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 해안과 들판 지켜낸 護國의 城

 

 

 

최혁 주필의 전라도 역사이야기
15. 남도의 보물 강진 병영성

병영성모습. 뒤쪽이 수인산이다. 병영은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동에 있었으나 1417년 강진으로 옮겨졌다. 초대 병마도절사 마천목 장군이 성을 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을묘왜변과 동학농민혁명때 두 번 함락됐다. 1895년 폐성됐다./위직량 기자 jrwie@hanmail.net

남도의 해안과 들판 지켜낸 護國의 城
군사기지 성으로는 국내 최대…20년째 복원공사 아쉬움 커
忠과 義 정신 가득했던 곳, 일제 조선 혼 말살하려 허물어

남도를 처음 찾아온 어느 누군가가 필자에게 “어디를 가면 좋겠느냐”고 묻는다면 기자는 “무조건 강진 병영을 가장 먼저 가 봐야한다”고 말하고 싶다. 이 대답에 아마도 그는 갸웃할지 모른다. 그러면서 되물을 것이다.

“병영에는 뭐가 있는데요?”

기자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꾹 참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그 사람이 병영에 들릴 확률은 절반으로 떨어지고 말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대부분의 사람들은 역사를 진부하고 재미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대신, 이렇게 말하고 싶다.

“병영에는 성(城)이 있습니다. 아주 대단한 성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넓은 성입니다. 성 밖에는 가슴이 떨릴 정도로 아름다운 홍교가 있답니다. 물론 달콤한 러브스토리가 담겨져 있죠. 병영성에 붙잡혀 있던 하멜과 관련된 기념관도 있구요. 만약 고풍스런 옛 담장을 끼고 산책하기를 원하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죠. 덕수궁 돌담길은 저리 가라할 정도입니다(특히 서울사람들에게는 비교개념을 제시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기자는 강진 병영(성)을 ‘남도의 보물’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디든 그러지 않은 곳이 없겠지만 병영의 산하에는 우리 땅의 모든 역사가 응축돼 있다. 병영성에서 우리는 아득한 옛날, 왜구에 시달리던 남도 땅 사람들의 고통을 볼 수 있다. 또 유린당하던 이 땅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던 선인들의 희생을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어디 그뿐이랴. 개성상인들과 함께 조선 상권을 좌우하던 병영상인들이 태동된 곳이기도 하다. 하멜일행으로 대변되는 서구문명과 조선이 처음으로 조우해 실학의 씨앗이 심어진 현장이다. 관리들의 수탈과 일제의 침략에 맞서 농민들이 목숨을 걸고 항쟁하던 격동의 세월이 훑고 지나간 곳이기도 하다.

■병영(兵營)
전남 강진은 ‘남도답사1번지’의 고장이다. 남도의 멋과 맛이 가득하다. 또한 풍류와 예술이 넘쳐나는 곳이다. 다산의 정신이 깊게 서린 곳이기도 하다. 동시에 비색 청자의 요람이다. 멋과 맛을 찾아 사람들은 강진을 찾는다. 대개가 강진읍과 다산초당, 백련사, 무위사, 청자박물관, 가우도, 마량 항 주변을 맴돌다가 강진을 떠난다.

병영은 강진관광의 코스에서 다소 비켜나 있다. 서울이나 광주에서 오는 관광객들은 대부분 강진읍을 첫 번째 방문목적지로 정한다. 병영으로 가려면 영암이나 성전에서 미리 빠져나가야 한다. 강진읍과 멀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널리 알려진 영랑생가나 다산초당을 가기위해 주저 없이 병영 가는 길목을 지나친다.

일부 관광객들은 병영 S식당의 ‘연탄구이 돼지고기’를 맛보기 위해 병영에 일부러 들린다. ‘내공이 쌓인’ 분들이다. 강진을 몇 차례 둘러본 사람들이랄 수 있다. 강진을 찾아와 일부러 병영을 찾은 분들은 대단한 미식가 아니면 역사탐방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병영이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강진의 주요 관광코스와 다소 동떨어져 있다는 것이 유일한 이유다.

병영은 백제시대에는 도무군, 통일신라시대에는 양무군, 고려시대에는 도강군, 조선시대에는 도강현의 중심치소(治所:고을을 다스리던 기관이 있던 장소)가 있던 곳이다. 자그마했던 병영이 전라도의 중심지역 중의 하나가 된 것은 1417년(태종 17년)에 전라병영성이 들어서면서부터다. 전라병영성은 호남과 제주도 53주 6진을 통할한 육군의 총 지휘본부였다.

■병영성의 역사와 의미

복원된 병영성 옹성

<병영성의 역사>

1872년 강진현 지방도 중 병영성

병영은 원래 지금의 광주광역시에 자리하고 있었다. 병영은 광산 현 일대(현재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동 고내상)에 설치돼 있었으나 1417년 도강 현(강진군의 전신)으로 옮겨졌다. 조선이 태종 때 광산 현에 설치한 병영을 불과 몇 년 뒤에 도강 현으로 옮긴 것은 왜구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서였다.

