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혁 주필의 전라도 역사이야기

11. 다산 정약용선생과 애절양(哀絶陽)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이어지는 뿌리의 길. 다산 정약용선생은 이 길을 걸으면서 어떻게 해야 올바른 정치를 펼칠 수 있는지를 고민했다. 다산선생은 탐관오리들로부터 고통 받는 백성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가슴아파했다. 이 뿌리의 길에는 나라와 백성을 염려하는 다산선생의 자취가 오롯이 남겨져 있다. / 강진군 제공

 

강진에는 강진현감 뿐만 아니라 전라지역 육군본부라 할 수 있는 병영성과 해군지역사령부 격인 수군만호가 있어 그 어느 지역보다 수탈이 심했다. 더 이상 이렇게 살수 없다며 남자들이 자신의 남근을 잘라버릴 정도니 탐관오리들의 학정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알 수 있다. 관리들은 자신들의 배만 불리고 나라가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조선은 망했다.

 

원통해서 못 살겠네…

당신들은 이리떼요…

 

강진의 아낙네, 남편의 잘린 물건 손에 쥐고 관아 앞 대성통곡

아이 몫까지 세금 매기는 수탈에, 농부 낫으로 성기 잘라 버려

정약용 선생 참극 전해 듣고 비통한 마음으로 ‘애절양’ 시 남겨

 

다산영정

 

 

다산초당

■강진 어느 아낙네의 통곡

1800년대 초 강진 땅. 한 젊은 아낙네가 강진 관아 앞에서 통곡을 하고 있었다. 머리는 산발이었고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었다. 등에는 어린아이가 업혀져 있었다. 아이 또한 울고 있었다. 엄마의 울부짖는 소리에 놀라서였을 게다. 젖이 고파서 더 칭얼댔는지도 모른다.

젊은 아낙네의 손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한 주먹 정도의 살점이 들려 있었다. 아낙네는 관아를 지키는 포졸들을 밀치며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울며 외쳤다.

“이보시오, 수졸나리들. 내가 너무도 원통해서 사또를 좀 만나려고 하는데, 어이해 내 앞을 가로막는단 말이오. 이 억울한 일을 누구에게 하소연한단 말이오. 내손에 들린 이게 무엇인지 당신들은 알죠? 내 불쌍한 남편의 양물이요.

당신들이 야차처럼 덤벼들어 이리 뜯고 저리 뜯어가니 내 남편이 살수가 없다면서 시퍼런 낫으로 잘라버린 것이오. 이제 젖 뗀 아이에게도 장정들이나 낼 군포를 내라하니, 이게 말이되는 소리요?

갓난 아이 몫으로 떠맡긴 군포는 당신들이 배를 불리기 위해 억지로 만든 세금이요. 억지인줄 알지만 내지 않으면 경을 치기에 어찌어찌 돈을 마련해 군포를 냈소. 그것도 한 두 번이지, 찢어지게 없는 살림에 제사 돌아오듯 철 바뀌면 또 내 놓으라 그리 난리를 쳐대니 이런 사단이 난 것 아니요.

불쌍한 내 남편, 억하심정 참지 못해 내 죽을지언정 이번에는 내지 않겠다고 버텼소. 그러니 당신들 득달같이 오랏줄에 묶어 달려와 북 패듯 두들겨 때리고 천하보다 귀한 소를 끌고 가버리니 내 남편이 이 세상을 한탄하지 않을 수 있겠오?

아전들 득달과 포졸들 매질에 견디다 못해 내 남편, 군포 낼 것이니 그만 때리시오~그리 약조하고 감옥에서 풀려나왔소. 자리에 누운 남편, 몇날 며칠을 꺼이꺼이 울면서 이세상이 야속타~이 모진 세상이 살기 싫다~그런 하소연만 하더이다.

그러더니 어느 날, 남편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헛간으로 달려가더니, 이 양물이 없었더라면 자식들도 낳지 않았을 텐데...이 양물이 웬수다! 그리 외치면서 순식간에 허리춤 풀어 시퍼렇게 날선 낫으로 양물을 잘라버리더이다.

