
최영·이성계 장군 등 활약, 정지 장군은 호남 지키는데 큰 공

왜구의 침략경로와 왜구를 격퇴한 주요 전투

왜구란 도적집단으로 변한 왜인들을 말한다. 왜구는 신라시대에도 있었다. 하지만 고려 때 왜구가 이 땅에 입힌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왜구들은 끈질기고 줄기차게 이 땅에 쳐들어와 백성들을 죽이고, 여자들을 납치하고, 곡식과 재물들을 약탈해갔다. 각종 보물과 문화재도 빼앗아갔다. 고려는 북방에서 쳐들어오는 거란과 몽골과 대규모 전투를 벌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왜구들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다.

왜구들의 침입과 약탈, 그리고 이를 막아내려는 고려의 군사·경제력 소비는 결국 고려의 국력을 약화시켰다. 왜구의 발호는 고려 왕조의 쇠퇴를 부채질했다. 왜구를 격퇴하는 과정에서 세력을 키운 이성계 장군은 결국 고려왕조를 뒤엎고 조선을 개국했다. 왜구는 고려왕조가 망하게 된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였다.

역사기록에 나오는 왜구의 침입은 1223년(고종 10년)부터이다. 이때부터 고려가 망하는 1392년까지 왜구는 169년 동안 고려를 529회 침입했다. 매년 3번꼴로 쳐들어온 셈이다. 왜구들은 가까운 경상도 지역을 침략하다가 곡식을 실어 나르는 조운선이 많은 전라도까지 쳐들어왔다. 나중에는 개경 근처 해안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약탈했다. 고려 고을 226곳이 피해를 입었다.

왜구의 선단은 적게는 20척에서 많게는 500척에 달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왜구들이 타고 온 배는 시간이 갈수록 130척에서 213척, 350척, 500척 등으로 늘어나는 추세를 보였다. 자연 왜구 병력도 많아졌다. 수 백 명에서 수천 명에 달하는 왜구들이 시도 때도 없이 고려를 유린했다. 기병 700명, 보병 2천명의 왜구들이 상륙해 고려의 수도 개경 근처까지 공격을 감행할 때도 있었다.

■왜구의 발호

 

 

1377년 왜구의 침입로와 침입지

왜구는 고종 10년(1223)에 처음으로 김주(金州, 김해)를 침략했다. 그러나 이후 100년 동안 왜국의 침략은 10여 차례에 불과했다. 왜구의 침략은 충정왕 2년(1350)부터 본격화돼 공민왕과 우왕 때에 최고조에 달했다. 공민왕 때는 70여 차례, 우왕 때는 380차례 정도였다. 왜구들은 시기별로 그 규모가 달랐으나 최소 400명에서 최고 수천 명에 달했다.

왜구들은 처음에는 한반도의 동해안과 남해안 지역을 침략했으나 차츰 그 범위를 넓혀갔다. 경상도와 전라도는 물론이고 충청과 경기도까지 침략했다. 경상도는 왜구들이 배를 타고 오기가 가까웠기 때문이고 전라도는 곡창지대여서 곡식을 구하기가 쉬어서였다. 충청도와 경기도에는 세곡을 실어 나르는 고려의 조운선이 많아 이를 노리는 왜구의 노략질도 그만큼 많아졌다.

왜구들은 우왕 때 수도 개경에 가까운 개풍과 강화도, 예성강 일대까지 쳐들어왔다. 이성계 장군이 지휘하는 고려군이 경상도와 전라도 내륙을 잘 지켜내자 나중에는 수비가 허술한 함경도 일대를 침략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왜구들은 조금만 틈이 보이면 다시 남해안·경기도 일대를 쳐들어와 노략질했다. 수개월 동안 내륙을 휘젓고 다니면서 온갖 만행을 다 저질렀다. 특히 여자들의 피해가 컸다.

■전라도 지역의 왜구 침략

 

 

1351년 왜구침입경로

왜구들의 노략질은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그렇지만 배를 대기 쉬운 해안이 많고 식량이 많이 쌓여있는 전라도의 피해가 특히 극심했다. 현재의 전북지역을 포함해 전라도 지역에는 모두 50차례 왜구들이 침략해왔다. 전남지역에는 30차례 쳐들어왔다. 특히 순천(여수) 지역의 피해가 컸다. 지금의 여수지역을 포함한 순천은 7번이나 침략을 당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따르면 1350년(충정왕 2년)에 순천부(여수)에 침입한 왜구의 규모는 4월 100여 척, 5월에 66척이다. 배 1척당 30명씩 왜구가 탔다고 계산하면 2~3천명 규모의 왜구다. 왜구들은 순천지역 백성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고 많은 문화재를 약탈해갔다. 지금 일본에 있는 고려문화재의 80%는 왜구가 탈취해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구들은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전라도를 침략해왔다. 그리고 세곡을 운반하는 조운(漕運)선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순천과 강진, 진도, 강진, 목포 등 서남해안에 상륙한 왜구들은 화순과 담양, 구례, 광주까지 들어와 노략질을 했다. 왜구들은 배를 타고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와 지리산 일대에 주둔하면서 여자들을 욕보이고 재물을 빼앗았다.

