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보다 사람도리가 우선이다”

 

 

 

최혁 주필의 전라도 역사이야기
12. 정조가 강진의 살인범 김은애를 살려준 까닭은?

1790년 살인사건이 벌어졌던 강진군 탑동마을. 지금은 우물터만 남아있다. 정조는 정조와 명예를 지키기 위한 살인이었다며 살인범 김은애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법보다 사람도리가 우선이다”
김은애, 누명 씌워 정절 훼손하고 괴롭힌 이웃 노파 살해
정조, 모함 받아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 떠올리며 동병상련
“명예 지키기 위한 일”…무죄석방 후 <은애전> 작성 지시

■1790년 강진현 탑동마을 살인사건
지금으로부터 227년 전인 1790년, 전남 강진현 탑동마을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범인은 김은애라는 18살 된 여인이었다. 살해된 사람은 안씨 성을 가진 노파였다. 김은애는 새댁이었다. 이제 막 시집을 가서 모든 것이 좋기만 할 새댁이 어쩌자고 사람을 죽였을까? 더구나 살해된 노파는 같은 동네에서 살고 있던 사람이었다. 이 참혹한 일의 전말은 대략 이러했을 게다

김은애: 할매요, 어찌 나한테 이리 징하게 구요? 내 오늘 할매와 담판을 지을라요. 애먼 사람을 얼굴도 못 들게 다니게 한 게 몇 년이요? 내가 처녀 때는 남의 남자 손을 탔다고 이방저방 소문을 내 혼삿길을 막더니만, 좋은 사람 만나 겨우 시집가니까 이제는 뒷구멍으로 호박씨 까는 년이라고 없는 말 지어서 나를 이렇게 고단케 하요? 할메가 평생 웬수요.

안노파: 긍께. 니가 내 손자 정련이한테 시집만 갔스믄 이런 일이 있었것냐? 니가 내 말 안 듣고 버팅께 그랬다. 니가 내말 듣고 정련이 색시 돼얏스믄 정련이가 떠억~하니 고모 여깃소, 이 돈으로 좋은 약 사서는 그 몹쓸 피부병 좀 나아부쇼. 고모도 고생이지만 보는 사람도 그것이 사람 살갗 인지 두꺼비 불퉁한 껍질인지 모를 지경이니, 어서 나아부쇼. 이야기가 그리됐을 거 아니냐. 니가 내말 듣지 않아서 내가 이 고생이여, 이 썩을 것아.

김은애: 긍께 그 약 값 구할라고, 그 모진 말들을 하면서 내 혼사 막았소? 거기다 이제는 지아비 있는 여자한테 화냥년 허물 입히고? 어쩐다고 나한테 이리 모지요. 참말도 아닌 거짓말로 그리 나를 모함하니 사람들은 이제 나를 영락없는 화냥년으로 여기니, 이리 억울할 일이 어디 있소?

안노파: 그건 내 알 바 아니다. 사실, 네년이 화냥년이 아니라는 것은 니하고 나하고 하늘이 아는 일이다. 정련이 하고 정분이 나지 않았던 것도, 동네 남정네들에게 꼬리치지 않은 것도 천지신명이 모두 아는 일이다. 내 심사가 꼬인 바람에 내가 그리 말해서 그렇게 소문이 난 것 아니냐? 그렇지만 누가 그것을 알리? 발 없는 말이 강진 온 동네 마을을 열 바퀴는 돌고도 돌았으니 니 년은 이제 어디 장에 가서 고등어 한 마리 사기도 힘들게다.

김은애: 에고에고, 이 할망구 보소. 할망구가 살아있는 한 내 편한 세상 살기 어렵다고 맘먹은 지 오래요. 오늘은 결단 냅시다. 내가 사람 죽인 악녀가 돼 곤장에 맞아 죽을지언정 이 억울함은 풀어야 쓰것소. 내 오늘 할망구랑 같이 죽을라요. 할망구 죽이고 나도 죽을라요. 할망구가 이렇게 나오면 쓸라고, 내가 이 칼을 집에서 가져왔소.