이게 내 남편 양물이오. 남정네 세상에 전쟁터 나가 양물 다쳐 돌아왔다는 소리는 들었어도 세금 득달에 지치다 못해 남정네 제 손으로 양물 잘라버렸다는 소리는 생전 들어본 적 없소. 그런데 내 남편이 그 신세가 됐소.

어찌 살란 말이오. 양물 잘라버린 내 남편은 생사를 헤매는 지경이 되버렸소. 설령 살아난다고 해도 내 남편은 졸지에 남자구실 못하는 고자가 돼버렸고, 나는 생과부나 다름없는 신세가 돼 버렸소. 몇 뼘 되지 않은 땅에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해도 세금으로 뜯기고 나면 우리 식구들은 먹을 것이 없어 찬물로 허기를 달래는 이 세상은 지옥이요.

내 남편을 이리 만든 사또 나리를 좀 만나야겠소. 내 억울한 사정을 풀지 못하면 차라리 이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죽고야 말겠소. 백성들을 잘 살게 다스리라는 임금의 명을 받은 사또 나리는 오히려 저승사자보다 더 지독한 사람이니 이렇게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더 낫겠소!”
 

다산동상

■정약용 선생이 쓴 한시, 애절양(哀絶陽)

강진관아에서 울부짖던 그 아낙네의 하소연은 아마도 그리했을 것이다. 이 아낙네의 하소연을 후세사람들에게 남긴 분은 다산 정약용 (丁若鏞 )선생이다. 정약용 선생은 1803년 가을 전라도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중 이런 이야기를 전해 듣고 ‘애절양(哀絶陽)’이라는 시를 지었다. 애절양은 ‘남자의 성기가 잘림을 슬퍼하노라’라는 뜻이다.

애절양에는 당시 탐관오리들의 어떻게 백성들을 수탈했는지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이미 죽은 시아버지와 태어난지 사흘밖에 되지 않은 사내아이에게 군포세를 매겼다. 죽은 이에게 세금을 매기는 백골징포(白骨徵布)와 젖비린내가 나는 어린아이에게 군역을 부과한 황구첨정(黃口簽丁)이다.

정약용 선생은 <목민심서>에 애절양을 지은 동기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이 시는 嘉慶 癸亥(1803) 가을 내가 강진에서 지은 것이다. 그때 노전에 사는 백성이 아이를 낳은 지 3일 만에 군보(軍保(군보;군적)에 올라 있어 이정(里正;이장정도에 해당되는 하급관리)이 군포 대신 소를 빼앗아가니 남편은 칼을 뽑아 자신의 남근을 잘라버리면서 나는 이 물건 때문에 이런 곤액을 받는구나 하였다.

그 아내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남근을 가지고 관가에 가서 울면서 호소하였으나 문지기가 막아버렸다. 내가 이를 듣고 이 시를 지었다‘

당시 정약용 선생은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척결할 힘도 없고 백성들의 억울함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애절양을 썼다. 정약용 선생은 정조가 살아있을 때는 정조의 보살핌에 힘입어 권신들의 모함과 비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조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에는 바로 탄핵을 받아 귀양에 보내졌다. 자신의 목숨도 부지하기 힘든 상황인 만큼 백성들의 고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애절양의 본문과 한글풀이는 다음과 같다.

哀絶陽(애절양)

蘆田少婦哭聲長(노전소부곡성장)갈밭마을 젊은 아낙 대성통곡하며 울부짖네

哭向縣門號穹蒼(곡향현문호궁창)관문 앞으로 달려가 울다가 하늘보며 소리치기를

夫征不復尙可有(부정불복상가유)출정나간 지아비 돌아오지 못하는 일은 있어도

自古未聞男絶陽(자고미문남절양)사내가 제 양물 잘랐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네

