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안에 나 있다

목요마당- 네 안에 나 있다

<나선희스피치커뮤니케이션즈 대표>
 

그놈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금쪽 같은 내 딸아이의 마음을 뺏어간 괘씸한 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림 반 푼어치도 없던 녀석인데 슬슬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말이다. 내 딸이 그놈에게 시간을 투자하는 게 싫었다. 내게도 좀처럼 할애하지 않는 시간, 취업준비생의 소중한 시간을 갉아먹는 놈이 고울 리 없지 않은가? 공부할 때도, 걷는 중에도, 잠들기 전에도, 아침에 눈을 뜨면서도 딸아이는 그 놈과 함께였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놈을 음미하는 딸에게서 그놈을 떼어놓기로 했다. 작전개시!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 이깟 일에 손자병법까지 적용해가며 적군을 탐색했다.

아,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알고 보니, 그 놈의 직업은 가수. 딸아이는 왕팬. 놈의 실체가 연인이 아니라 좋아하는 가수에 불과하다니 경계의 수위를 낮추고는 슬쩍 들여다보기로 한다. 음악이 청승맞다. ‘무슨 이런 우중충한 노래를 좋아한담?’ 딸아이의 취향이 못마땅하다. 밝고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이것이 부모의 마음이지 않겠는가. 그다지 밝지도 건강해보이지도 않은 우울한 뮤지션. 이것이 그 놈에 대한 나의 첫 느낌이었다. 그런 녀석이었는데 자꾸 노래를 듣다보니 좋아진 거다. 녀석은 어두운 성장기의 상처를 안은 채 담담하게 노래한다. 스토리텔러(storyteller), 아니 스토리싱어(storysinger)(?)다. 그렇고 그런 뮤지션이 아닌 거다. 그의 음악은 우울한 희망이다. 묘하게 마음이 쓰인다. 안쓰럽다. 가서 안아주고 싶다. 그러다가 나는 안아주는 대신 녀석의 음악을 즐겨 듣고 있다. 내 평생 처음으로 돈까지 내고 디지털 음원서비스를 받게 한 무서운 놈. 그러고는 알았다. 측은지심을 자극하는 스토리에 무너지고 마는 호감 포인트. 딸아이도 나랑 같은 거다. 엄마 딸 아니랄까봐.

아나운서로 종횡무진 활동하던 때, 유독 힘겨웠던 프로그램이 어린이 프로그램이었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전교생을 대상으로 한 공개방송이었다. 댄스 팀과 오락 팀까지 동원되었으므로 진행자는 한껏 분위기를 고조시켜야 했다. 나름 노래를 좋아하고 끼와 흥을 아는 사람이라 자처하던 나였다. 그런데도 목소리 톤을 높여 즐겁게 진행할라치면 음 이탈을 했고 입가에는 경련이 일었다. 억지로 즐거운 진행이었다. 몹시 수고스러운 녹화를 마치고 나면 녹초가 되었다. 남들이 어렵다는 토론이나 전문가 인터뷰도 거뜬히 해냈던 나다. 어린 학생들이 뭐가 이리 힘들까, 자괴감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담당 프로듀서 선배로부터 답을 얻을 수 있었다.

“나아나운서는 선생님 같아. 근엄한 선생님 말이야. 우린 선생님이 필요한 게 아니야. 그냥 아이들하고 신나게 놀아주는 진행자가 필요한 거라고.”

그 날 나는 내 안에서 근엄하신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아버지는 집에서도 선생님이셨다. 매사에 일일이 근엄하게 훈육하셨다.

“선희야, 방금 한 말 다시 해 보거라. 너는 그 말이 어법에 맞다 생각하는 거냐?”

아버지의 선생님 기질은 나를 반듯하게 성장시켰다. 그리고 나는 그 반듯한 틀 안에 끼와 흥을 가두고 말았던 거다.

“애가 말이 거칠어요. 말 좀 예쁘게 하도록 잘 좀 지도해주세요. 사람들 앞에 데리고 나가면 무슨 말을 뱉을 지 겁이 난다니까요?” 엄마가 자녀의 손을 잡고 나를 찾아왔다. 아이가 바로 쏘아붙인다.

“내가 뭘? 엄마나 잘해.” 당황한 엄마가 아이의 입을 틀어막는다. “얘가 선생님 앞에서 버릇없이! 입 다물어라 응?”

한동안 모녀간의 민망한 설전이 계속되었다. 신기하게도 모녀의 말투가 똑같다. 일단 죄다 부정적인 말이다. 이 쯤 되면 집에서의 상황은 불을 보듯 뻔하다. 훨씬 험한 말이 오갈 것이다. 나는 하마터면 아이보다 어머니가 먼저 교육받으셔야 할 것이라고 말할 뻔했다. 아이의 말투에서 어머니를 보았으니 말이다.

흉흉한 엽기 범죄가 끊이질 않는 시대, 인성교육과 더불어 부모교육이 요구되고 있다. 내 아이가 파랗다면 내가 파랗다. 내 아이가 노랗다면 내가 노란 것이다. 그러니 자녀의 색깔이 마땅치 않다면 내 색깔부터 단속할 일이다. 부모의 말과 행동은 가장 강력한 유전자다. 자녀를 빨갛게 키우고 싶다면 빨간 말과 행동으로, 길들이지 말고 물들이면 된다. 네 안에 내가 스며들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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