순천 지역에 왜구들의 침략이 많았던 것은 순천에 조창(漕倉)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창은 중앙으로 올라가는 곡식을 보관하던 창고였다. 지역별 왜구의 침략 횟수는 다음과 같다. 지역 명칭 다음의 아라비아 숫자는 왜구의 침략 횟수다.

순천 7(회) 광주 6 장흥 4 낙안 3 영광 2 도강(강진) 2 담양 1 구례 1 해남 1 탐진 1 목포 1 영산 1 나주 1 장성 1 동복 1 곡성 1 조양(보성) 1 보성 1 부유(순천) 1 능성(능주) 1 화순 1 고흥 1 풍안(고흥) 1 옥과 1

왜구들은 고려조정이 조창을 내륙으로 옮기자 곡식을 쫓아 깊은 내륙까지 쳐들어와 패악질을 했다. 1376년 7월에는 왜구가 20여척의 함선으로 전라도 원수의 군영을 공격했다. 왜구들은 나주로 이동하며 고려군의 함선을 불태웠다.

광주는 6회에 걸쳐 왜구의 침략을 받았다. 광주를 침략한 왜구의 규모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우왕 4년(1378) 10월에 광주에 침입했다가 순천병마사 정지(鄭地)와 도순문사 지용기(池湧奇)에게 패해 옥과로 도망친 왜구로부터 말 100여 필을 노획했다는 기록을 참조해보면 수 백 명의 기병을 포함한 1천명 이상의 왜구가 광주를 공격했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

■최영 장군과 이성계 장군의 활약상

 

 

이성계

1380년(우왕 6년)에 대규모 병력의 왜구가 전라도와 경상도를 침략했는데 이때 이성계(李成桂) 장군이 운봉(남원 근처) 일대에서 왜구를 격파했다. 이를 황산대첩(荒山大捷)이라 부른다. <고려사>에는 이 황산대첩에 대해 ‘목숨을 잃은 왜구의 수가 많아 냇물이 6~7일이나 핏빛이 돼 사람들이 마시지 못했다. 왜구로부터 빼앗은 말이 1천600여 필이었다. 왜구의 수가 고려 군사보다 10배 많았는데 70명 정도만 목숨을 건져 지리산으로 도망갔다’고 기록돼 있다.

당시 왜구를 통솔했던 이는 아지발도(阿只拔都)였는데 남원을 공격하다 실패하자 금성(담양)에서 군량을 충당한 다음 다시 고려군과 맞섰다. 지리산으로 도망을 간 왜구들은 다음해 4월 무등산으로 이동해 규봉암에 목책을 세우고 대항했다.

그러나 전라도도순문사 이을진(李乙珍)이 군사들을 이끌고 올라가 목책을 불사른 뒤 왜구들을 모두 소탕했다. 그렇지만 왜구들은 이후에도 광주를 침략해 분탕질을 했다. 이 와중에 많은 여자들이 욕을 당했다. 광주에서는 관리를 지낸 김언경의 아내 김씨가 몸을 더럽히려는 왜구를 꾸짖다 죽임을 당했다. 또 강호문의 아내 문씨는 봉변을 당하기 전에 어린 아들과 함께 절벽에서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1358년 3월 11일, 개성 인근인 배천(白川) 남쪽 40리에까지 왜구 선박 400여척이 몰려왔다. 왜구들은 이곳에 정박 중이던 고려 선박 300여 척을 불태우고 약탈했다. 이에 고려조정은 4월 13일 최영 장군을 양광전라도왜적체복사(楊廣全羅道倭賊體覆使)로 임명하고 왜구 토벌작전에 나선다.

 

 

최영장군

이때 최영 장군의 나이는 60세였다. 전쟁터에 나서기에는 고령이었으나 최영 장군은 우왕에게 간청해 출정했다. 청도 홍산에 이른 최영 장군은 왜구가 쏜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었음에도 공격을 감행, 왜구들을 거의 전멸시켰다. 이른바 홍산대첩이다. 홍산대첩 이후 내륙 깊은 곳까지 밀고 들어와 분탕질을 하던 왜구의 기세가 차츰 약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고려를 구해낸 인물이 이성계(李成桂)다. 1361년에도 왜구는 어김없이 고려를 침략해왔다. 그런데 이 와중에 홍건적까지 고려를 침공해왔다. 공민왕이 개경을 빠져나와 몸을 피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1362년 1월 고려 군사는 어려운 싸움 끝에 개경에서 홍건적을 몰아냈다.

설상가상으로 같은 해 2월 왜구들이 현재의 경남 하동군인 악양현(岳陽縣)을 공격해왔다. 또 나하추(納哈出)가 수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다, 이때 왜구와 나하추를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운 장수가 이성계다. 1378년 왜구들은 황해도와 현재의 부천시인 부평(富平)과 현재의 서울 금천구인 금주(衿州), 인천 지역을 침략했다. 수원은 불타버렸고 충남 부여와 여산, 당진, 서산 등이 왜구들에게 짓밟혔다.