舅喪已縞兒未 (구상이호아미조) 시아버지 돌아가신지 삼년이나 됐고, 갓난아이 배냇물도 채 마르지 않았는데

三代名簽在軍保(삼대명첨재군보)이 집 삼대 이름 군적에 모두 실렸네

薄言往 虎守 (박언왕소호수혼) 억울한 사연을 전하려 해도 관가 문지기는 호랑이 같고,

里正咆哮牛去早(이정포효우거조) 이정은 막무가내로 외양간 소마저 끌고 갔다네

磨刀入房血滿席(마도입방혈만석) 남편이 낫 들고 방에 들어가더니 피가 방에 흥건하네

自恨生兒遭窘厄(자한생아조군액) 비명지르며 한탄하기를 모두 아이 낳은 죄다

蠶室淫刑豈有辜 (잠실음형기유고) 잠실음형(누에치던 방에서 불알 까는 형벌)도 억울하고

민건去勢良亦慽 (민건거세양역척) (중국 복건성에 있던 민나라의) 거세풍속도 진실로 슬픈 것이 거늘

生生之理天所予 (생생지리천소여) 자식을 낳고 사는 이치는 하늘이 준 것이요

乾道成男坤道女 (건도성남곤도여) 남자가 하늘이 되고 여자가 땅이 돼 생육하거늘

선馬분豕猶云悲 (선마분시유운비) 거세한 말과 거세한 돼지도 오히려 슬프다 할만한 데

況乃生民思繼序 (황내생민사계서) 하물며 백성이 후손 이을 것을 생각함에 있어서랴!

豪家終世奏管弦(호가종세주관현)권세가들은 평생 동안 풍악이나 즐기지만

粒米寸帛無所損(립미촌백무소손)권세가들은 쌀 한 톨 베 한 치 세금 내는 일 없네

均吾赤子何厚薄(균오적자하후박)모두 다 같은 백성인데 이다지 불공평하니,

客窓重誦 鳩篇(객창중송시구편)창가에 우두커니 앉아 기막힌 사연을 시로 읊조리노라

한자의 뜻: 절양(絶陽) : 생식기를 자름. 노전(蘆田) : 강진(康津)의 邑名. 현문(縣門) : 관아의 문. 궁창(穹蒼) : 높고 푸른 하늘. 아미조(兒未조) : 아이를 낳고 아직 배냇물도 씻어내지 않았다는 것으로 낳은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뜻. 삼대(三代) : 시아버지·남편·자식을 가리킴. 명첨(名簽) : 이름. 군보(軍保) : 正軍과 保人, 군대를 안 가는 대신에 쌀이나 벼를 세금으로 내도록 한 제도. 박언(薄言) : 짧은 언변. 호수혼(虎守혼) : 호랑이 같은 문지기가 문을 지키다. 이정(里正) : 관리. 포효(咆哮) : 사나운 짐승이 울부짖음. 조(조) : 외양간

잠실(蠶室) : 누에치는 방. 여기서는 궁형을 행하는 방. 궁형을 행하는 방은 누에치는 방처럼 덥게 했다고 함. 음형(淫刑) : 궁형. 남자의 생식기를 자르는 형벌. 민건거세(민건去勢) : 민나라에서 사내아이를 낳으면 거세하여 이웃의 강대국들에게 내시로 바쳤던 일화. 생생지리(生生之理) : 자식을 낳고 사는 이치. 선馬분豕 : 거세한 말과 거세한 돼지. 계서(繼序) : 후손을 이음. 객창(客窓) : 유배지에서 읊으므로 객이라 함. 시구편(시鳩篇) : 시경(詩經)에 수록된 시의 편명(篇名).

■조선시대 관리들의 수탈

조선 중기부터 관리들의 수탈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에는 더욱 극심해졌다. 국가재정을 충당하던 삼정이 문란해졌기 때문이다. 농토에서 나오는 세금인 전정(田政)과 남자들이 병역을 치르는 대신 군포(軍布:베)를 내던 군정(軍政), 가난한 농민들에게 곡식을 빌려주고 추수기에 이자를 붙여 회수하던 환정(還政)이 벼슬아치와 지방 관리들이 백성들을 뜯어먹는 수단으로 변질됐다. 백성들은 몽둥이를 휘두르며 덤벼드는 관리들을 이리와 승냥이로 여겼다.

