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명량…13척이 133척을 깨부수다

 

 

 

최혁 주필의 전라도 역사이야기
10. 명량대첩과 이순신장군

이순신 장군의 지략과 전라도 바다사나이들의 용맹스러움은 절대 열세였던 싸움을 승리의 싸움으로 바꾸었다. 이순신의 ‘사즉생’ 정신은 13척의 전선이 133척을 물리치는 세계해전 사상 유례없는 승리를 거두게 했다. 울돌목(명량)에 서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 /해남군 제공

명량대첩은 이순신 장군의 지략과 전라도 바다사나이들의 용맹스러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승리였다. 이순신장군은 열악한 상황을 불굴의 의지로 극복했다. 군율을 엄히 해 조선수군을 강한 부대로 만들었다. 전라도 사람들과 수군들은 나라를 구해야한다는 일념으로 전쟁터에 나가 목숨을 바치고 희생했다. 명량대첩은 용맹한 이순신장군과 의로운 전라도인의 투혼 때문에 가능했던 전투였다. 명량대첩을 통해 조선은 다시 살아났다.

그날의 명량…13척이 133척을 깨부수다
이순신의 지략과 조선수군의 용맹이 거둔 대승

도요토미 히데요시
고니시 유키나가

1592년 4월 13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만 명의 군대를 조선으로 출병시켰다. 왜군의 선봉은 고니시 유키나가였다. 고니시는 13일 오후 부산 앞바다에 도착했다. 다음날 그들은 부산진을 공격했다. 임진왜란의 시작이었다. 부산첨사 정발이 1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항거했으나 왜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부산진성 전투도
일본의 조총. 진열품은 에도 시대의 것이다.
/(CC)Rama at Wikipedia.org

부산진을 무너뜨린 왜군은 15일 동래로 진격했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부하들과 함께 결사 항전했으나 전사했다. 부산에 교두보를 확보한 왜군은 본대가 도착하자 군사를 셋으로 나눈 뒤 4월 18일부터 한양을 향해 북진했다. 신립장군이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싸웠으나 결국 몰살당했다.
 

선조피난행렬.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생을 그린 문학
/‘회본태합기’에 삽입된 삽화

왜군은 거칠 것이 없었다. 왜군이 빠른 속도로 진격해온다는 소식에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평양으로 도망을 갔다. 조선관군의 임진강·대동강 방어선이 무너지자 선조는 다시 평양을 버리고 의주로 향했다. 임진왜란 발발 2개월 만에 평양이 함락된 것이다. 선조는 명나라로 망명할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선조를 추격하던 고니시군이 평양에 머물면서 움직이지 않은 것이다. 왜군이 10일만 쫓아가면 붙잡을 수 있는 선조에 대한 추격전을 중단한 것은 지금도 풀리지 않은 의문점이다. 고니시가 조선정벌이 거의 다 이뤄졌다 생각하고, 병사들을 쉬도록 했던 것이 이유로 보인다. 왜군들은 계속되는 전투와 행군으로 매우 지쳐 있었다.

그런 사이 상황이 바뀌었다. 이순신장군이 옥포해전에 이어 사천포, 당포, 한산도, 안골포 등의 해전에서 일본 수군을 무찌르면서 바다를 장악해버린 것이다. 이에 따라 서해바다를 거쳐 대규모 군대를 한양으로 보내겠다는 도요토미의 전략은 틀어져버렸다. 거기다 명의 이여송이 12월에 5만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으로 들어왔다.

명나라 군사와 조선관군·의병들은 1593년 정월 초하루부터 왜군이 점령하고 있는 평양성을 공격했다. 견디지 못한 왜군은 평양성을 버리고 퇴각했다. 왜군은 경남 남해안 일대에 모여 방어에 들어갔다. 7월에 선조가 한양에 환도했다. 10월에는 왜군에 잡혀 있던 임해군, 순화군이 풀려났다. 명과 일본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전쟁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명과의 협상을 통해 전열을 정비한 왜군은 1597년 대대적으로 조선을 다시 공격했다. 당시 이순신장군은 일반 병사의 신분이 돼 있었다. 부산 일대 일본수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선조와 조정대신들은 왜군의 막강한 수군전력을 감안치 않고 허장성세에 불과한 공격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명령이었다. 그래서 조정은 이순신장군을 파직하고 장군은 백의종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유재란 초기 원균(元均)이 거느린 조선 수군은 패배를 거듭했다. 1597년 7월 7일에 벌어진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수군은 대패했다. 400여명이 전사하고 200여척의 전선 중 불과 12척만 남았다.

