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덕도 윤성도 밤 새 노 저어 수백 명 농민군 살리다

 

 

 

최혁 주필의 전라도 역사이야기
14. 수백 명 농민군 목숨 구한 뱃사공 윤성도

덕도 주민들은 조선 관군과 일제군함의 감시를 피해 농민군들을 금당도, 평일도, 약산, 소랑도, 충도 등지의 현 완도 남해안 각지의 섬으로 실어 날랐다. 덕도 주민 덕분에 생명을 건진 농민군들은 훗날 항일투쟁에 나서게 된다.
/소년사공 윤성도(조연희 화백 작품)

장흥 덕도 윤성도 밤 새 노 저어 수백 명 농민군 살리다
일본군, 석대들 전투 후 농민군 바닷가로 밀어붙인 뒤 섬멸
덕도 주민들, 일본군 감시 피해 여러 섬으로 농민군 피신시켜
생존 농민군 상당수 항일투쟁 투신, 덕도 의로움 널리 알려야

1894년 갑오년, 농민들이 일어섰다. 관리들의 수탈이 없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겁에 질린 조선의 관리들은 청국과 일본을 끌어들였다. 일본은 청나라와의 전쟁을 통해 조선땅에서 청을 몰아냈다. 그 다음부터 일본은 차근차근 조선강점을 위한 순서를 밟아나갔다. 경복궁을 점령해 친일정부를 세우고 친일세력을 키웠다.

일본은 자신들에 맞서 일어선 조선농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할 것을 결정했다. 일본에 항거하는 조선민족을 소홀히 처리할 경우 중국이나 다른 나라 민족들의 반일운동이 거세게 일어날 것을 미리 막기 위해서였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조선식민지 작업의 화근이 될 반일세력을 뿌리째 뽑아버릴 것을 일본군에 명령했다.

황토현과 황룡촌에서 승리를 거둔 동학농민군들은 전주성을 점령하고 한양으로 북진할 준비를 갖췄다. 이에 조정은 외세를 끌어들였고 농민군은 예상치 못한 외세의 개입에 조정과 화약(和約)을 맺었다. 그러나 친일파가 장악한 조정은 동학농민군에 대한 탄압에 나섰다. 이에 전봉준을 비롯한 농민군은 2차 봉기에 나서 한양으로 향했다.

그러나 농민군은 우금치 전투에서 패하고 말았다. 전봉준이 지휘하던 농민군 주력부대와 김개남 부대는 모두 괴멸됐다.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한 농민군들은 전남 장흥으로 모였다. 3만 여명의 농민군은 이방언·구교철 대접주의 지휘아래 벽사역·장녕성·강진읍성·강진병영성 전투에서 승리했다. 전투를 마치고 장흥 석대들로 회군한 농민군은 조선관군·일본군 연합부대와 최후의 일전을 치른다.

이방언 전투지휘 상상도
석대들

석대들 전투에서 농민군은 처참하게 패배했다. 기관단총 등 최신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화력 앞에 농민군들은 우수수 쓰러졌다. 더구나 일본군인들은 일본내전에서 전투경험이 풍부한 군인들이었다. 일본군은 농민군을 숨을 곳이 없는 바다 쪽으로 몰아갔다. 장흥에 있는 섬인 덕도에도 5~600명의 농민군이 쫓겨 갔다.

일본군은 함대를 동원해 바닷길을 지켰다. 조선 관군은 섬을 샅샅이 뒤져 농민군들을 색출했다. 그러나 덕도에 피신해 있던 농민군은 일본군이나 조선관군에 단 한명도 붙잡히지 않았다. 덕도의 바다사나이 윤성도가 밤을 이용해 농민군들을 서남해안 곳곳의 섬으로 피신시켰기 때문이다. 목숨을 건진 농민군 후손 중 상당수는 의병이 돼 조선독립을 위해 힘썼다.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전남지역 동학농민군의 역할은 농민군의 주력을 이룬 전북지역 농민군을 후방에서 지원하는 한편 전남지역 관군세력을 억제하는데 있었다. 전남지역 동학도들은 1893년의 보은집회에 대거 참가했다. 그만큼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하는 열망이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봉준이 1894년 3월 1차 봉기하자 전남지역 농민군들은 백산으로 올라가 농민군 대열에 합류한다.

