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5일을 기억해야할 이유

10월 25일을 기억해야할 이유

<김갑제 광복회 광주전남지부장>
 

1905년 11월 9일. 일본 천왕의 전권대사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서울에 도착했다. 목적은 단 하나. 조선을 삼키는 일이었다. 이토는 곧바로 고종황제에게 알현을 청한다. 그리고 당일 만난자리에서 조선보호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충격인 것은 한나라의 주권자이며 주인인 고종이 거부의사는 커녕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한 채 이토의 요구를 수락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일은 이후 이토가 조선병합의 당위성을 공공연하게 얘기를 하는데도 대한제국의 대신들 중에서는 단 한 사람도 거부의사를 보인 인물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성계가 개국한지 519년이나 된 나라 조선. 그 후신인 대한제국이라는 나라가 국권을 빼앗기는 절체 절명의 위기 상황인데도 단호하게 거부의사를 표명한 대신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것은 1905년 11월 17일. 을사5조약은 한나라의 주권을 일본이 행사하고 반신민지가 되는 조약이었건만 나라의 주인이었던 고종도 대한제국을 유지 운영하는 정부책임자들도 반대한다는 소리 한번 제대로 못한 채 국권을 넘겨주고 말았다.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해달라는 요구조건으로 조약에 서명을 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은 완전히 멸망하고 만다. 왕을 비롯한 책임 있는 정부 당국자 중 한규설 등 3인을 제외한 대신 모두가 자신들의 안위를 보장해준다는 말에 나라를 포기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민초들은 달랐다. 남녀노소 반상 구분 없이 거의 모든 백성이 직접 의병에 투신했거나 적극적으로 나서는 등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려 벌떼처럼 일어났다. 특히 한말 호남의병은 1907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1910년까지 전국 항일의병전쟁을 주도했다. 1909년의 경우만 2만3천155명의 호남의병이 820여회에 걸쳐 일군과 전투를 벌임으로써 전국 의병전쟁의 60%를 차지했다. 그야말로 결사항전이었다.

이 시기에 호남의병을 선도했던 인물은 최익현 임병찬 기우만 기삼연 고광순 양회일 백락구 김준(김태원) 김율 이석용 김동신 심남일 전해산 안규홍 박사화 조정인 김영백 황병학 양춘영 신보현 정일국 강무경 이성화 이규홍 유장렬 황준성 양진여 양상기 김원국 김원범 황두일 박도경 김공삼 조경환 오성술 이기손 노인선 신정우 강형오 등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결국 호남의병을 두고서는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일제는 1909년 9월부터 10월 25일까지 대규모 호남의병학살 작전인 소위 남한 폭도 대토벌 작전을 전개하기로 결정한다. 이때 일제는 전라도 백성들이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 시 일본군대의 위력을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들을 과소평가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에다 전라도 백성들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격퇴한 사실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서 일본군대의 힘과 저력을 좀처럼 인정 하지 않는다’고 자신들로서는 매우 아픈 역사적 사실까지 꺼내들며 토벌작전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정치 경제적 침략과 수백 년 전의 복수심까지 결합된 셈이다.

호남의병 대학살 작전은 전무후무한 대규모 군사작전이었다. 이미 주둔중인 군대와 경찰을 제외하고도 근대식 무기로 중무장한 2개 연대 약 2천300여 명을 증파하였으며, 도서지방 의병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해군 11정대와 증기선 소형 발동선 및 경비선 수십 척까지 동원하여 무자비한 군사작전을 펼쳤다. 호남의 모든 동네를 참빗으로 머릿니 잡듯이 뒤졌는데, 매천 황현은 당시 그 잔혹한 광경을 이렇게 기술했다. “일병들이 길을 나누어 호남의병을 수색하였다. 그들은 그물 치듯 사방을 포위하였으며, 촌락마다 샅샅이 수색하고 집집마다 조사하여 조금이라도 의심이 나면 즉시 죽였다. …의병들은 흩어져 달아났으나 숨을 곳이 없어 용감한 자는 돌격하여 싸우다 죽고 혹은 도망치다 칼에 맞아 죽었다. 차차 쫓기어 강진 해남 땅에 몰리어 죽은 자가 수천 명에 달하였다.”

이 무자비한 학살 작전으로 심남일 안규홍 전해산 오성술 의병장 등 호남의병 지도자들 대부분이 체포돼 사형으로 순국했다. 또한 호남의병 500여 명이 전사하였으며, 체포된 의병 숫자만도 3천 명이 넘었다. 그 가운데 단순 가담자 600여 명을 선발하여 하동 해남간국도 2호선 건설에 투입하였는데 도망하는 자는 가차 없이 그 자리에서 총살했다.

그 끔찍한 학살 작전은 1909년 10월 25일에야 끝이 난다. 우리 모두가 10월 25일을 기억해야할 이유다. 끝까지 치열한 전쟁을 벌이다 산화했던 한말 호남의병들. 그러나 아직까지 기념관 하나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참으로 부끄럽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 광복회 광주전남지부는 8년 전 전국에서 최초로 ‘어등산 의병의 날’을 제정한 광주시 광산구와 광산문화원, 광산구 박산마을 자치위원회 등 뜻있는 단체 및 인사들과 힘을 모아 ‘한말 호남의병기념사업회’를 발족한 후 해마다 호남의병의 최대 격전지 어등산 박산마을에서 호남의병학살 작전이 마무리된 날인 10월 25일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올해에도 25일 오전 추모제와 어등산 의병의 날 기념식에 이어 오후 7시에는 광주학생교육문화회관에서 유명 음악가 4인을 초청, 음악회를 갖는다. ‘독립군가’로 시작하여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마무리 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 모두가 찬란했던 ‘한말 호남의병정신을 국민정신’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행보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이날을 기억하며 따뜻한 격려를 아끼지 말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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