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의 삶과 ‘미암일기’

허준의 삶과 ‘미암일기’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세계기록유산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許浚)의 삶은 미스터리이다. 그가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모친이 누구인지, 스승은 유의태가 맞는지, 의과에 합격했는지, 어떻게 내의원에 들어갔는지 제대로 알 수가 없다.

지금까지 우리는 소설과 드라마에 의거하여 허준을 알았다. 드라마 작가 겸 소설가인 이은성(1937∼1988)이 지은 <소설 동의보감>과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1999년에 방영된 MBC TV드라마 ‘허준’과 2013년에 재방영된 ‘구암 허준’ 이야기를 사실로 믿었다.

그래서 허준은 천첩의 아들로 태어나 유의태에게 공부를 배웠고, 의과에 합격하여 내의원에 들어가서 선조의 어의가 되었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러나 창작에 의존하는 소설과 사실(fact)에 입각한 역사는 엄연히 다르다. 지금까지 허준은 <양천허씨세보>에 의거 1546년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에 진주박물관에서 <계회도>가 발견되어 1539년생으로 판명났다.

허준의 생모도 마찬가지이다. 허준의 생모는 <양천허씨세보>에 의거 손씨로 알려져 왔다. 심지어 <소설 동의보감>에서는 천첩 손씨였다. 그런데 허준은 제법 권세 있는 양반가문의 서자였다. 부친 허론은 용천부사로 무관을 지냈고, 모친 김씨는 허론의 첩이었지만, 무관인 영광김씨 김욱짐의 서녀였다.

이 사실은 미암 유희춘(1513∼1577)이 쓴 <미암일기(보물 제260호)>에서 밝혀졌다. <미암일기>는 1547년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19년간이나 함경도 종성과 충청도 은진에서 유배살이를 한 유희춘이 홍문관 교리로 복직한 1567년(선조 즉위년) 10월 1일부터 별세하기 이틀 전인 1577년 5월 13일까지 11년에 걸쳐 거의 매일 기록한 일기이다.

유희춘은 1571년 전라감사 시절에 무관 김시흡을 군관으로 두었다. 김시흡은 광주에 살았고 종8품직인 훈련원 봉사를 역임했는데, 유희춘은 <미암일기>에 김시흡를 언급하면서 ‘김유성의 손(孫)이며 허준의 적삼촌(嫡三寸) 숙부’라고 각주를 달아놓았던 것이다.

아울러 허준이 의과(의관을 선발하기 위한 과거시험)에 급제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또한 허구이다. 허준은 유희춘의 추천에 의해 내의원에 특채되었다. 1569년(선조 2년) 윤6월3일자 <미암일기>에는 “허준을 위하여 이조판서(당시 이조판서는 홍담)에게 편지를 보냈다. 내의원으로 천거해준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1569년 6월 23일에 유희춘의 부인이자 여류문인인 송덕봉(1521∼1578)이 입안이 통통 부어오르고 목구멍이 아파오는 설종(舌腫)이 생겼다. 그리하여 미암은 ‘여의(女醫) 사랑비’를 불렀는데, 이 때 허준도 미암의 부름을 받고 와서 송덕봉의 설종 병을 논의하고 돌아갔다.

6월 29일자 <미암일기>에는 “내가 어제부터 얼굴의 좌측에 종기가 생겨 허준의 말을 듣고 지렁이의 즙을 발랐다”라고 유희춘의 병치레가 적혀 있다. 또한 허준이 내의원에 추천된 이후인 1569년 7월 2일의 <미암일기>에도 “허준이 와서 인사를 하기에 면앙 송순(1493∼1582)의 병을 가보게 했다”란 기록이 있다. 이렇듯 허준은 유희춘 집안의 주치의나 다름없었다.

한편 허준의 출생지도 논란중이다. 경기도 파주설, 서울 가양동 설, 전라남도 설 등 확실하지가 않다. 성장지도 전남 담양이나 해남 일대일 것이라는 설도 있다. <소설 동의보감>에 나오는 허준의 스승 유의태도 숙종 때의 의사 유이태를 오해한 것으로 생각되고, 당시 어의였던 양예수가 스승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역사는 소설과 다르다. 소설은 역사적 사실보다는 독자에게 즐거움을 주려는 반면에, 역사는 객관적 사실을 파헤치는 작업이다. <미암일기>는 1592년 임진왜란 이후 국가의 사료가 많이 소실되자 선조실록 편찬 자료로 채택되었다. 마찬가지로 <미암일기>를 통하여 허준(1539∼1615)의 삶이 새롭게 밝혀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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