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군 길 안내…과격진압 항의하면 욕설”

계엄령 하에서 경찰은 군 보조적 역할 그쳐

5·18 後 순직경찰 예우·기록보존 아쉬움

1980년 5월18일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된 이후 계엄법에 따라 군의 보조적 역할을 수행했던 당시 전남 경찰관들은 광주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계엄군에게 항의를 하거나 제지하기도 했지만, 돌아온건 욕설과 폭행 등 수모였다고 회고했다. 5·18 당시 동구 금남로 거리를 행진하는 광주시민들. /5·18기념재단 제공
경찰관들이 바라본 1980년 광주

<하>경찰의 아쉬움

지난 11일 전남경찰이 발표한 ‘5·18민주화운동 과정 전남경찰의 역할 조사결과 보고서’엔 1980년 5월18일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된 이후 계엄법에 따라 군의 보조적 역할을 수행했던 당시 경찰관들의 증언이 다수 포함됐다. 당시 경찰관들은 광주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계엄군에게 항의를 하거나 제지하기도 했지만, 돌아온건 욕설과 폭행 등 수모였다고 회고했다.

광주서 정보과 한 경찰관은 “5월17일 정보 외근형사들 40여명이 화정동 보안부대로 비상 소집됐는데, 전대 학생회 간부 등 요주의 인물들을 검거하러 가는 보안사 요원들의 길안내를 했다”고 증언했다.

또 다른 경찰관은 “금남로 일대에서 계엄군이 연행한 학생 4~5명을 경찰에 인계했는데, 이들을 훈방했다는 이유로 공수부대 대위가 전남도경찰국 작전과장의 조인트를 깠다”고 밝혔다. 당시 기동대원도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을 보고 당시 광주서 경비과장이 이를 제지하자 공수부대가 군화발로 두어차례 차기도 했다”고 말했다.

보고서를 통해 전남경찰은 ‘당시 일부 경찰은 계엄군을 제지하다 봉변을 당하기도 했지만, 시민보호의 무한책임이 있는 경찰이 보다 적극적으로 계엄당국과 군 책임자들에게 문제점을 지적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조치가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며 당시 경찰 대응에 아쉬움을 드러냈다.

5·18 이후 사후조치 과정에서도 경찰은 사망·부상 경찰관 지원·보상, 5·18 관련 기록보존 등에도 미흡한 점을 여럿 노출했다. 2005년 경찰에서 파악한 5·18 당시 순직·공상경찰관은 사망 4명·부상 9명에 불과했으나, 다른 기록에는 144명이 부상한 것으로 나타나는 등 피해 경찰관의 통계 조차 제대로 집계되지 않았다.

5·18 관련 기록도 국보위 조사에 대비해 경찰에 불리하거나, 민감한 사안들은 모두 삭제되거나 폐기됐다. 특히, 5·18상황일지 등 중요자료들이 2007년 광주청 개청과 2011년 전남청사 이전 당시 분실되거나 임의 폐기처분되는 등 관리가 부실하게 이뤄진 것으로 드러났다.

전남경찰은 “이번 조사과정에서 확보된 객관적인 증언과 수집된 자료, 보고서는 국가기관인 경찰이 주요 당사자 입장에서 스스로 작성한 5·18보고서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며 “역사적으로 5·18과 관련된 진실을 알리는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 확신하며, 계속적으로 자료를 찾아내고 증언 등을 확보해 미흡한 점을 보완해 나갈것”이라고 밝혔다.
/이은창 기자 lec@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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