안노파: (시퍼렇게 날선 칼을 보고도 전혀 기가 죽지 않고서 )아이고 아이고, 이 독한 년 보세. 니가 칼 들고 와서 설친다 해서 내가 니 해코지 더 못할 줄 아냐?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니가 대낮에 칼 들고 와서 노인네 겁박했다고 떠들어야 쓰것다. 오매 징한 것.

김은애: (칼을 들고 안노파에게 다가가면서) 할망구 땀시 시집가기 전부터 더럽혀진 몸이라 고 온 천지사방에 소문이 났고 지아비가 있는 지금도 화냥년이라 소문이 났는데 내가 무엇이 두렵것소. 차라리 할망구 죽이고 내 결백을 밝히는 것이 더 낫겠소. 할망구 죽이고 원님한테 가 살인고변할 것이오. 내 억울한 이야기나 토설한 뒤 망나니 칼에 죽을라요.

(칼을 치켜든 뒤 수십 차례 안노파의 몸을 찌른다. 안노파는 현장에서 즉사하고 피투성이가 된 김은애는 정신이 나간 모습으로 안노파 집을 나와 관가로 가서 자수했다.)
온몸에 피가 범벅인 한 아낙네가 “내가 사람을 죽였다”면서 관아 정문을 들어서는 모습에 관아문을 지키고 있던 군교가 혼비백산하며 이를 이방에 알렸다. 

이방이 서둘러 형방을 찾아 같이 가보니 젊디젊은 아낙이 시퍼렇게 날 선 부엌칼을 손에 쥔 채 땅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하고 있었다.
형방이 소리쳤다.
“게 뭐 하느냐. 저 계집 손에 든 칼을 치우고 빨리 포박하여라.”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여인에게 포졸들이 우르르 다가가 칼을 빼앗았다. 여인은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고 그냥 칼을 내주었다. 오라를 받을 때도 순순했다. 형방은 여인을 옥에 가두고 목에 칼을 씌웠다. 그리고 발에는 차꼬를, 손에는 수갑을 채웠다.

그 뒤 노비를 시켜 여인의 얼굴과 목덜미, 손에 묻은 피들을 대충 씻어내도록 했다. 아까만 해도 여인의 모습은 소름이 끼치도록 흉포했다. 산발한 머리는 목과 허리춤까지 흘러내려 마치 귀신처럼 보였다. 사람을 죽인 뒤라 눈동자에는 흰 창이 가득하고 눈빛에는 섬뜩한 기운이 감돌았다. 얼굴과 목덜미, 손등에는 피 덩어리들이 말라붙어 흉물스러웠다.

그러나 대충 머리를 손보게 하고 얼굴에 묻어 있는 피를 씻어내니 고운 아낙네의 모습이 드러났다. 물 몇 모금을 먹게 하니, 여인네도 그때서야 제정신이 드는 듯 눈빛과 목소리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여인은 잠시 목에 채워진 칼과 꽁꽁 묶여진 제 몸을 바라보더니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여인의 울음은 참으로 서러웠다.

살인사건이 났다는 이방의 보고에 현감 박재순(朴載淳)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종 6품직인 강진현감을 잘 마쳐야 종 5품직인 현령이나 혹은 조정으로 올라가 종 4품 벼슬에 오를 수 있을 텐데, 다스리는 강진고을에서 살인사건이 났으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강진읍전경