조정은 이에 7월 23일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임명했다. 이순신 장군은 8월 3일부터 8월 17일까지 전라도 해안지대를 살피면서 부임했다. 장군은 장흥 회령포에서 전선 12척을 수습했다. 그리고 전라우수영에 계류 중이던 전선 1척을 합류시켜 모두 13척의 전선으로 조선수군을 다시 꾸렸다.

그러나 조정은 이순신의 수군을 믿지 않았다. 바닷길 방어의 중요성을 감안하지 않은 채 이순신장군에게 조선육군과 힘을 합쳐 육지전투를 나설 것을 지시했다. 선조는 선천관 박천봉을 보내 ‘조선 수군이 미약하니 육군에 의탁해 싸우도록 하라’라는 수군 폐지방침을 통보했다. 이에 이순신장군은 보성 열선루(列仙樓)에서 ‘수군으로서 싸우겠다’는 의지를 담아 장계를 올린다.

이것이 그 유명한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전선이 있습니다’라는 내용의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 장계다. 장군은 일본수군이 대규모 공격을 시작하려 하자 13척의 전선을 이끌고 8월 19일 회령포를 떠나 진도 벽파진으로 후퇴했다. 적은 수의 전선으로 넓은 바다에서 싸우면 전멸당할 우려가 컸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은 벽파진 바다도 조선수군에 불리하다고 판단해 9월 15일 우수영으로 진을 옮겼다.
 

필사즉생 필생즉사
조선 수군의 주력함 판옥선
거북선

이순신 장군은 수하 장졸들에게 ‘必死則生, 必生則死(필사즉생 필생즉사)’의 정신으로 싸워줄 것을 당부했다. 마침내 9월 16일 이른 아침, 일본 수군이 명량(울돌목)으로 진입했다. 일본 수군의 전선은 133척이었다. 당시 울돌목의 조류는 거의 멈춰선 상태(停潮時期)였다. 이순신장군은 일자진(一字陣)을 형성해 일본 수군의 명량통과를 저지했다. 일본 수군은 이순신장군이 타고 있던 전선을 포위해 공격하려 했다.

이때 이순신장군은 뒤에 배치돼 있던 거제현령 안위(安衛)와 중군(中軍) 김응함 등이 타고 있던 전선을 적진으로 돌진케 했다. 때마침 조류가 급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좁은 수로에서 물살이 급하게 흐르자 일본 전선의 대형이 무너졌다. 전투 중에 조선수군이 일본의 수군장수 구루시마(來島通總)의 목을 베어 높이 매달자 일본수군의 사기가 떨어졌다. 조선수군이 대포(玄字銃筒)를 쏘며 맹렬히 공격하자 일본수군은 도망을 가기에 바빴다.

이날 해전에서 31척의 일본수군 전선이 격파됐다. 바다 물길을 적절히 이용한 전략으로 13척으로 133척의 전선을 물리친 것이다. 명량해전은 세계해전사상 유례없는 대승이었다. 명량해전의 승리로 조선수군은 서해바닷길을 지킬 수 있었다. 만약 명량해전에서 조선수군이 패배했더라면 왜군은 서해와 한강, 대동강, 압록강을 이용해 군사를 조선 내륙 깊은 곳까지 실어 나르며 조선전역을 유린했을 것이다.

■제10회 명량대첩 축제

8일부터 10일까지 울돌목 일대

대첩재현행사, 국제학술심포지엄 등
 

지난해 명량대첩 재현 장면. 10회째를 맞고 있는 명량대첩 축제는 오는 8일부터 10일까지 울돌목 일대에서 펼쳐진다. 대첩재현행사와 학술심포지엄 등 다양한 행사가 준비돼 있다. /전남도 제공

올해는 명량대첩을 거둔 지 420년이 되는 해이다. 칠주갑(七周甲·60갑자가 7번 반복)이다. 재단법인 명량대첩 기념사업회는 10년 전부터 명량대첩 축제를 열고 있다. 올해는 오는 9월 8일부터 3일간 열린다. 축제행사는 명량대첩 해전 재현을 비롯 명량 골든벨, 이순신 장군 체험, 활쏘기 등 다양한 역사 체험형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 우수영 유스호스텔 대강당에서는 국제학술심포지엄도 열린다.

‘세계 해전사 속의 위대한 승리 명량대첩’이라는 주제로 열리는 국제심포지엄에서는 포르투갈 루퍼 교수(프랑스1대학)가 포르투갈 선교사·선박·대포·조총과 임진·정유재란의 상관관계를, 중국 백승호 교수(절강대)가 중국 절강지역 군사들과 조선과의 관계를, 일본 리양희 교수(兵庫大)가 일본사회는 명량해전과 이순신장군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 각각 발표하게 된다.
 

명량대첩 재현행사.
충무공 이순신 표준영정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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