양반들과 토호들은 토지대장에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농토를 누락시켜 세금을 내지 않았다. 관리들은 힘없는 농민들을 닦달해 부족한 쌀을 채웠다. 실제로는 없는, 가짜 땅을 서류상으로 만들어(백지징세:白地徵稅) 세금을 내도록 했다. 젖 먹는 어린아이에게도 군포를 내도록 하고(황구첨정), 죽은 사람에게도 세포(稅布)를 내도록(백골징포)했다. 빌려준 쌀의 양을 서류상으로 부풀려(번작:反作)갈취했다. 관리들은 악랄하고 잔인했다.

조선시대 김시습은 영산가고(詠山家苦)라는 시를 통해 백성들이 굶주림과 추위에 떠는 것은 흉년 때문이 아니라 지배층의 수탈이 너무 극심해서라고 적었다. 백성들이 호랑이가 우글대는 깊은 산속에서 사는 것은 세금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라는 말 그대로였다. 이런 수탈 때문에 백성들은 집을 떠나 유랑하고 살았다. 장정들은 모두 부역으로 끌려가 부녀자와 노인들이 밭을 간다고도 적었다.

정약용 선생이 지은 애절양(哀絶陽)에는 백성들이 얼마나 비참하게 살고 있었는지가 적나라하게 묘사돼 있다. 수탈에 견디다 못한 남자가 ‘아이 낳은 것이 죄’라며 ‘낫으로 자신의 생식기를 잘라버리는’ 대목(마도입방혈만석:磨刀入房血滿席)은 백성들이 얼마나 고통 속에서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런 수탈이 계속되다보니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수밖에 없는 백성들이 수많은 민란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강진에는 강진현감 뿐만 아니라 전라지역 육군본부라 할 수 있는 병영성과 해군지역사령부 격인 수군만호가 있어 그 어느 지역보다 수탈이 심했다. 더 이상 이렇게 살수 없다며 남자들이 자신의 남근을 잘라버릴 정도니 탐관오리들의 학정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알 수 있다. 관리들은 자신들의 배만 불리고 나라가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조선은 망했다.

다산은 33세 때인 794년 10월, 정조의 명으로 암행어사가 돼 경기도 북부의 네 고을을 염찰한 적이 있었다. 그가 은밀히 살펴본 네 고을은 연천·적성·마전·삭녕 등이다. 연천은 지금의 연천 땅 그대로이고, 적성은 지금의 파주이다. 마전·삭녕은 지금은 북한 땅이다. 다산 선생이 이 때 적성 땅을 돌아본 뒤 지은 시<奉旨廉察到積城村舍作>는 탐관오리들의 수탈 속에서 백성들이 얼마나 곤궁하게 살았는지를 보여준다.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어 백성들이 들냉일 싹을 캐 먹으로 하지만)

들냉이 싹도 깊이 박혀 땅 녹기를 기다리고

이웃집 술 익어야만 지게미나마 얻어먹지.

지난 봄에 꾸어 먹은 쌀보리가 닷 말이라

이로 인해 금년은 정말 못살겠구나.

아아, 이런 집들이 온 천지에 가득한데

구중궁궐 깊고 깊어 어찌 모두 살펴보랴.

■다산 정약용의 생애와 유배
 

다산생가

다산 정약용은 1762년 (영조38년) 경기도 광주군 초부방 마현리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재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주목사를 지낸 압해 정씨 가문의 정재원(丁載遠, 1730~1792)이며 어머니는 해남 윤씨(海南尹氏, 1728~1770)이다. 이 부부의 5남 3녀 가운데 넷째아들이다.

어머니 해남 윤씨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후손이다. 학자이자 화가로 유명한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손녀였다. 정약용의 형제 중 장형은 이복(異腹)형인 의령 남씨 소생의 정약현(丁若鉉)이다. 정약전의 첫 부인이 처음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인 ‘이벽’의 누이였다. 그의 딸은 황사영과 혼인했다.

