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혁 주필의 전라도 역사 이야기 7
민족음악을 세계에 널리 알린 안성현
엄마야 누나야·부용산·해당화를 작곡한 남평 출신 작곡가
아버지 안기옥선생 방문차 평양갔다가 길 막혀 월북으로 오인
가족들 평생 고초당해…부용산 작시 박기동도 고통겪다 이민

드들강변에 세워진 안성현 선생의 엄마야누나야 노래비./정찬용씨 제공

■안성현 선생의 흔적을 찾기 시작한 남평 사람들
지난 2006년 5월 28일 연합뉴스에는 북한의 문학신문을 인용해 ‘일제 강점기 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와 광복 직후 <부용산>을 작곡한 월북 음악가 안성현 씨가 지난 4월 25일 사망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1954년 5월 29일 평양에서의 안성현 선생. /전남 나주시문화원 제공

이 뉴스를 접한 서희열, 최정웅 씨등 남평사람들은 ‘엄마야 누나야’라는 그 유명한 노래의 작곡가가 남평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남평의 드들강을 배경으로 해 노래가 만들어졌다는 사실도 신기했지만 안성현이라는 사람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의아스러웠다. 그래서 최씨를 중심으로 해 몇몇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안성현이라는 인물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2001년의 안성현 선생 모습.

최정웅 씨는 광주중흥초등학교 교장을 지낸 분이다. 남평초등 100년사를 편찬하기도 했다. 최씨는 우선 안성현이라는 작곡가에 대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평읍사무소에서 안성현 선생의 부친 안기옥 선생의 제적을 확인했다. 이 과정에서 안성현 선생이 안국현이라는 이름으로 남평공립보통학교(현 남평초) 21회 졸업생이라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후 남평 사람들은 ‘엄마야 누나야 노래연구회(회장 정명호)’와 ‘엄마야 누나야 노래비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최정웅)’를 결성했다. 나주시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드디어 2009년 4월 30일 나주시 남평읍 드들강변 솔밭에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노래비가 세워지게 됐다.
이후 연구회원들은 안성현 선생이 근무했던 목포여자고등학교(구 항도여중)와 그가 음악공부를 했던 일본 도호(東邦)음악학교를 2012년과 2013년에 각각 방문해 선생과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사진 왼쪽부터 엄마야 누나야 노래비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 최정웅씨, 임경렬 나주문화원장, 엄마야 누나야 노래연구회 정찬용씨.

또 나주문화원 임경렬 원장과 정찬용 씨등 연구회 회원들은 2016년 8월 중국 연변대학교를 방문했다. 연변대학 음악학부 최옥화 교수가 안성현 선생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고 있으며 선생의 북한 및 중국에서의 활동상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갖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임 원장 등은 최교수와 면담 후 학술심포지엄 개최에 대한 합의서를 체결하고 돌아왔다.
2개월 뒤인 10월 7일 나주시민회관에서 ‘안성현 국제학술심포지엄’이 열렸다. 이 심포지엄에서 연변대 최옥화 교수는 ‘안성현의 음악예술활동에 대한 고찰’이라는 주제로 안성현 선생의 북한에서의 활동을 소개했다. 이 심포지엄을 통해 안 선생의 1950년 이후의 창작세계 및 활동상이 자세히 알려지게 됐다. 그리고 선생의 월북이 사상적 월북이 아니라는 사실도 명백하게 밝혀지게 됐다.

안화열과 연변대학 예술대학 민족음악학부 교수들

■ 속절없이 월북자가 돼버린 안성현 선생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남한에서는 안성현을 ‘월북한 음악가’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남평 연구회 회원들의 적극적인 자료수집과 주변인물 증언 채록 등을 통해 아버지를 만나러 간 방북길이 월북으로 둔갑해 버린 사실이 밝혀졌다.
김종 전 조선대 교수는 ‘안성현국제학술심포지엄’에서 선생의 평양행은 ‘월북(越北)이 아니라 억북(抑北)이다’고 주장했다. 안성현 선생은 인민군 치하였던 1950년 9월 15일 목포에서 무용발표회를 마치고 평양으로 가는 안성희의 차를 얻어 탔다. 안성희는 무용가 최승희의 딸이다.