전남지역 동학농민군은 황토현 전투에도 참여해 승리를 거둔다. 전북과 전남의 농민군은 정읍-고창-흥덕-무장-영광-함평-무안을 거쳐 장성으로 향하는데 황룡촌 일대에서 관군과 조우, 전투를 벌인다. 이 전투에서 관군 700명을 격파하고 농민군은 곧바로 전주로 진군, 전주성에 무혈입성하게 된다.

동학군이 전주성에 입성하자 위기를 느낀 조정은 청나라를 끌어들였다. 5월 5일 청나라 군대가 아산만에 도착하자 다음날인 5월 6일에는 일본군이 인천에 상륙했다.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자 농민군은 관군과 전주화약을 맺는다. 외세가 물러갈 수 있도록 전투를 중단한 것이다. 전주화약은 전라도 지역에 동학군이 집강소를 설치하고 정부와 농민이 함께 여러 개혁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한편 조정은 일본 측에 철군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이를 거절한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자 본격적으로 조선을 집어삼키려 했다. 이에 전봉준은 집강소에서 국내외 정세를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노골적으로 조선을 삼키려는 일본의 야욕을 일단 물리쳐야만 했다. 동학군은 전주와 광주에서 다시 기포(起包)했다.

9월 중순 전봉준은 전주에서, 손화중은 광주에서 척왜(斥倭)를 부르짖으면서 일어났다. 이에 호응해 각처에서 동학농민군이 봉기했다. 이후 충청도 지방의 농민군을 포함해 10만 명에 달하는 농민군이 공주로 진격해 갔으나 우금치 고개에서 일본군에 패배하고 만다.

김개남의 동학농민군도 북상 중 청주에서 일본군과 관군과 싸웠으나 패했다. 김개남 농민군은 전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계속되는 조일연합군의 공격에 태인 방면으로 패주하다가 결국 김개남은 붙잡히고 말았다.
 

체포된 동학농민군
체포된 동학농민군
일본군의 동학군 처형

동학농민군은 공주 우금치 전투 이후 계속해서 전투에서 패배한다. 동학농민군은 11월 23일 삼례전투 패전 후 계속 남으로 밀려난다. 조일연합군(朝日聯合軍)은 11월 24~29일까지 전주를 중심으로 인근의 무주, 금구, 태인, 장수, 정읍, 천원(川原) 등을 토벌했는데 이때 충청·전주지역 농민군 상당수와 나주·광주·화순·능주 농민들이 퇴각하던 이방언농민군과 함께 장흥으로 넘어온 것으로 보여진다.

오지영의 <동학사>에는 전주출신 동학도 김동진(金東鎭)이 장흥 석대들 전투에 참가했다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는 증언이 나온다. 이는 이방언의 부대가 전북·충청전투에 참여했다가 후퇴하면서 타 지역 농민군이 이방언을 따라 장흥으로 유입됐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 장흥 일대 전투(남도전투)
장흥에 모인 동학농민군은 1894년 음력 12월 초 관군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모두 승리한다. 12월 4일 벽사역 함락, 5일 장흥부 함락, 7일 강진현 함락, 10일 병영성 함락까지 연승을 거듭한다. 동학농민혁명사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 중의 하나이다. 동학농민군이 4개의 관아를 잇따라 깨부순 소식은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 한 뒤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농민군들에게는 벅찬 희망이었다.
 