박재순 현감은 아전들을 대동하고 탑동마을의 살인현장으로 향했다. 조선시대에는 살인사건이 발생하면 지방수령이 직접 이를 조사하도록 돼 있었다. 마을사람들이 살인이 벌어진 집 앞에서 웅성웅성 있더니 현감과 아전, 포졸들이 득달같이 달려오자 어떤 이는 눈치를 보며 저만큼 떨어지고, 또 다른 이들은 슬슬 뒤꽁무니를 빼더니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아전들이 시신에 덮어져 있는 거적을 걷어내니 참혹한 장면이 펼쳐졌다. 목과 가슴, 옆구리, 허벅지 할 것 없이 18군데를 칼에 찔린 노파가 피투성이가 돼 숨져 있었다. 고통에 몸부림친 듯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 깡마른 체구인데다 미간이 짧고 코 역시 매부리를 닮아 성정이 곱지 않은 노파였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살인현장에 도착한 직후 박재순 현감은 성질이 못된 시어머니의 학대를 견디다 못한 며느리가 분을 참지 못해 일을 저지른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동네사람 몇을 불러 변을 당한 노파와 노파를 살해한 여인에 대해 물어보니 그들은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가 아니었다. 그냥 같은 마을 사람이었다. 하지만 노파는 수년 동안 젊은 여자를 괴롭혀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견디다 못한 젊은 여인이 이를 참아내지 못하고 일을 저지르고 말았던 것이다.

■김은애는 왜 살인을 저질렀을까?

곤장을 치는 모습 /독일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 소장

김은애와 안노파는 탑동마을의 이웃이었다. 김은애의 어머니와 안노파는 이웃인데다 나이가 비슷해 왕래가 잦았다. 주로 안노파가 아쉬운 소리를 하는 쪽이었다. 안노파는 기생출신이었다. 선천적으로 성격이 강퍅했다. 게다가 천기의 몸으로 여러 사람을 상대하면서 살아가다 보니 성깔이 더욱 드세졌다.

박재순 현감이 파악한 안노파의 사정은 다음과 같았다.
안노파는 퇴기(退妓)가 돼 혼자 살면서 살림을 꾸려나갔는데 형편이 좋질 않았다. 그런데다가 온몸에 옴(피부병의 일종)을 앓고 있어서 시시때때로 제법 많은 약 값을 치르고 약을 지어야 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피부병은 약이 독한 데다 잘 낫지를 않는다.

안노파의 경우도 옴이 온몸으로 번져 피부를 후벼 파고 싶을 정도로 가렵고 괴로워 큰 고통을 겪고 있었다.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누구 하나 곁에서 보살펴주는 사람이 없어서 매우 힘들었다.

안노파는 돈이 필요했다. 돈이 있으면 약도 사고 먹을 것도 살 텐데, 돈이 없으니 배가 고파도 참아야 했고 몸이 가려워도 진물과 피가 뚝뚝 떨어지도록 손톱으로 긁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안노파에게 손자뻘이 되는 최정련(崔正連)이 김은애를 사모하는 기색이었다. 정련은 안노파 시누이의 손자였다. 안노파는 꾀를 냈다. 정련에게 은애를 엮어주고 약 값을 벌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그렇지만 은애는 정련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안노파는 몸이 달아올라있는 정련을 불렀다. 그리고 내 말대로 하면 은애를 색시로 맞아들일 수 있다고 장담했다. 만약 자기 방법대로 해서 은애가 시집오게 되면 약 값을 단단히 내놓으라고 정련에게 다짐을 받았다.

그런 뒤 안노파는 일을 꾸몄다. 정련에게는 은애와 정을 통했다고 말을 퍼뜨리라고 시켰다. 마침 정련은 은애의 친오빠와 같은 서당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안노파가 시킨대로 정련은 은애오빠에게 “나와 은애는 서로 사랑하는 관계인데 어쩌다보니 통정하게 됐다”고 거짓 고백을 했다.

안노파는 안노파대로 없는 말을 지어서 마을에 퍼뜨렸다. 이런 식이었다. “은애가 정련을 사모해 나에게 중매를 서달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같이 있다가 정련의 할머니에 발각돼 담을 넘어 도망을 갔다”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총각·처녀가 몸을 섞은 것은 조선사회에서는 허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소문이 나면 처녀의 입장에서는 정상적인 집안으로 시집을 가기가 불가능해져버렸다. 남의 남자의 손을 탄, 흠집 생긴 처녀에게 장가를 가겠다고 나서는 총각도 아예 없었다.

