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위 작은병원 ‘병원선’ 동승취재기>

어르신 40여명 사는 ‘둔병도’에 준종합병원 정박
최연소 67세 어르신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선원과 공중보건의 하루종일 함께하는 한가족
드라마 병원선 때문에 관심 증폭 속 실상은 달라
 

전남 섬지역 어르신들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는 전남도 병원선 511호에 동승해 섬 어르신들의 애환과 병원선 선원들의 일상을 들여다봤다. 사진은 지난 14일 전남 여수시 화정면 둔병도 선착장에 정박해 있는 511호를 배경으로 화이팅을 외치고 있는 511호 선원들. /이은창 기자 lec@namdonews.com

바다를 터전으로 자식들을 키워낸 어르신들이 장성한 자녀를 모두 뭍으로 보내고 부부와 함께 또는 홀로 섬을 지키고 있는 곳이 있다. 바로 다도해 전남의 섬지역 어르신들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섬마을 어르신들은 의료혜택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전남 대부분의 섬에 기본적인 의료시설이 없을 뿐 아니라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이 육지의 병원에 가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같은 의료서비스 사각지대에 놓인 섬마을 어르신들을 위해 전남도엔 2척의 ‘병원선’이 존재한다. 섬이 많은 전남엔 국내에서 유일하게 2척의 병원선을 운영중이다. 1년에 최대 4차례 섬마을을 방문해 어르신들의 건강을 살피는 병원선은 섬주민들에겐 그야말로 보배다. 지금도 섬마을 어르신들의 건강을 위해 항해에 나선 바다 위 작은병원 ‘전남 511호’에 동승해 병원선 선원들의 일상과 섬 주민들의 애환을 들어봤다.
 

태풍 탈림의 이동경로가 급작스레 바뀌면서 511호의 목적지가 완도 구도에서 여수 둔병도로 변경됐다.

전남도 병원선 511호 동승취재 전날인 지난 13일 중국으로 향하던 제18호 태풍 탈림이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며 일본 방향으로 급선회했다. 태풍의 이동경로가 갑작스레 바뀌면서 14일 완도군 소안면 ‘구도’ 순회진료가 예정돼 있던 511호의 목적지도 급하게 변경됐다. 태풍의 영향권에서 비교적 벗어난 여수시 화정면 둔병도로 떠나기로 한 것. 이날 이른 아침 둔병도로 떠나는 병원선에 동승하기 위해 511호가 정박해 있는 여수시 신월동 관공선부두를 찾았다.

이곳에서 만난 전남도 병원선 511호 정병덕 선장은 “511호는 다양한 의료장비를 갖춘 준종합병원”이라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정 선장의 말대로 511호엔 X-RAY 촬영장비와 혈액검사기 등 다양한 의료장비가 즐비했다. 병원선 1층엔 내과와 한방과, 치과, 임상병리실, 약 제조실 등이 일렬로 늘어서 작은 종합병원을 방불케했다. 의료인력도 공중보건의 3명과 간호사 등 8명이나 된다. 선장 등 항해인력까지 더하면 총 14명의 선원들이 511호를 꾸려가고 있었다.
 

오전 9시 30분께 관공선부두에서 출발한 병원선이 1시간 가량을 달려 아름다운 섬 둔병도에 도착했다.

오전 9시30분께 정 선장이 조타기를 서서히 돌리기 시작했다. 511호가 부두를 벗어나자 병원선은 13노트 속도로 여수 앞바다를 가르기 시작했다. 여수 시내에서 남서쪽 28㎞ 해상에 위치한 둔병도는 배로 약 1시간 거리다. 정 선장은 “이 항로엔 어선과 여객선이 많다”며 굳은 표정으로 연신 전방을 살폈다. 이날 늦여름 하늘에선 눈부신 햇살이 내리쨌지만 태풍의 영향으로 바다에선 0.5~2m 높이의 파도가 일렁였다.

511호가 백야대교로 육지와 연결된 백야도를 돌아 30여분을 더 나아가자 둔병도가 눈에 들어왔다. 언뜻 봐도 옹기종기 모인 집과 짙은 녹음이 바다와 잘 어우러진 아름다운 섬이었다. 둔병도가 가까워지자 의료진의 손길도 바빠졌다. 정환주 임상병리사는 둔병도 주민들에게 전달할 감기약 등 상비약 두 상자를 챙기고, 이미경 간호사는 주민들의 진료차트가 빼곡히 기록된 노트북을 준비했다.

병원선이 둔병도 선착장에 정박하자 의료진도 장비 등을 갖춰 하나, 둘 내리기 시작했다. 이날 순회진료는 둔병도 마을회관에서 이뤄졌다. 둔병도 김인수 이장은 마을회관 앞으로 나와 의료진을 맞이했다. 뭍에서 온 손님들이 반가운듯 그의 얼굴엔 이내 미소가 번졌다.

김 이장은 “여까지 오느라 고생들허셨소”라며 주민들을 회관으로 불러 모으기 위해 마이크를 들었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김 이장이 “뭍에서 귀한 손님들이 오셨습니다. 어저께 말씀드렸던 병원선 의료진이 지금 마을회관에 오셨으니 한 분도 빠짐 없이 진료받고 가시기 바랍니다”며 병원선 도착 소식을 알렸다.
 

병원선 의료진들의 순회진료를 받기 위해 찾아온 마을 어르신들로 둔병도 마을회관이 가득찼다.

김 이장의 안내방송이 나갈쯤 병원선 의료진은 마을회관을 조그마한 병원으로 탈바꿈시켰다. 어르신들이 평소 담소를 나누던 회관 거실엔 혈압측정기를 갖춘 내과와 치과가 들어서고, 주방 널찍한 공간에는 주민들이 침을 맞을 수 있는 한방과가 들어섰다.