장흥 동헌 근경
벽사역에서 바라본 장흥
강진읍성터
강진병영성

자연히 남도 일대의 동학농민군 상당수가 장흥으로 몰려들었다. 농민군은 벽사역과 장흥도호부, 강진현, 병영성을 차례로 함락시킨 이후 나주성으로 진격하기로 계획했었다. 그러나 상황이 좋지를 않았다. 가장 나빴던 것은 전봉준이 체포된 것이다. 또 12월 1일부터 7일 사이 김개남을 비롯해 광주의 최경선 · 손화중, 순천 영호대도소의 김인배 등 핵심 지도자들이 차례로 체포되거나 살해됐다.
 

홍교에서 바라본 병영성

게다가 병영성을 함락시켰지만 대포를 쏠 수 있는 화약을 확보하는데도 실패했다. 병영성을 지키던 감군 김두흡은 화약이 농민군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불을 안고 뛰어 들어가 화약고를 폭파시켰다. 이런 가운데 일본군 제19대대 미나미 쇼시로(南小四郞)가 이끄는 일본군 주력부대가 12월 10일 나주에 도착한 것도 농민군이 나주공격을 포기하게 만든 이유였다.
 

동학농민군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던 이두황

당시 일본군은 전주(11/24)~임실(12/1)~남원(12/3)~순창(12/5)~광주(12/8)를 거쳐 나주에 들어왔다. 일본군과 함께 이규태가 이끄는 좌선봉진과 이진호가 지휘하는 교도중대 등 관군도 함께 나주에 도착했다. 이두황이 이끄는 우선봉진은 임실(12/1)~남원(12/2)~순창(12/5)~곡성(12/7)~구례(12/9)를 경유한 뒤 순천·광양·보성을 거쳐 나주에서 일본군과 합류할 계획이었다.

■ 장흥 석대들 전투
원광대 박맹수 교수는 <장흥지방의 동학농민혁명의 전개>연구논문에서 ‘장흥 동학농민군의 재기병과 석대들 전투’를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1894년 음력 12월)12일 남문 밖과 모정 등에 주둔하고 있던 농민군은 그날 밤과 13일 새벽 통위영병과 일본군으로 이루어진 30명의 토벌군 선발대와 1차 접전을 하여 20여명의 희생자를 내고 퇴각하였던 것이다. 수천 명이나 되는 농민군이 30명의 토벌군 선발대에 밀린 이유는 말할 필요도 없이 토벌군이 소지하고 있던 신식 무기 때문이었다. 토벌군 선발대와 1차 접전을 벌인 농민군은 무기의 열세로 인하여 자울재를 넘어 남면(용산면), 고읍(관산읍) 등지로 퇴각하였다.
 

석대들 전투 상상도(조연희 화백 작품)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내에 설치돼 있는 동학농민군 부조

그러나 토벌군의 신식 무기의 위력에 밀려 퇴각했던 농민군은 13일부터 14일 사이에 다시 재집결하여 수만의 군세를 이루어 장흥부를 재차 포위하였다. 토벌군과의 전면전을 각오한 듯 농민군의 위세는 대단했다. 물론 농민군의 지휘자는 이방언, 이인환을 비롯한 장흥 지방 동학접주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15일 교도중대장 이진호가 이끄는 경군과 일본군의 본대가 장흥에 도착함으로써 전세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농민군은 고읍 방향으로부터 자울재(眠峙)를 넘어 석대(石臺)들을 가득 메우며 장흥부로 진격해 들어왔다. 그리하여 장흥에 도착하여 잠시 휴식 중에 있던 교도중대를 비롯하여 12일에 먼저 도착했던 토벌군 선발대 등과 전면전이 개시되었다.(중략) 고읍·어산 쪽으로부터 넘어온 농민군은 자울재를 넘어 석대들판을 가득 메우며 장흥부 쪽으로 진출해왔다. 압도적인 병력을 믿고 신식무기로 무장한 경군과 일본군에 맞선 것이다.

