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봉으로 내리쳐 피투성이를…” 시민들 분노

시위대-경찰 안부 물으며 평화 유지하던 광주

공수부대 온 후 ‘잔인한 진압’에 상황 달라져



경찰관들이 바라본 1980년 광주

<상>과격진압에 깨진 평화

<중>높은 시민의식

<하>경찰의 아쉬움

전남지방경찰청이 11일 발표한 5·18 당시 현장 경찰관과 관련자 137명 등을 면담조사해 정리한 보고서에는 공수부대의 잔인한 진압으로 광주의 평화가 깨트려졌다는등의 내용이 담겨있다. 1980년 5·18 당시 광주 전일빌딩 인근 상공을 비행하고 있는 군 헬기 장면. /남도일보 DB
<편집자 주>

전남지방경찰청이 5·18 당시 현장 경찰관과 관련자 137명 등을 면담조사해 정리한 보고서를 11일 발표했다. 전남경찰은 이 보고서를 통해 그동안 신군부에서 꾸준히 주장해온 ‘자위권 차원의 집단발포’, ‘북한군 개입설’, ‘무법천지의 광주치안’ 등 5·18민주화운동의 진실을 흐려온 주장들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5·18 당시 현장에서 근무했던 경찰관들의 증언을 통해 1980년 5월 광주의 치안상황과 광주시민들의 높은 시민정신을 3회에 걸쳐 되돌아본다.



<상>평온한 광주 짓밟은 계엄군

전남경찰이 발표한 ‘5·18민주화운동 과정 전남경찰의 역할 조사결과 보고서’엔 5·18 당시 계엄군이 평화시위를 이끌던 시위대와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는 현장 경찰관들의 생생한 증언이 담겼다.

보고서에 따르면 5·18 이전까지 광주에선 비교적 평화로운 시위가 이어졌다. 시위대가 시위과정에서 고생하는 경찰관들의 봉급을 올려달라는 구호를 외칠 정도였다. 시위가 끝나면 경찰관들 고생한다며 시위대가 즉석에서 돈을 걷어 위문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당시 기동대 소속 한 경찰관은 “당시 시위 양상은 학생들이 정문을 나오려고 하면 우리 경력이 이를 차단하는 수준으로 최루탄이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며, 끝나면 서로 고생했다고 하면서 내일 보자고 인사를 나누고 음료수를 나눠먹었다”고 증언했다.

화순서 한 경찰관도 “5·18이 일어나기 전 광주로 많이 동원을 나갔는데 시위 학생들이 경찰 버스가 오면 박수를 치면서 마중도 했고, 경찰봉급을 올려주라고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계엄령이 내려지고 광주에 1천900여명에 달하는 공수부대원들이 투입되면서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

화순서 중앙파출소 경찰관은 “경찰부대 앞에서 공수부대가 1개 분대 12명 단위로 돌격 작전을 전개했는데 착검한 M16 소총을 등에 가로로 매고, 1미터 가량 되는 목봉으로 시위대를 무차별적으로 가격했다”고 밝혔다. 또다른 경찰관도 “공수부대가 보이는 사람을 가격해 길바닥에 쓰러뜨린 후 군홧발과 목봉으로 실신상태를 만들어 기절시켰다”면서 “기절한 사람의 다리와 머리 부위를 군인 두 명이 잡아서 들어올리는 식으로 트럭에 실었다”고 증언했다.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방식에 저항하는 시민들의 합세로 시위군중이 계속 증가해 5월 21일엔 도청 주변에 20만명의 시민이 운집했다.

광주서부서 한 경찰은 “공수부대가 나온 후 상황이 달라졌다. 방패도 없이 긴 곤봉을 들고 젊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때려서 차에 실어서 서부서로 후송하면, 고개도 못 들고 차에서 내리는 시위대를 또 곤봉으로 내리쳐 피투성이를 만들었다”며 “이러한 공수부대의 잔인한 진압 방식에 시민들이 분노해 거리로 나오고, 차량을 탈취해 돌진하는 등 시위가 점차 과격해졌다”고 밝혔다.
/이은창 기자 lec@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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