어머니 해남 윤씨 소생으로는 둘째형 정약전(丁若銓)과 셋째형 정약종(丁若鍾)이 있다. 그리고 누이가 이승훈(李承薰)과 혼인했다. 이승훈은 조선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인물이다. 정약종은 신유사옥 당시 순교했다. 서모 김씨 소생으로 정약횡(丁若鐄)이 있다. 신유사옥은 정조의 죽자 정순왕후 김씨가 천주교 배척을 명분으로 정적을 제거한 사건이다.

다산은 15세에 풍산 홍씨와 혼인했다. 홍씨는 병마절도사를 역임한 홍화보(洪和輔)의 딸이었다. 다산은 22세에 과거에 합격, 성균관에 들어가는데 이때 정조대왕을 만나게 된다. 정조는 다산의 총명함을 알아차리고 그를 총애한다. 다산은 28세때 규장각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발탁된다. 정조의 총애와 사랑을 받지만 이는 정조에 맞서는 대신들로부터 음해와 핍박을 받는 계기가 됐다.
 

수원화성

다산은 31세에 부친상을 치르는데 이때 정조로부터 수원화성(水原華城) 설계를 명 받았다. 또 33세에 경기지역 암행어사로 활동하면서 탐관오리들을 처벌했다. 1797년 6월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임명됐으나 다산은 상소문을 올리고 이를 사양했다. 이에 정조는 다음 달 다산을 황해도 곡산부사(谷山府使)로 임명했다. 다산을 해치려는 조정대신으로부터 보호하기

1799년 다산이 38세 되던 해 정조는 다산을 형조 참의에 제수했다. 그러나 조정대신들의 공격도 그만큼 거세졌다. 다산은 1800년 봄에 처자식을 거느리고 마현(馬峴) 고향으로 돌아갔다. 다산은 여유당(與猶堂)이란 당호를 짓고 조심스럽게 살았다. 여유당은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로 ‘머뭇머뭇, 겨울시내를 건너듯(與兮 若冬涉川) 조심조심, 사방을 두려워하듯(猶兮 若畏四隣)’이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었다.

그런데 개혁을 꿈꾸던 정조가 갑자기 승하했다. 다산을 보호해주던 방패막이 없어져버리자 다산에게 칼날이 다가왔다. 조정을 장악한 노론 벽파들은 정약용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던 남인들을 처형하기 시작했다. 천주교가 나라를 어지럽히는 사교(邪敎)라며 신유사옥(1801)을 일으켜 천주교 신자가 상당수인 남인들을 죽였다.

신유사옥 때 셋째 형 정약종은 순교했다. 상소문을 통해 천주교와 거리를 두고 있다고 밝혔지만 다산은 여전히 위험인물이었다. 조정대신들은 다산과 둘째 형 정약전을 유배보냈다. 다산의 첫 유배지는 경상북도 장기였다. 그렇지만 다산은 곧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다시 서울로 압송돼 강진으로 다시 유배됐다. 둘째형 약전은 흑산도로 보내졌다.
 

흑산면 흑산도사리 정약전 동상
우이도 진리마을의 송암 정약전 유배지
흑산도 사리항

다산과 약전은 이후 만나지를 못했다. 약전은 흑산도와 우이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 16년 후에 죽었다. 약전은 죽는 날까지 동생 약용을 그리워했다.

■다산의 유배생활과 저술

다산이 강진에 도착해 처음 머문 곳은 강진성 동문 쪽의 주막집이었다. 사람들은 조정대신들의 미움을 받아 귀양 온 정약용을 멀리했다. 주막집 노파가 다산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방한 칸을 내주고 그를 돌봤다. 다산은 자신의 초라한 방을 ‘사의재’(四宜齋)라 불렀다. 사의재는 ‘네 가지 마땅함’ 즉 생각은 맑게, 용모는 단정하게, 말은 과묵하게, 행동은 중후하게 해야 한다는 다짐을 나타낸 것이었다.

