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럭 한 올만 스쳐도 그렇게 아픈가?

터럭 한 올만 스쳐도 그렇게 아픈가?

<형광석 목포과학대학교 교수>
 

왜 마음이 편치 않지? 무엇이 우리를 괴롭히지? 또다시 각자도생의 길로 가야 하나?

보이지 않는 손의 은미한 작용은 감지되지 않고 맞받아치기(tit-for-tat)가 빈번하네, 장차 무엇을 얻겠다는 거야? 우리는 한반도 운전자인거야, 아닌 거야? 내가 탄 버스의 운전석에 사람이 앉은 거야, 아니면 놀랍게도 범용인공지능(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로봇이 앉은 거야? 그 로봇에 들어간 인공지능이 만물을 판단하고 조작하는 범용이라고? 그게 아니고, 바둑만을 잘 두는, 오직 한가지만을 잘하는 특수용 인공지능이야? 범용이든 특수용이든, 그 인공지능의 설계자는 누구야?

그 자동차에 탄 사람의 몇몇은 운전자가 범용인공지능 로봇이기를 바라는 듯한 인상이다. 이미 입력된 대로 대형 버스가 잘 굴러가니, 옛날 조선8도에 딸 여덟을 시집보낸 영감님 내외가 팔도강산을 구경하러 다녔다는 전설의 주인공처럼 얼굴이 훤해 보인다.

혹시 범용인공지능의 설계자가 그 로봇에 컴퓨터 바이러스를 심어놓지는 않았을까? 로봇은 요즘 회자되는 사이버심리전단 요원이 아닐까? 승객은 그들 자신이 외부 제3자의 조작으로 움직이는 바이러스가 붙박이로 장착된 자동차에 탄 줄 모를 거다. 그들이 바이러스의 존재를 눈치 챘다면, 그 제3자는 유능하지 않다는 비난을 받을 거다.

이제는 웃지만, 십 수 년 전에 ‘체르노빌 바이러스’라는 컴퓨터 바이러스가 필자의 컴퓨터를 고철로 만들어버렸다. 멘탈 붕괴 상황이었다. 그동안 공들였던 작업의 성과가 산산이 부서졌기에 며칠 동안 넋이 나갔다. ‘바이러스’하면, ‘체르노빌 바이러스’가 자동으로 생각난다.

각자 몸과 맘에 붙박이(built-in)로 내장되어 자동으로 작동하는 장치는 무엇일까? 사람과 사람의 관계, 조직과 조직의 관계에서 당사자의 이익이 우선이다. 다들 조직의 장래를 걱정한다고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음이 현실이다. 말로는 조직이 잘 되기를 바란다고 하지만, 실제는 자기 한 몸의 이익이 침해받는지가 관건이다. 자기 몸에서 터럭 한 올 뽑히는 아픔이 더 크다. 일부 정치지도자 몇 사람은 2014년 4·16사변인 세월호 참사를 교통사고쯤과 같다고 일갈(?)했다. 그런 생각과 행동을 보이는 사람은 터럭이 뽑히기도 전에 터럭만 살짝 스쳐도 이번에 미국 플로리다 지역을 휩쓸고 간 허리케인 ‘어마’에 못지않게 세포가 반란을 일으킬 거다.

언론 장악이니, 법원 장악이니, 코드 인사이니 등등, 눈과 귀를 어지럽히는 언사가 꿀벌의 집단무용처럼 점임가경(漸入佳境)이다. 지금 그런 언사의 발화자가 걸어온 삶의 궤적인 어제와 ‘오늘 여기 이렇게’ 행태를 보면, 오히려 손바닥 뒤집기가 더 어려운 일이라는 느낌이 든다. ‘아’와 ‘어’는 극히 다르기에, 어제가 북극이라면, 오늘은 남극이다.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 하던가? 그래서 수미일관(首尾一貫)을 기대함은 헛된 희망이겠지? 이래서 세상에는 인격의 요체인 논리적 일관성을 견지하고 실천하는 사람을 만나기 어려운가?

일할 판을 제대로 짜도록 도와주기는커녕 이제는 허니문이 끝났느니 어쨌느니 하면서 투지(?)를 보이는 약 1명을 보면서 ‘옛날은 가고 없다’, ‘개구리는 올챙이 시절을 기억하지 못 한다’는 말이 생각난다. 그때의 어른거림도 없어 보인다. 몸과 맘이 그토록 경직됐을까? 그때 또 다른 약 1명은 ‘노동 유연화’를 입에 달고 살았지 않았던가? 상대방 타자만이 유연화의 채찍질 대상인가? 그들의 몸은 누가 터럭 한 올만 손대도 얼음덩이처럼 차갑게 굳어지는가? 어느 시인은 ‘옛날은 가고 없어도 그때 어른 거려라’고 긴 한숨을 쉬었다.

어느 분이 즐겨 쓰는 말씀처럼 ‘약 1명’이 관건이다. 약은 1명이다. 약(藥)은 1명만으로도 무섭다, 그 약에 바이러스가 들었다면. 독과 약의 경계는 분량이다. 극미량의 독은 치료약이다. 치료약의 과잉은 독으로 작용한다. 여기서 1은 한 일(一)이다. 크나큰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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