왜구들은 개경을 향해 진격해왔다. 당시 최영 장군은 고려의 전체 군사를 지금의 개풍군인 해풍군에 배치하고 왜구의 개경 공격을 저지하려 했다. 해풍과 개경의 거리는 불과 50여리(11Km) 정도에 불과하다. 왜구들은 “최영 장군 군사만 무찌르면 이제 고려는 우리 것이다”며 총공격을 감행해왔다. 집중공격을 받은 최영 장군의 군사는 왜구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고려 군사들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개경이 위태롭게 됐다. 이때 이성계 장군이 정예기병을 거느리고 나타나 왜구들을 기습했다. 상황은 반전됐다. 최영 장군은 군사를 수습해 이성계 장군과 함께 왜구의 측면을 강타했다. 왜구는 고려 군사에 포위돼 전멸 당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이성계는 백성들의 신망을 얻고 크게 성장한다. 군사적 역량을 축적한 이성계는 신흥 사대부 층을 규합해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한다. 왜구와 홍건적의 고려 침략은 결과적으로 조선 개국의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최무선

고려 수군이 바다에서 왜구들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 말 최무선이 화약을 제조해 포탄을 쏘는 화통을 전선에 장착하면서 부터다. 육지에서는 정지 장군을 비롯 이성계·최영 장군이 출중한 지략과 용맹으로 왜구들을 물리치면서 왜구들의 발호가 다소 진정세를 보였다. 그렇지만 왜구들은 상대적으로 고려군의 방어가 허술한 동해안 일대로 침입을 계속해와 고려를 괴롭혔다

■고려와 호남을 구한 정지 장군

 

 

정지장군

광주를 포함한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을 침략한 왜구를 격파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다름 아닌 정지 장군이다. 정지 장군은 나주 출신으로 원래 이름은 준제(准堤)다. 28세에 중랑장(中郞將) 직책을 맡았으며 공민왕을 지키는 부대에 속해 있었다. 공민왕 23년(1374)에 왜구를 토벌할 수 있는 계책을 올려 전라도안무사 및 왜인추포만호로 임명돼 왜구 격파에 나서게 됐다.

당시 정지 장군이 올린 계책 중의 하나는 수군 육성이다. 그는 왜구를 소탕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강력한 수군이 있어야 한다고 건의했다. 왜구들은 배를 부리는 일에 능한데도 왜구들과 싸우는 고려 수군은 농사를 짓다가 동원된 농민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왜구들에게 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정지 장군은 ‘섬 출신 백성들을 수군으로 선발해 훈련시키면 5년 안에 왜구를 모두 소탕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정지 장군은 또 지방에 파견되는 도순문사(都巡問使)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지 장군은 도순문사가 왜구를 무찌르는데 전력을 다하지 않고 백성을 괴롭히고 있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고려에는 그런 일이 허다했다. 1359년 무안에서 왜구를 무찌른 공으로 나중에 전라도어순사가 된 김횡은 군량미를 착복하고 과부를 겁탈해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

정지 장군은 우왕 초기에 순천병마사로 있으면서 순천과 광주에 침입한 왜구들을 무찌르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가 순천·광주·담양 등지에서 목을 벤 왜구의 수는 100여 명에 달한다. 정지 장군은 우왕 8년(1382)에 해도원수(海道元帥)로 임명돼 남해안 일대에서 수많은 왜구의 배를 쳐부쉈다.

정지 장군은 우왕 8년 진포(鎭浦)에서 왜구의 배 50척을 격파했다. 다음해인 1383년에는 남해 관음포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르는데 이 관음포 대첩은 최영의 홍산대첩, 이성계의 황산대첩과 더불어 왜구 격파의 3대 대첩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 관음포대첩(觀音浦大捷)에서 정지 장군이 지휘하는 수군은 왜구의 배 17척을 불살라버리는 등 120척을 격파했다.

정지 장군은 뒤에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에도 참여했다. 1388년(창왕 1년)에 안주(安州)도 원수로서 함양·운봉·남원지역에 침략한 왜구와의 전투에서 58명의 왜구를 사살하고 말 60필을 노획했다. 정지 장군이 이 전투에서 승리함에 따라 전라도 지역은 왜구로부터 비교적 안전하게 됐다. 바다에서, 육지에서, 정지 장군은 고려를 지키고 또 호남을 지켰다.

정지 장군은 45년의 생애 가운데 14년을 왜구를 물리치며 살았다. 그의 활약 덕분에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은 왜구의 노략질에서 비교적 안전할 수 있었다. 이순신 충무공이 조선을 지킨 명장이었듯이 정지 장군 역시 고려를 지킨 명장이었다.

정지 장군은 나주 출신이었지만 그가 숨을 거두기 전에는 광주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정지 장군은 공양왕 때 이성계에 반대하는 사건에 휘말려 귀양길에 올랐다가 풀려난 이후 광주에 있는 집에서 살다가 운명했다고 전해진다.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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