은애는 억울하고 또 억울했다. 그래서 안노파를 찾아가 따졌다. 안노파는 은애와 정련이 너희들이 그렇고 그런 관계인데도 왜 딱 잡아떼냐며 오히려 억지를 부렸다. 은애는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이야기는 여자에게 불리할 뿐이었다. 나쁜 소문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평소 은애를 지켜보던 김양준(金養俊)이라는 남자가 소문이 거짓이라는 것을 믿고 은애를 데려와 아내로 삼았다. 은애가 시집을 가버렸으므로 안노파와 정련의 모함은 여기서 그쳤어야 했다. 그런데 그들은 악한 일을 멈추지 않았다.

안노파는 약 값을 받지 못하게 됐기 때문에, 정련은 질투에 눈이 멀어 은애를 추잡한 여자로 몰고 갔다. 정련은 자신과 정을 통한 여자가 뻔뻔스럽게도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며, 노파는 은애가 약속을 저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는 바람에 약을 살 돈을 받지 못해 몸이 더 망가지게 됐다며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온갖 악담을 퍼부었다.

살인사건이 벌어지기 하루 전날에도 안 노파는 마을 사람들 앞에서 “은애가 천하의 못된 것”이라며 “원수나 다름없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 소리를 전해들은 은애는 기가 막혔다. 없는 사실을 사실처럼 만들어 혼삿길을 막았던 것은 억울하지만 지나간 일이니 참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더러운 말로 은애를 모함하는 것은 은애뿐만 아니라 남편과 시댁을 욕보이게 하는 일이었다. 또 장차 태어날 아이들에게도 흠이 될 일이었다. 안노파와 정련은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었다. 은애 집에 잠시 들렸던 탑동마을 아낙네가 어제 안노파가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또 패악질을 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 말을 듣자 지난 2년 동안 참고 참았던 분이 폭발해버렸다. 칼을 들고 안노파 집으로 향했다. 안노파와 정련을 모두 죽일 마음을 먹고 안노파 집을 먼저 찾아갔다. 안노파는 살기를 품은 은애 앞에서도 끝까지 용서를 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악담을 하며 독기를 뿜어냈다. 은애는 그런 노파의 모습에 이성을 잃어버렸다. 칼로 안노파를 찌르고 또 찔렀다.

그리고 나서는 정련의 집으로 향했다. 정련의 집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 은애의 어머니가 울부짖으며 은애를 막아섰다.

“아가, 어쩐다고 이런다냐. 저 할멈은 그리됐다고 쳐도, 정련까지 죽이며 안 된다. 사람은 죽였지만 네 억울한 사정을 털어놓고나 보자. 엄니랑 관아로 가자. 응?”
은애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차라리 이 칼로 내 목을 확 그어버릴까? 그러자니 뒷감당을 해야 할 남편과 어머니가 너무 불쌍했다. 저렇게 통곡하고 있는 어머니 가슴에 또 대못질을 할 수는 없었다. 엎질러진 물이지만 살인을 한 사정이나 원님에게 하소연하고 싶었다. 그래야 한이라도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스스로 관아를 찾아가 살인을 고변한 것이다.

죄인의 주리를 트는 모습

■김은애 살인사건에 대한 정조의 판단

정조어진

강진 현감 박재순은 사건의 자초지종을 조사해 전라도 관찰사 윤행원(尹行元)에게 보냈다. 박재순은 김은애의 행동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여인에게 정절은 곧 생명과 같았다. 그런데 처녀에게 남정네와 정을 통했다는 누명을 씌우고 또 시집 간 여자에게 계속해서 해코지를 해댔으니 원한이 쌓일 만 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살인은 국법으로 엄히 처단해야 할 중범죄였다. 전라관찰사 윤행원은 송부된 보고서가 사실인지, 그리고 살인을 함께 공모한 사람은 없는지를 따지기 위해 아홉 차례나 김은애를 상대로 해 심문을 했다. 그러나 별다른 사실이 밝혀지지 않자 사건을 종결했다.