농민군이 경군 및 일본군의 유인 전술에 속아 산기슭으로부터 들판으로 밀고 내려오자 토벌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진을 벌여 일제사격을 하며 농민군을 공격해왔다. 기껏해야 2~30미터밖에 나가지 않으며 심지에 불을 붙여 발사하는 조총으로 그리고 죽창이나 몽둥이 등으로 무장한 농민군은 수백 명의 희생자를 내고 자울재 너머로 통한의 퇴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식 무기의 위력 앞에 굴복하고 만 것이다

■옥산촌전투
 

옥산마을(1970년대 모습)

일본군과 관군으로 이뤄진 조일연합군은 14일 석대들에서 농민군을 맞아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그러나 농민군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뒤 안심하고 있다가 기습을 당한다. 조일연합군은 15일 오전에 휴식을 취하는 도중 오시(午時: 오전 11~오후 1시)에 기습을 당하자 곧바로 잔당토벌에 나섰다. 조일연합군은 고읍면에 농민군이 모여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16일 곧바로 공격에 나선다.

조일연합군은 자울재~남면을 거쳐 솔치재에서 정황을 파악한 뒤 대내장(竹川場: 죽청이 아니라 현재 죽교(竹橋)라고 부르는 부근)의 하천을 사이에 두고 옥산촌에 진을 치고 있는 농민군과 대치했다. 그 뒤 죽교를 넘어 옥산촌으로 진격해 전투를 벌였다. 이 옥산촌 전투에서 농민군은 대단히 격렬하게 저항했다. 조일연합군은 농민군을 단숨에 격퇴시키지 못하고 밤이 가까울 때까지 전투를 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표영삼 선생이 채록한 ‘관산읍에 사는 손동옥(孫東玉)의 증언’에 따르면 동학군과 일본군은 고읍천(古邑川)을 사이에 두고 3∼4시간 싸우다가 동학군이 패했다. 총소리에 놀란 옥산 주민들은 뒷산으로 피신하여 온 산이 백산이 되었다. 일본군은 이들에게 총격을 퍼부어 많은 주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옥산촌 전투에 참여한 조일연합군은 대략 430명이다. 일본군 250(2중대 150명, 대대본부 소속 100명)여명과 교도중대 180(중대장 인솔 150명, 白木을 수행한 부대 30명)여명이다.

조일연합군과 12월 16일 옥산촌에서 전투를 벌인 주력부대는 고읍접주 김학삼(金學三)과 대흥대접주 이인환(李仁煥)이 지휘하는 부대이다. 김학삼(金學三)은 이방언 장군과는 내종 당숙질 사이이다. 김학삼은 옥산전투에서 패배한 뒤 처가인 방촌에 피신해 있다가 체포돼 12월 26일 장흥 벽사역에서 43세의 나이로 처형당했다
 

김학삼
이인환

■월정전투
 

월정마을
월정마을 전투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위의환 선생

16일 고읍면 옥산촌 전투에서 패배한 농민군들이 사방으로 흩어질 때 대흥면 농민군은 조일연합군의 5리 정도의 추격을 당하면서도 다행히 섬멸되지 않았다. 대흥면 농민군은 장흥동학농민군 중에서도 최강을 자랑하는 부대이다. 이인환 농민군 부대는 대흥면의 안 동네인 월정리(月亭里)에 진을 치고 마지막으로 조일연합군과 전투를 벌였다.

대흥면 월정리의 전투는 조일연합군의 토벌전투가 아니라 농민군이 진을 치고 있다가 당당히 조일연합군과 싸움을 벌인 성격의 전투다. 월정전투에 투입된 조일연합군은 모두 480명 정도다. 이렇게 많은 병력이 장흥의 대흥면과 강진의 대구면 양쪽에서 협공을 하는 바람에 이인환의 부대도 <장흥군향토지>가 전하는 말처럼 기진역갈(氣盡力竭)하여 패배할 수 밖에없었다.