안내방송을 한지 10여분이 지나자 회관병원의 첫손님이 등장했다. 무릎이 성치 않다는 김광풍(87) 할아버지가 다리를 절며 회관을 찾아온 것. 김씨는 우선 혈압을 측정하고 내과와 치과, 한방과 순으로 진료를 받았다. 김씨에 대한 진료가 시작되자 다른 어르신들도 하나, 둘 회관을 찾기 시작했다.

곧 마을회관은 어르신들로 가득차 현관까지 진료를 기다리는 줄이 늘어섰다. 이곳에선 박치현 한의사가 가장 인기였다. 김광풍 할아버지처럼 대부분의 어르신들이 무릎과 어깨 등 관절 부위가 좋지 않아 침 맞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박 한의사는 “어르신들이 육지에 가면 이래저래 할 일이 많아 한의원을 찾기 쉽지 않다. 그래서 이렇게 병원선이 왔을 때 침 맞는 걸 많이 좋아하시는 것 같다”며 수줍게 자신의 인기 이유를 설명했다. 30여 세대의 가구가 터전을 일구고 살아가는 둔병도는 67세 어르신이 최연소다. 최고령인 김금심(99) 할머니는 평소 건강이 좋으셔서 이날 따로 진료를 받지는 않았다.
 

김광풍(87) 할아버지가 갈비뼈에 통증을 느껴 병원선 지하에 마련된 방사선실에서 X-RAY를 찍고 있다.

어르신들에 대한 처방전은 마을회관에서 진료를 마친 의사들이 카카오톡을 통해 실시간으로 병원선에 있는 이숙연 간호사에게 전달했다. 처방전을 전달받은 이씨는 병원선에서 커다란 비닐봉지 두개에 약을 모두 담았다. 어르신들에겐 필수적인 감기약과 관절염약, 무좀약, 안약 등이었다. 약을 전달받은 어르신들은 아이처럼 기뻐했다.

김양자(71) 할머니는 “우리섬에 약국이 있어 뭐가 있어, 여그까지 와서 혈압도 채주고 침도 놔주고 약까지 챙겨주니 얼마나 좋은지 몰러”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회관을 나섰다. 1시간여 동안 진행된 둔병도 순회진료는 정오께 마무리 됐다. 다행히도 이날 진료를 받은 30여명의 어르신 중엔 건강에 심각한 이상이 있는 분은 없었다.

하지만 김광풍 할아버지는 갈비뼈 쪽에 통증을 느껴 병원선에서 X-RAY를 찍기로 했다.병원선에서 김지원 방사선사의 도움으로 X-RAY 촬영을 마친 김 할아버지는 뼈에 별다른 이상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김 할아버지는 “젊었을 적에 농사 짓는다고 하도 지게를 짊어지고 다녔더니 늙어서 이래 고생하고 있다”며 멋쩍어했다.
 

511호 한의사 박치현씨가 둔병도 어르신의 무릎에 침을 놓고 있다.

김 할아버지를 댁으로 배웅한 뒤 511호 식구들은 병원선 1층에 마련된 식당 겸 휴게공간에 모두 모여들었다. 어느새 점심시간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한평 남짓한 조리공간에서 병원선 식구들의 식사를 책임지는 조리사 이이순씨는 병원선의 실세(?)로 불린다. 이씨의 컨디션에 따라 그날 반찬의 급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날 점심메뉴는 돈까스와 미역국, 콩나물무침과 각종 나물이었다. 항해사 김상현씨는 “원래 저희 식대로 책정된 금액이 3천원 정도인데, 오늘은 손님이 오셔서 그런지 7천원 어치는 되보인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이순씨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신경좀 썼어”라고 화답했다.

식사시간엔 자연스레 의료 사각지대에 놓인 섬마을 사정이 화두가 됐다. 박치현 한의사는 “섬마을 진료를 직접 다녀보니, 무면허 의료시술을 받으시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더라”며 “무면허 한의사에게 침을 맞아 피부가 짓무르고 흉이진 어르신들이 한, 둘이 아니다. 의료혜택을 받기 어려워 무면허 시술이 팽배한 것 같다”고 말했다.
 

진료를 마친 511호 병원선 선원과 의료진이 병원선 1층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중인 배우 하지원 주연의 드라마 <병원선>에 대한 얘기도 이어졌다. 511호 선원들은 드라마 때문에 병원선에 대한 주변의 관심이 늘었지만, 드라마와 현실은 많이 다르다고 입을 모았다. 먼저 드라마 병원선에는 외과의사와 수술실이 있지만, 실제 병원선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배우 하지원이 연기하는 ‘송은재’와 같은 여의사도 실제 병원선엔 없다. 병원선에 근무하는 의사들은 군복무를 대체로 한 공중보건의들로 모두 남성들이다. 극중 의사들이 병원선에 배치돼 낙담하거나 좌절하는 모습도 현실과 다르다. 공중보건의들 사이에서 병원선은 가장 선호하는 근무지로 꼽힌다. 1년 이상 이곳에서 근무하면 가산점을 받아 고향과 가까운 지역으로 이동하기가 쉬워지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바다와 섬을 누비는 흔치 않은 경험을 하는 것도 선호 이유로 꼽힌다. 점심 이후 511호는 다시 여수 관공선부두로 뱃머리를 돌렸다.

둔병도 김인수 이장은 “섬주민들을 위해 애쓰는 병원선 식구들에게 항상 고마운 마음 뿐이다. 병원선이 자주 왔으면 하는 바램은 섬사람들 모두 다 똑같을 것이여. 이제 또 다음 만남을 기약해야지”라며 떠나는 511호를 아쉬워했다.
글·사진/이은창 기자 lec@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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