윤행원의 후임인 전라도 관찰사 윤시동(尹蓍東)은 '김은애가 자신의 정절을 더럽힌 모함과 누명에 견디다 못해 살인을 한 것은 참작의 여지가 있으나 귀중한 생명을 해친 것이기에 국법상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의견을 올렸다.

그러나 정조는 생각이 달랐다. 정조는 일단 신하들의 의견을 물어보기로 했다. 그래서 총애하는 신하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에게 김은애 사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좋겠는지를 따져보라고 시켰다.

채제공 초상(금관조복본)

채제공은 영조 때 사도세자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다.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영조는 나중에 이를 두고두고 후회했다. 그래서 사도세자를 죽이면 안 된다고 목숨을 걸고 버텼던 채제공을 신임하고 중용했다.

정조 역시 채제공을 신뢰했다. 그래서 채제공이라면 현명한 판단을 할 것으로 여기고 사건 처리의 판단을 맡겨본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지만 채제공 역시 최종적인 판단은 김은애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채제공 등 신하들이 다른 의견을 보였지만 정조는 김은애를 사형에 처하지 않았다. 정조는 김은애가 왜 살인을 저질렀는지, 그 이유에 대해 주목했다. 정조는 처녀에게 씌워진 ‘몸을 망친 여자’라는 모함과 누명이 결혼까지 한 이후에도 계속됐다는 사실에 대해 함께 분노했다.

그리고 ‘안노파에 대한 살인’을 김은애가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어쩔 수 없이 저지른 우발적인 살인으로 간주했다. 한편으로는 어떻게든 누명을 벗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 김은애의 행동은 가상하다고 평가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모함을 받아 죽었다는 생각이 깊었다. 국법과 예를 앞세워 세자에 걸맞은 처신을 하지 않는다며 몰아세우고 각종 누명을 씌워 영조의 판단을 흐리게 한 대신들에게 적대감을 갖고 있었다.

정조는 누명을 쓰고 시달림을 받다가 결국 살인까지 저지른 김은애에게 동병상련의 동질감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는 누명을 쓴 채 억울하게 죽었지만 김은애는 자신의 누명을 벗기 위해 용감하게 나선 것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정조는 김은애가 억울함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면 이는 한 여인의 평범한 자살로 끝났을 것이라며 그런 점에서 무슨 일을 저질러서라도 자신의 명예를 지키고자 한 김은애의 용기는 매우 가상하다고 지적했다.

정조는 아마도 아버지 사도세자가 만약 대신들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누명을 벗는데 적극적이었다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정조는 당시 국법의 틀 안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판결을 내린다.

정조는 김은애를 사형에 처하지 않고 특별히 석방하도록 명했다. 그러면서 김은애의 행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칭찬했다. 다음은 정조실록 14년 8월 10일자 기사에 나와 있는 김은애에 대한 정조의 칭찬 내용이다.

“김은애가 대낮에 식칼을 들고 원수의 집으로 달려가 잘못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엄하게 꾸짖은 다음 심성이 더러운 노파를 찔러 죽인 것은 자신이 잘못이 없는 여자라는 사실을 널리 알리는 동시에 원수는 꼭 갚아야 한다는 것을 드러낸 행위였다. 김은애는 평범한 여자였으면서도 살인죄를 범한 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이런저런 변명을 대며 애걸하는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는 남자라도 하기 힘든 일이고 모습이다. 외골수 생각에 빠진 연약한 여자가 그 억울함을 밝히지 못하고 스스로 구렁텅이에서 목매어 죽는 것에 비하면 그 용기가 가상할 뿐이다”

정조는 그 대신 김은애로부터 석방된 뒤 최정련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안노파를 살해한 김은애의 성격상 풀려난 뒤 최정련을 찾아가 다시 사고를 칠(?)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후 정조실록에는 김은애와 관련된 기록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정조의 배려 덕분에 목숨을 건진 김은애가 최정련의 잘못을 용서하고 남편과 평안히 살았기 때문일 게다. 김은애는 비록 살인을 저질렀지만 정조의 헤아림 덕분에 자신의 누명을 벗었다. 정조(正祖)의 명 판결이 한 여인의 생명과 정조(貞操)를 구한 것이다.