안성현의 부친 안기옥

당시 안성현 선생과 목포항도여중에서 근무했던 김재민 씨는 안성현 선생이 평양으로 가기 전 마지막 대화를 나눈 사람이다. 김종 교수는 지난 2008년 6월과 8월, 김재민씨(당시 85세)와 두 차례 면담을 통해 안성현 선생이 왜 평양에 갔는지를 밝혀주는 증언을 확보했다. 그 핵심 증언은 다음과 같다.
“(前略)무용발표회와 리셉션을 마친 장내에 촛불이 꺼졌다. 깜깜한 공간에서 많은 사람이 빠져나가고 나도 현관으로 나가다말고 대기하고 있던 소련제 짚차 앞의 안성현을 만났다. 왜 여기 있느냐고 물으니까 ‘안성희가 음악회 일로 평양에 가자해서 그럴까 한다’고 하였다.
나는 순간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안성현을 본 것은 이것이 마지막이다. 이틀 후 인천상륙작전이 있었으니까 미군들이 서울로 들어갔다면 평양 길이 끊어졌을 텐데 안성현은 어찌 됐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휴전협정이 맺어지고 안성희가 평양에 있다는 풍문이 들려서 안성현도 무사히 평양에 도착했겠구나 생각했다.”
또 김재민 선생은 이렇게도 말했다.
“안성현이 평양에 가던 9월 15일만해도 남과 북이 서로 분단된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국경을 넘어 북으로 간다’거나 또는 ‘삼팔선 또는 휴전선의 북쪽으로 넘어간다’는 의미의 ‘월북’은 용어 자체가 없었을 때이다.
그리고 전쟁 상황이 돌변하면서 안성현이 평양 가겠다고 나선 이틀 후인 9월 17일에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되었고 예측불허의 국면이 전개된 것이다. 일이 이리될 지를 누가 알았겠는가.
이리 본다면 안성현의 평양방문 시점이 대단히 불운했다고 할 수 있고 북한에서 하루하루를 기다리며 상황이 트이기만을 기다리다가 불가피하게 고착된 상황에 붙들린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본의 아니게 묶인 상황은 ‘억북’이라는 말이 어떨까한다.”

안성현과 딸 안화열

■‘엄마야 누나야’ 와 ‘부용산’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시에는 24명의 음악가가 곡을 붙였다. 안성현 선생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는 김소월의 시를 가사로 한 첫 번째 곡이다. 이 노래는 광복직후 미 군정청이 발행한 초등 교과서에 실렸다. 또 선생이 작곡한 3부합창곡 ’진달래‘는 중등음악교재에, 당시 이희성 교수의 고등음악 교재에는 ‘봄바람’ 등이 각각 실려졌다.
지금 일반적으로 알려진 3/4박자 왈츠풍의 ‘엄마야 누나야’노래는 KBS와 TBC의 악단장을 지냈던 김광수씨가 작곡한 것이다. 김광수씨는 가수 배호의 외삼촌이다. 안성현 선생의 ‘엄마야 누나야’는 4/4박자 노래로 전체적으로 장엄하다. 196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안성현 선생의 곡이 주로 불렸으나 70년대 이후로는 김광수씨의 곡이 자주 애창됐다.
이는 사실과는 다르게 안성현 선생이 ‘월북자’로 매도당한 분위기와 관련이 깊은 것으로 보인다. 선생의 ‘엄마야 누나야’ 노래는 김소월의 시에 드들강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담은 수작이다. 그런데 용공딱지가 붙으면서 안성현 선생의 곡은 의도적으로 매장되고 대신 그 자리를 밝은 분위기의 김광수씨 곡이 채운 것이다.
부용산 역시 애처로우면서도 장중한 맛이 넘치는 곡이다. 박기동은 죽은 여동생 박영애를 그리워하며 시를 썼다. 거기다 안성현 역시 여동생 안순자를 병으로 잃었다. 그런 상황에서 서울에서 전학 온 예쁘고 총명한 김정희가 요절하는 가슴 아픈 일까지 겹쳤다. 그러니 부용산의 노랫말이나 곡조가 비장할 수밖에 없다.
부용산은 여순사건 이후 벌교와 지리산 일대에서 활동하던 빨치산이 즐겨 부르면서 어느 사이 불온한 노래가 돼 버렸다. ‘부용산’ 시를 지은 박기동씨 역시 당국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야만 하였다. 수시로 기관에 끌려가 고문과 탄압을 받는 일이 되풀이되자 박기동은 호주로 이민을 가고 말았다.
박기동선생이 쓴 시 ‘부용산’은 노랫말로 치자면 1절만 있었다. 그런데 2000년 연극인 김성옥씨(손숙 전 환경부장관 남편)가 수소문 끝에 호주에 살고 있는 박기동선생을 만나 부용산의 2절 가사를 부탁했다. 간절한 요청에 박기동 선생은 2절 가사를 써놓고 30여분 동안 엎드려 통곡을 했다고 전해진다. 1947년 부용산 1절 가사가 나온 뒤 53년만에 2절 가사가 나온 것이다. 박기동 선생의 시에 안성현 선생이 곡을 붙인 부용산은 안치환과 이동원, 한영애 등의 가수들이 그들의 앨범에 곡을 올렸다.

시 부용산은 다음과 같다.

■부 용 산
부용산 오리길에/잔디만 푸르러 푸르러/솔밭 사이 사이로/회오리 바람을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너는 가고 말았구나/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 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1947년)

그리움 강이 되어/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재를 넘는 석양은/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너의 꿈은 간데없고/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 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2000년)
/최혁 기자 kjchoi@namdonews.com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