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종가의 멋·숨결 느껴보세요”
文의 고장·인재 산실, 뿌리 깊은 종가문화 보전 덕분
오랫동안 전통문화 계승…이웃 위한 나눔 실천도 ‘앞장’
‘충효·의열’, ‘이순신 조력자’ 등 종가마다 스토리도 다양
 

담양 장흥고씨 의열공파 학봉 종가는 선대인 제봉 고경명의 위업을 이어 받아 지역을 대표하는 호국·애국·구국의 종가로 꼽힌다. 사진은 학봉 종가 정자인 상월정의 모습. /전남도 제공

전남은 ‘종가(宗家)의 고장’이다. 전남에 뿌리를 두고 대를 이어온 종가는 70여 곳에 이른다. 이 가운데 10대 이상 대물림해 온 종가가 절반을 웃돈다. 나라에 큰 공을 세우거나 학문과 덕이 높아 종가가 된 불천위(不遷位)도 9곳이다. 가장 오래된 종가는 신안의 한양 조씨 봉사공파로 28대째 내려오고 있다. 종가의 종택(宗宅)도 눈길을 끈다. 200년 넘은 종택이 11곳, 100년 넘은 곳이 7곳이다. 가장 오래된 집은 1583년 지어진 장흥 위씨 판서공파 종택이다.

전남이 문(文)의 고장이자 인재의 산실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종가문화를 보전해왔기 때문이다. 전남의 종가문화는 유교사상의 핵심으로 오랜 시간 유교문화 속에서 살아온 한민족의 문화적 원형을 이루는 근간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종가문화는 개인주의가 팽배한 현대사회 속에서 점차 퇴색되고 있다. 명문가 중에서도 종가문화를 예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종가는 극히 일부에 불과해 자칫 멸실될 가능성도 나온다.

오래 전부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신감과 긍지를 잃지 않고 전통문화 보전을 위해 애써왔건만, 이제껏 관심 밖이었다.

남도일보는 온 가족이 모이는 추석을 맞아 여러 종가 중에서도 굳센 성품과 열망으로 아름다운 전통문화를 보존해온 종가 3곳을 재조명해 지역민 모두의 자랑으로 삼고자 한다.
 

고광순은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후 의병장으로 추대돼 자신이 만든 ‘불원복(不遠復·머지않아 광복이 된다)’ 태극기를 앞세우고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1907년 순절했다. /전남도 제공

■담양 장흥고씨, 의향 호남의 명가=‘의향(義鄕)’ 호남을 말할 때 가장 첫 번째로 내세우는 인물이 바로 제봉 고경명이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도성을 지키기 위해 북상하던 중에 금산전투에서 장렬하게 죽었다. 그에게는 종후, 인후, 준후, 순후, 유후, 용후 등 아들 여섯이 있었는데 장남은 진주성 전투에서, 차남은 아버지와 함께 금산전투에서 순절했다. 또 막내딸은 왜군에게 절개를 굽히지 않고 적의 칼에 엎드려 죽었다.

고경명 신도비에는 “아! 공의 2남 1녀가 모두 난을 만나서 목숨을 잃었으니, 어찌 이렇게도 충효와 의열이 한 집안에 모였단 말인가”라고 적혀 있다.

고인후가 순절하자 어린 아들들은 금산에서 아버지 시신을 모셔와 묘를 전남 담양 창평에 쓰고, 자신들의 생활터전 역시 이곳으로 옮겼다. 장흥고씨 의열공파 학봉 종가가 형성된 것이다.
 

장흥고씨 의열공파 학봉 종가의 부조묘 내부 불천위와 4대조 신위의 모습.

이 집안의 애국정신은 이뿐만이 아니다. 11세손 고광순은 을미사변 이후 단발령이 내려지자, 기우만 등과 연락해 여러 고을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아 본격적인 활동을 벌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후에는 의병장으로 추대돼 자신이 만든 ‘불원복(不遠復·머지않아 광복이 된다)’ 태극기를 앞세우고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1907년 순절했다.

고광순의 의병활동에 대한 일제의 보복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가혹했다. 일제는 종택마저 불질러버렸다.

제봉 고경명의 후손들은 선대의 위업을 국가와 민족이 위태로울 때마다 잘 이어받았다. 이 때문에 그의 집안은 의향 호남의 명가로 꼽힌다.
 

영암 연주현씨 현윤명 종가는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물심양면으로 돕는 조력자로 맹활약했다. 사진은 정자 죽림정의 모습. /전남도 제공

■영암 연주현씨, 이순신 장군 돕는 조력자=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물심양면으로 돕는 조력자로 맹활약한 집안이 있다. 영암 연주현씨 사직공파 현윤명 종가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현건은 당시 이순신 장군과 편지를 주고 받았으며,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기도 했다.