■정조, 김은애 사건을 글로 남기게 하다

내각일력

정조는 김은애에게 무죄판결을 내렸을 뿐만 아니라 정조와 명예를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내던진(당시 국법은 살인한 자는 극형에 처했기 때문에) 그녀의 가상한 뜻을 기리기 위해 글을 지어 <내각일력>(內閣日曆)에 싣도록 했다.

정조는 김은애 살인사건의 전말을 자세히 담은 글을 통해 자신이 법보다는 예교(禮敎)를 통해 조선을 통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 했다. 또 겉으로 드러난 사실보다는 그 원인과 사정을 살펴 어떤 일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것이 더 합당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 했다.
즉 아버지 사도세자가 누명을 쓰고 죽은 것인 만큼 그 누명을 벗기기 위한 자신의 노력은 정당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웅변한 것이다. 이런 의도를 가지고 정조는 김은애 살인사건을 자세히 알리고 싶어 했던 것이다.

이런 정조의 뜻을 받들어 김은애 살인사건을 <은애전>으로 만들어 바친 이가 이덕무(李德懋)다. 이덕무는 북학파 학자로서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이다. 이덕무는 <은애전>을 지으면서 김은애 살인사건보다 1년 전인 1789년에 발생한 장흥 신여척 살인사건도 같이 기록했다.

신여척 살인사건은 신여척이라는 사람이 동생을 마구 때리는 김순창이라는 사람을 말리다가 시비가 붙어 김순창을 발로 차 죽게 만든 사건이다. 신여척과 김순창은 같은 마을 사람으로 김순창은 집에 있는 보리가 얼마정도 없어졌다는 아내의 말에 동생을 의심해 절구로 동생 머리를 치며 거의 죽음에 이르도록 했다.

이에 신여척은 동생을 그리 때려서야 되겠느냐며 김순창을 말렸다. 그러나 김순창은 “내가 내 동생을 때리는데 네가 무슨 상관이냐”며 신여척에게 발길질을 했다. 이에 신여척도 발길질을 했는데 그게 김순창의 복부를 제대로 가격했다. 김순창은 꼬꾸라져 그 다음날 숨지고 말았다.

정조는 이 사건에 대해서도 형제의 우애를 다하지 않은 것에 대해 신여척이 꾸짖고 용기 있게 나선 것은 매우 가상하다고 말했다. 비록 신여척이 싸움을 말리다가 사람을 죽인 것은 잘못된 일이지만 비윤리적인 형의 잘못을 나무라다 빚어진 일이니 가혹하게 법으로 징계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여겼다.

정조는 법이라는 것은 ‘인간의 도리를 뒷받침하는 수단’이라는 소신을 지니고 있었다. 인간이 있었기에 법이 생겨난 것이며 법은 처벌보다는 진실을 밝히는 수단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녔다. 정조는 그런 마음으로 조선을 통치했다.

정조는 법보다는 충과 효를 바탕으로 백성들이 올바르게 살아야 풍속이 아름답고 나라가 건강해진다도 믿었다. 법보다는 예가 우위에 있어야 올바른 정치가 이뤄진다고 생각했다. 이런 정조의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에 살인을 저지른 김은애가 무죄판결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강진 영랑생가 인근의 탑동마을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애통해 하던 정조의 명 판결이 스며져 있는 곳이다. 참혹했던 살인사건이었지만 그 사건 속에는 여인의 정조와 명예를 지키려 했던 한 여인의 처절했던 마음과 그 마음을 어여쁘게 여겼던 정조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담겨 있다.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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