12월 17일 대흥면 월정리에 진을 치고 마지막 항전을 벌였던 농민군의 수는 정확하게 헤아릴 수 없지만 최소 500~600명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근거는 <우선봉일기> 12월 24일조의 남소사랑(南小四郞)의 지휘서신에 ‘덕도(德島)에 적도 5~600 명이 달아나 들어갔다고 한다. 가서 추격하여 토벌이 가능한가?’라는 내용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덕도(德島) 한 곳에만 피신해 있던 농민군이 5~600명이었으니 월정리 전투에 참여했던 농민군의 수는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 대흥면 월정리 전투를 마지막으로 장흥농민군의 조직적인 항전은 막을 내리게 된다.

농민군은 덕도(德島)와 천관산, 천태산 등지로 피신하고 일부는 회진면의 선자도에서 배를 타고 외부로 빠져나간다. 당시의 회진의 포구는 선자도에 있었다. 회령진 만호진의 함선도 선자도에 기지를 두고 정박했다. 선자도에서 배를 타고 외부로 빠져나간 사람 중에는 전 국회의원 김옥두 할아버지 형제가 포함돼 있다.

■일본군의 토끼몰이 학살
 

연륙이 된 현재의 덕도 모습. 장흥군 회진면 신상리와 대리마을은 오래 전에 덕도라는 섬이었다.
덕도 앞바다.

옥산·월정 전투 패배 이후 수많은 농민군이 일본군과 관군의 사살·체포를 피해 덕도로 몸을 피했다. 석대들 전투 이후 천관산과 강진군 대구면·칠량면 등지로 흩어졌던 농민군들은 일본군들이 포위망을 좁혀 오자 덕도 출신의 농민군을 따라 섬으로 들어가게 됐다.

덕도에는 5~600명의 동학군이 피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일본군은 섬으로 피신한 동학군들을 섬멸하기 위해 군함 2척을 서남해안에 파견해둔 상태였다. 수백명의 농민군들이 덕도에 숨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본군들은 관군을 앞장세워 동학군을 몰살시키려 했다.

그러나 일본군과 관군의 덕도 농민군 섬멸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관군은 1894년 음력 12월 25일 덕도에 들어갔으나 단 한명의 동학군도 잡지 못했다. 덕도 주민들이 똘똘 뭉쳐 농민군들을 인근 섬으로 빼돌렸기 때문이다. 그 주인공 중의 한 명이 바로 동학농민혁명 당시 16세 소년이었던 윤성도(尹成道)다.

윤성도는 덕도 주민들과 함께 농민군들을 지금의 완도 일대 각 섬으로 빼돌려 그들의 생명을 구했다. 윤성도는 장흥군 회진면 장산리에 거주하는 윤병추씨의 할아버지다. 윤씨가 할아버지 윤성도로 부터 들은 내용에 따르면 윤성도는 일본군함에 들키지 않게 주로 밤을 이용해 농민군을 피신시켰다.

윤성도는 범선을 이용해 5~600명의 농민군을 금당도와 평일도, 약산, 소랑도, 충도 등 남해안 각지의 섬으로 실어 날랐다. 덕도 주민과 윤성도의 ‘농민군 피신’은 참으로 용감한 행동이었다. 불의에 맞서, 또 동포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의로운 일을 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덕도는 민족혼이 살아 숨 쉬는 역사의 현장이다.

장흥향토사학자 위의환 선생은 <동학농민혁명사료집>을 발간하면서 현 회진면 장산리에 거주하는 윤병추씨(85세)를 통해 그의 할아버지 윤성도(尹成道)에 대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윤병추씨가 어릴 때 할아버지한테 직접 들은 증언을 기초로 해 그의 활동상을 구성해보면 다음과 같다.

윤성도(尹成道)는 갑오년 당시 16세로 농민군에 참여하여 회령진성 무혈입성부터 시작해 장흥·강진 전투에 참여하고, 12월 15일 석대전투의 패전으로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때문에 윤성도는 직접 옥산전투를 치르지 않은 것 같다. 당시 윤성도 집안에는 범선(帆船)이 있었기 때문에 윤성도는 어려서부터 도선(渡船)에 아주 능한 사공이었다고 한다.

