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살리는 공동체 정신

사람을 살리는 공동체 정신

<최유정 동화작가>
 

미루고 미뤘던 원고 작업을 마쳤다. 의뢰 받은 글은 ‘평화를 품은 집’(평화 도서관과 제노사이드 역사자료관을 운영)에서 기획, 출간하는 소책자에 실릴 글인데 몇 달 전 의뢰를 받고도 첫 문장을 시작 못 해 끙끙 앓고만 있었다. 끝내고 나니 속이 다 시원했다.

실은 사전 인터뷰 원고를 받은 첫 날부터 눈앞이 깜깜했다. 원고의 배경이 1950년, 한국전쟁이었기 때문이었다. 부끄럽게도 필자는 교과서에 나와 있는 정도 외엔 한국전쟁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알려진 사실보다는 개인적 삶을 통해 전쟁의 이면을 들여다 봐 달라는 담당자의 부탁 역시 부담스러웠다. 그렇게 첫 문장은 부담감과 낭패감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담당자의 부탁 때문이었을까? 17세, 꽃 같은 소년을 전쟁터로 이끈 정치적 배경보다는 점점 당시 17세 소년이 느꼈을 무력감과 공포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죽을 수 있는 상황인데도 그를 살린 사람들, 소년 김남열이 살린 많은 사람들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인터뷰의 주인공인 김남열 어르신은 17살 어린 나이에 한국전쟁에 참여, 10여년을 군에서 생활한 분이다. 당시 자행된 양민학살에 어르신 역시 가담, 20여명이 넘는 사람을 자신의 손으로 처형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공부를 시켜주고 먹을 것도 준다는 제안에 1948년, 군에 입대한 어르신은 한국 전쟁이 본격 시작되기 전인 1949년, 후퇴하는 군대를 따라 고향을 떠났다. 다음 해인 1950년 9월, 유엔의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다시 군부대가 있는 파주로 재입성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어르신은 아주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된다.

소중한 경험! 운명과도 같은 이 경험이 없었다면 김남열 어르신은 20명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죽였을 것이다. 아니 죽여야만 했을 것이다. 당시는 총과 폭탄만큼이나 ‘사람’이 무서운 시절이었다. 언제부터,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피붙이조차 조심해야 했던 시절, 숨어 지내던 마룻장 밑으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어르신은 폭탄 소리만큼이나 무서웠다고 했다.

부역자라는 꼬리표만 달면 누가 누구를 죽여도 아무렇지 않았던 시절, 어르신 역시 여러 번 죽을 고비에 처했었다. 누구든 김남열을 봤다는 말 한마디면 어르신을 죽일 수 있었다. 그런데도 동네에서 알고 지냈던 윤혁, 성기옥 등은 어르신을 신고하지 않았다. 신고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피 생활을 도와주기까지 했다.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 사소한 도움을 줬다는 이유만으로도 자신들이 죽을 수 있건만 목숨을 내놓는 위험을 자초한 것이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파주 군부대에서 근무하게 된 어르신은 아이러니 하게도 군국 치안대장을 맡게 된다. 부역자 명단에서 다시 만나게 된 윤혁과 성기옥, 그리고 성임경. 어르신은 차마 그들을 죽일 수 없었다고 했다. 결국 공개처형 직전, 어르신은 성임경과 성기옥의 가족을 살려 주게 된다. 이후에도 어르신은 여러 목숨을 구해 준다. 이 또한 몹시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곡절 없는 인생이 없고 사연 없는 인생이 없다고들 한다. 하지만 김남열 어르신의 삶만큼 현대사를 관통한, 아니 현대사의 비극을 통째로 등에 지고 살아야 했던 인생이 얼마나 될까? 진정, 비극은 이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르신 같은 분들이 우리 주변에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란 추측 또한 필자에겐 엄청난 충격이었다.

필자는 당시, 죽일 수도 있고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을 극복해 낸 것은 ‘공동체 정신’ 때문이란 생각을 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서로를 살게 한 그들은 식민의 시대를 함께 견뎌낸 사람들이었다. 나라 잃은 설움과 울분을 함께 나누었던 사람들, 골은 배를 움켜쥐며 쌀 한 톨, 물 한 모금을 함께 나누었던 사람들. 식민의 시대를 함께 견뎌낸 공감과 이해가 없었더라면 그들 역시 총칼 앞에 무기력하게 무너졌을 것이다. 내 앞에 있는 존재가 ‘사람’ 이라는 자각을 지우고 벌레 죽이듯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를 모함하고 죽여 버렸을 것이다.

삶과 운명을 함께 하는 ‘공동체’ 정신, 서로를 단단하게 엮어주는 이러한 공동체 정신을 지난 2016년 겨울과 2017년 봄, 우리는 연거푸 경험했다. 전국에서 타올랐던 수만 개의 촛불. 그 촛불이 없었다면 죽음과도 같은 날들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을 것이다. 연대의 정신, 공동체의 정신이 사람을 살리고 나라를 살린 것이다.

마침표를 찍고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을 나선 밤, 칠흑 같은 어둔 길을 별빛이 밝혀주고 있었다. 필자는 별빛을 의지 삼아 어둔 길을 걸으며 통렬한 비극을 이겨낸 한 줄기 빛을 다시 생각했다. 아무리 어둔 길이라도 한 줄기 빛이 있으면 능히 어둠을 물리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역시나 김남열 어르신의 삶을 지배한 비극은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의문이 남았다. 공허했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현실이 그저 암담할 뿐이었다. 다시는 17세 꽃다운 나이 김남열과 그의 후손을 비극으로 내모는 현실이 되풀이 되어선 안 될 것이다. 어느 새 하늘 가득 별빛이 퍼지고 있었다. 어둔 길에도 별빛이 지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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