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운전사’ 유감

‘택시운전사’ 유감

<최혁 남도일보 주필>
 

영화 ‘택시운전사’를 본 누적관객 수가 지난 20일을 기해 1천만 명을 넘어섰다. 21과 22일에도 하루에 50만 명씩이 영화를 봤으니 1천100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 대단한 흥행몰이다. 영화평론가들은 영화가 관찰자적 시각에서 만들어진 점, 그리고 그 관찰자가 독일기자 힌츠페터였다는 사실이 객관성을 더해 흥행에 성공한 것 같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광주사람들로서는 반갑다. 이제야 좀 ‘광주의 아픔’을 제대로 알아주는 것 같아 흡족한 기분도 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상영시간(러닝타임) 137분의 위력이 너무도 대단하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5·18의 진상규명을 위해 몸부림치고, 호소했던 지난 37년의 세월이 무기력하고 초라하게 느껴진다. 그동안 타 지역 사람들은 광주사람들이 광주학살에 대해 “이러저러했다”고 말하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에이, 설마 그리했을라고~”라며 의심쩍어했다. 그 세월이 자그만치 37년이다. 그런데 지금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정말 그랬구나~”

장훈 감독이 제 아무리 연출을 잘하고 송강호가 열연을 했어도, 영화는 실제보다 못한 것이 사실이다. 80년 5·18 당시 광주를 뒤덮은 것은 공포였다. 계엄군들은 마구 죽이고 때렸다. 관객들은 간접경험으로도 두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광주사람들은 80년 광주를 직접 경험했다. 당시의 광주는 영화 속의 광주보다 훨씬 더 참혹했다. 그 참혹함은 사진과 영화, 증언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상당수 국민들은 이를 외면했다. 광주사람들의 말을 제대로 받아주지 않았다.

기자는 ‘잘 만들어진 영화야말로 메시지 전달에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말을 하려고 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우리 국민들의 ‘얄팍한 부화뇌동(附和雷同)’을 꼬집고 싶다. 37년동안 ‘광주’는 국민관심사의 우선순위에서 밀려 있었다. 광주가 ‘5·18’을 말하면 “이제 그만 좀 하자”하고 말했다. 그런데 영화 한편 때문에 ‘광주’가 일약 우리사회 최고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기자는 그 얄팍한 집단적 사회의식이 마땅치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잘 된 일에 초치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기자는 우리가 ‘제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국민이 되려면 부화뇌동의 습성을 끊어야한다고 믿는다. 부화뇌동은, 다른 표현으로 ‘냄비근성’이다. 냄비 근성은 ‘쉽게 끓었다가 쉽게 식어지는 것’을 말한다. 쉽게 끓는 것은 중심이 없기 때문이다. 쉽게 식는 것은 망각을 잘하기 때문이다. 꿰뚫어보지 못하기에 당하고, 이용당한다. 망각하기 때문에 역사의 교훈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비극이 되풀이되고 있다.

기자가 잘못됐다고 말하는 냄비근성은 ‘주관이 없이 휩쓸리는 것’을 뜻한다. 80년 그 수많은 해직기자들이 광주를 말했다. 80년 당시에도 많은 광주의 취재기자와 사진기자들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계엄군들의 학살을 고발했다. 또 사망자의 유족들과 부상자들이 그날의 참극을 증언했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많은 동의(1천만 명 관객의 반응)를 받아내지는 못했다. 알리는 방법이 잘못돼서 였을까? 아니다. 받아들이는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은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는 국민성이 문제다. 특히 외국의 평가와 ‘외산(外産)’에 맥을 못추는 성향과 깊은 관계가 있다. ‘1980년의 광주’가 화제가 된 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 외국인기자의 눈을 빌어 들여다봤기 때문이다. ‘외신(外信)들이 어떻게 볼까?’그 한마디면 길거리 쓰레기들이 싹~사라지는 것과 무관치 않다. 우리 전통의 체면문화와도 연결돼 있다. 내 자신의 평가보다 외부의 평가를 더 중요시하는 성향이, ‘택시운전사’ 열풍을 불렀다고 본다.

문재인 정권의 출범도 한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불과 몇 달 전만 하더라도 국민들 중 일부는 ‘5·18 공식행사’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것에 거부감을 나타냈다. 보훈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지금은 다 바뀌었다. 정권이 바뀌니까, 기준도 판단도 달라진 것이다. 달라진 시류 때문에 박정희기념우표발행이 무산된 것도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 소신을 고집하는 ‘도가니’가 되면 다친다. 그래서 ‘쉽게 끓고(변신), 쉽게 식는(순응)냄비’만 살아남는다.

소녀상도 마찬가지다. 광주를 비롯 전국에는 일제가 악행을 저지른 장소가 널려있다. 호남의병의 본거지였던 광주는 더욱 그렇다. 광주천과 어등산에서는 수 많은 의병들이 총살당했다. 산수동에 있었던 광주교도소에서는 수많은 의병들이 고문을 당하고 죽어나갔다. 그런데 이런 장소에 대한 기념은 외면한 채 ‘소녀상 건립’만이 마치 극일의 상징인 것처럼 분위기가 흘러가고 있다. 소녀상은 일부일 뿐이다. 영화 ‘택시운전사’도 그렇다. 137분의 영화 때문에 광주가 부활한 이 현실이 못마땅하다. 한편으로는 이나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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