이순신 장군은 현건과 보낸 편지에 자신의 심경을 전하고 있는 등 연주현씨 집안과 오래 전부터 두터운 사이였음을 알 수 있다.
 

죽림정에는 이순신 장군의 친필 편지 7점이 보관돼 있으며, 이 가운데 그 유명한 ‘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의 내용이 담긴 편지도 있다. /전남도 제공

이 집안의 죽림정에는 이순신 장군의 친필 편지 7점이 보관돼 있으며, 이 가운데 그 유명한 ‘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의 내용이 담긴 편지도 있다.

연주현씨는 파조이자 종가조인 현윤명이다. 그는 1450년 천안에서 영암으로 내려와 터를 잡아 그의 후손들이 번성했다.

연주현씨 집안은 후학양성에 앞장서기도 했다.

현건의 손자인 현징은 1660년 사마시에 급제해 감약공 군자주부까지 지냈다. 현징이 벼슬을 버리고 귀향해서 지은 정자가 죽림정이다. 현징은 왕인박사가 수학했다는 문산재 서당을 문수사지 터에 복원해 후학을 양성했다. 후학들은 영암, 나주, 장흥, 해남, 강진에서 찾아왔다. 또 현징은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는 노인들을 초청해 대접하기도 했다.
 

벽감에 모셔진 신위.

근·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도 많다. 호남권 최초의 민족은행인 호남은행 설립을 주도한 현준호씨는 지역 대표 자본가로 꼽힌다. 그의 부친 현기봉씨는 1891년 진사시에 합격해 영암군 향교 장의, 향약소 도약장 등을 지낸 향반이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현준호씨의 손녀이다.
 

해남 해남윤씨 어초은파 어초은 종가는 정치·경제·문학·미술·건축 등 다방면에 뛰어난 업적을 남긴 집안으로 꼽힌다. 사진은 녹우당 항공 사진. /전남도 제공

■해남윤씨, 정치·문화ㆍ미술 등 다방면서 뛰어난 업적 =해남 해남윤씨 어초은파 어초은 종가는 정치·경제·문학·미술·건축 등 다방면에 뛰어난 업적을 남긴 집안으로 꼽힌다.

해남윤씨는 처음 해남과 인접한 강진에 터를 잡고 살다, 윤효정 대에 이르러 해남지역의 유력가문이었던 해남정씨의 사위가 되면서 해남에 정착했다. 호가 어초은이기에 그의 후손들을 ‘어초은파’라고 하고, 연동에서 살았기에 ‘연동파’라고도 한다.

불천위제례 모시는 모습.

해남윤씨 집안의 가장 비중 있는 인물은 단연 고산 윤선도이다. 그는 우리나라 국문학사에 큰 이름을 남겼고, 임금의 병을 고칠 정도로 의학에 조예가 깊어 유의의 대명사로 꼽히고 있다.

또 그는 우리 역사상 최초로 권력의 물줄기를 예송으로 뒤흔들었기 때문에 늘 당쟁의 중심에 서 있었다. 더구나 병자호란으로 임금이 항복하자 보길도에 들어가 부용동을 건설해 한국 정원사에도 족적을 남겼다.

윤선도의 증손자인 윤두서도 이 집안의 자랑스런 인물이다. 윤두서는 호가 공재이고, 한국 사실주의 풍속화의 개척자였다. 그가 남긴 ‘자화상’(국보 제240호)은 사실성을 토대로 지식인의 내면적 갈등을 표현했다. 목기 깎는 장면을 그린 ‘선차도’, 나물 캐는 여인을 그린 ‘채애도’ 등의 풍속화는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특히 우리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실학, 진경산수화, 풍속화 등이 모두 해남윤씨 집에서 그 토대가 형성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녹우당’도 이 집안의 자랑거리다. 녹우당은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고산 윤선도 유적지에 있다. 고산 윤선도의 4대조, 공재 윤두서의 7대조인 어초은 윤효정이 지은 건물이다. 해남 윤씨 어초은공파의 종택이다. 사적 제167호로 지정돼 있다. 녹우당 앞 유물전시관에는 내면의 세계까지 생생히 표현한 윤두서의 자화상(국보 제240호)을 비롯 해남 윤씨 가전 고화첩(보물 481호), 윤선도 종가 문적(보물 제482호), 고려시대 노비문서(보물 483호) 등 많은 문화재와 유물이 전시돼 있다.

한편 전남도와 전남문화재연구소는 지난 6월 남도문예 르네상스 사업의 하나로 전남의 30개 종가의 현황을 연구 조사한 ‘전통과 가통이 계승되는 공간-전남종가’보고서를 발간했다. 이번 보고서 발간은 전남 종가문화의 정신ㆍ문화적 가치를 재조명함으로써 지역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다양한 선양정책 수립 및 사회적 지원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추진됐다.

/안세훈 기자 ash@namdonews.com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