옥산전투 패배이후 농민군이 대거 섬으로 몰려들었으나 덕도는 그들을 모두 수용하기에 좁았다. 처음에 동학군이 섬으로 피신해 들어오면 대개 덕산리와 장산리 사이에 있는 현재 할미꽃 동산이 있는 한재공원 옆의 아주 따뜻한 산기슭인 용암산록으로 피신시켜 놓고 갖가지 편의를 제공해주었다고 한다.

덕도 농민군을 따라 너무 많은 농민군이 들어와 수요에도 한계가 있는데다 이러한 정보를 일본군과 관군이 알아차리자 뒤탈이 없도록 섬 주민들이 농민군들을 완도 등지의 각 섬으로 빼돌릴 것을 결정했다. 그리고 관군이 섬에 들어오면 ‘밤에 봉화를 올려 흥양(興陽:고흥)의 민병이 들어와 잡아가게 했다’고 한결같이 둘러댔다.

이두황은 이 말에 속아서 남소사랑(南小四郞)에게 그렇게 보고한 것이다. 윤성도와 덕도주민들은 목숨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농민군들을 먼 섬으로 실어 날라 그들의 목숨을 구했다. 끈끈한 전우애와 생명을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장흥의 대접주 이방언 장군이 체포된 직접 동기는 같은 면에 사는 백아무개 씨의 밀고였다. 심지어 안규상(安圭尙)은 부모를 밀고했다. 관군이 자식들을 죽이겠다는 갖은 협박에 못 이겨 어떤 여인은 밤에 집으로 들어온 남편이 따뜻한 방에서 잠시 잠든 남편을 관에 신고하기도 했다.

동학군 시동생이 집에 나타나자 형수가 큰소리를 질러 동학군이 나타났음을 알리는 사례도 있었다. 그러나 덕도를 비롯한 제도면 안에서는 이러한 밀고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주민들은 동학도가 섬에 들어오면 숨겨주면서 이두황의 말처럼 밥을 나누어 먹고, 옷을 나누어 입었다.

사람을 하늘같이 여기는 인내천(人乃天). 폭압을 제거하고 백성을 살리는 제폭구민(除暴救民). 나라를 보호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사는 보국안민(輔國安民). 외세를 이 땅에서 몰아내는 척양척왜(斥洋斥倭)의 정신이 실천된 곳이 덕도다. 덕도는 그런 장한 마음을 가진 이들이 살면서 농민군의 목숨을 구한 곳이다.

일본군의 축파함(筑派艦)과 조강함(操江艦)이 장흥인근 남해 바다와 섬을 수색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던 것도 ‘덕도의 기적’이 가능했던 이유다. 부산항에서 출항한 두 군함은 경상도와 순천, 광양, 좌수영 등지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둔 이 <주한일본공사관기록> 등에 나타난다. 그러나 동학의 최후 격전지인 장흥인근의 바다에 와서는 성과를 내지 못한다.

이는 장흥 바다는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고 좌수영처럼 섬에 큰 군함이 정박할 수 있는 시설이 없기 때문에 일본군함에서는 쉽게 섬에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위의환 선생은 일본군이 가지고 있던 조선지도에는 장흥 일대 조그만 섬들이 누락돼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의 수색작전이 덕도에서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덕도 주민들은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신상1구에 세워져 있는 독립자금헌성기념탑
일제강점기 시대에도 민족의 얼을 면면히 지켜온 덕도 명덕초등학교

덕도의 16세 소년 윤성도와 덕도 주민들은 갑오항쟁의 또 다른 영웅이다. 남해안 먼 섬으로 도피해 일본의 잔인한 토벌전에서 살아남은 농민군 중 상당수는 훗날 천도교를 중심으로 한 항일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다. 윤성도와 덕도 주민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거대한 항일의 맥이 이어지도록 헌신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기개와 용기를 우리는 덕도에서 느낄 수 있다.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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