다산은 1808년 다산초당(茶山草堂)으로 거처를 옮겼다. 1809년과 1810년 2년에 걸쳐 전라도에 큰 흉년이 들었다. 백성들은 굶주림 속에 고통 받았다. 먹을 것이 없어 배를 곯고 있는데, 관리들은 세금을 내라고 들볶았다. 도저히 살수가 없어 백성들은 집을 떠나 유랑민이 돼 떠돌았다.
 

다산초당천일각

다산선생은 이런 참혹한 장면을 목도했다. 그리고 죽어가는 백성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탐욕스럽게 재물을 긁어모으는 관리·아전들의 탐욕에 분노했다. 선생은 1810년 여름에 ‘파리를 조문하는 글(弔蠅文·조승문)’을 지었다. 조승문의 내용은 파리들을 굶주려 죽은 자들이 변한 것으로 설정해 그들의 원혼을 달래는 것이었다. 백성들에게 고통만 안겨주는 관리들에 대한 원망과 반성을 매섭게 지적하고 있다.
 

목민심서 1권
흠흠신서 2권

다산은 초당에서 4서 6경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방대한 량의 글을 썼다. 1818년 해배되기까지 경세학(經世學) 연구서 대부분을 초당에서 완성했다. 선생의 3대 저서로 일컬어지는 일표이서(一表二書), 즉 <경세유표>(經世遺表),<목민심서>(牧民心書) 등이 초당에서 써졌다. 초당에서 끝내지 못한 <흠흠신서>(欽欽新書)는 고향집에서 마무리됐다.

<경세유표>는 당초 <방례초본>(邦禮艸本)으로 이름 지어졌다가 후에 <경세유표>로 이름이 바뀌었다. 나라를 부강하고 백성을 편안케 할 수 있도록 국법을 개정해야할 제안서 성격이다. 그렇지만 유배 중인 처지라 공식적으로 제안할 수도 없고, 또 조정을 장악하고 있는 노론들이 이를 받아들일 가능성도 전혀 없는 상황이라 자신이 죽은 뒤에라도 반영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남길 유(遺)를 사용해 ‘유표’라 했다.

경세유표가 세상에 알려지더라도 나라를 농단하고 있는 노론이 이 책을 참고해서 나라를 경영할리는 만무였다. 다산 선생은 이런 회의감 때문에 <목민심서>를 쓰기 시작했다. 나라를 바꾸는 것보다 선량한 목민관 한명을 배출시키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목민관의 도리를 깨우치게 하는 <목민심서>를 집필했다. 이 책은 1818년 봄에 완성됐다.

<흠흠신서>는 공정한 재판을 위해 지켜야할 원칙과 마음가짐에 대해 쓴 책이다. 형사사건 처리에 있어서 귀감이 될 만한 내용들을 종합해 서술해 놓았다. 사람의 목숨에 관계되는 일이니 지혜와 정성, 능력을 다해 범죄자를 처리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흠(欽)이라는 글자는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의미의 ‘공경스러울 흠’ 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흠 글자를 두 번 반복해 조사나 재판을 매우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다산 선생은 18년 유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흠흠신서를 마무리했다. 선생은 회갑 때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썼다. 선생은 자신의 삶이 어떤 이유로든 격하되거나 미화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자신의 삶이 그대로 후세에 전해지기를 바랬다. 그래서 자신의 약점이나 실수까지도 빠트리지 않고 적었다.

다산선생은 정조를 도와 쓰러져 가던 조선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의문의 죽음을 당하면서 자신의 뜻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떴다. 다산 정약용 선생도 마찬가지다. 선생은 조선이 낳은 최고의 실학가였다. 그리고 백성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여기는 참지도자였다. 선생은 조정대신들의 무고와 시기 때문에 고통 받다가 한 많은 세상을 등졌다. 1836년 회혼일(回婚日)인 2월 22일(양력 4월 7일)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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