<강진군지>와 <조선환여승람>에 따르면 초대 병마도절제사 마천목(馬天牧)장군이 부임 후 성을 쌓았다. 병영성은 맨 처음에는 둘레 561보의 규모로 세워졌으나(세종실록지리지) 이후의 기록들에서는 2천820척(尺)으로 나와 있다. 따라서 병영성의 둘레는 900여m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병영은 1599년(선조 32)에 장흥(長興)으로 옮겨졌으나 1604년 다시 도강현으로 원위치 됐다. 이는 장흥 백성들이 병영 군사들을 대접하고 뒤치다꺼리를 하는데 너무 힘이 든다며 장흥유생들이 수차례 상소를 올렸기 때문이다. 병영이 옮겨가면서 세가 확 줄어버린 것을 안타까워한 병영사람들이 병영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랐기 때문으로 전해진다.

병영성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동안에는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을묘왜변을 겪으면서 나름대로 대비를 잘 했기 때문이다. 병영성은 보수과정을 거치면서 조금씩 넓어진 것으로 보인다. 병영성의 배후산성은 수인산성(修仁山城)이다. 수인산은 해발 561m의 산으로 가파르면서 접근하기가 어려워 천혜의 요새지다.

<을묘왜변과 병영성>

1555년(명종 10)년 5월 11일 70여척의 배를 타고 온 왜구 6천여 명이 해남의 달량진(達梁津:지금의 북평면 남창)과 이진포(梨津浦:북평면 이진)에 상륙했다. 을묘왜변(乙卯倭變)이다. 왜구들은 대마도를 근거지로 해 조선 남해안 일대를 수시로 쳐들어와 약탈을 해가던 해적들이었다. 해남 땅에 상륙한 왜구들은 분탕질을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죽였다.

젊은 남자들은 노예로 삼기위해 끌고 갔다. 젊은 여자들은 욕을 보인 뒤 배로 데려가 노리개로 삼았다. 그런 다음 민가에 불을 질러버렸다. 왜구들이 상륙해 백성들을 무차별로 죽이고 노략질을 하고 있다는 가리포 첨사 이세린(李世麟)의 보고를 받고 전라병사 원적(元績)이 강진 병영성의 군사를 이끌고 달량진성으로 급히 출동했다.

장흥부사 한온(韓蘊)과 영암군수 이덕견(李德堅)도 수하의 군사들과 함께 달량진성으로 향했다. 왜구들은 달량진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시작했다. 이때 달량진성을 지키던 조선군사의 수가 몇 명이나 됐는지는 분명치 않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조선 전기에 병영성의 정군(正軍)이 498명, 수성군(守城軍)이 51명이다.

이 기록을 참조해볼 때 달량진성에 급파된 병영성 군사의 수는 최대 500여명이다. 그러나 병영성 수비를 위해 병력을 조금 남겼을 것을 감안하면 300~400여명의 군사가 달량진성 수비를 위해 동원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장흥과 영암에서 출동한 군사수를 100여명으로 보았을 때 모두 500여명 정도가 왜구들에 맞서 싸운 것으로 보인다.

왜구들은 달량진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시작했다. 조선군사들은 용감하게 싸웠으나 6천여 명의 왜구들을 물리치기에는 중과부적이었다.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성을 지키기 위해 싸우던 전라병사 원적과 장흥부사 원적은 죽임을 당했다. 전라도 지역의 조선군사 주력부대를 무너뜨린 왜구들은 거침이 없었다. 내륙으로 깊이 들어와 본격적으로 노략질을 시작했다.

조선 군사(육군)의 총본부이자 전라도 해안수비를 맡고 있던 병영성은 주력부대가 달량진성 싸움에서 패한 뒤 사실상 전투부대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전라병사 원적이 전사하자 조선조정은 유사를 전라병사로 임명하고 급파했다. 또 장흥부사에는 벽사찰방이었던 이수남(李壽男)을 임시 장흥부사로 임명해 왜구들의 공격에 대비토록 했다.

왜구들은 마음 놓고 전라도 해안지방을 유린하기 위해 조선군의 본거지인 병영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새로 부임한 전라병사 유사는 왜구들이 몰려오자 성을 버리고 도망을 가버렸다. 임시 장흥부사 이수남도 뺑소니를 쳤다. 5월 21일 병영성은 ‘함락’됐다. 그 다음 날인 5월 22일에는 장흥성(長寧城)도 함락됐다. 5월 26일에는 강진읍성이 무너졌다.

그렇지만 실상은 ‘함락’이라고 표현하기가 부끄러운 상황이었다. 성을 지키던 전라병사와 장흥부사가 모두 줄행랑을 쳤으니 누가 성을 지킬 리 만무했다. 명종실록(권 18권 10년 26일자)에 따르면 왜구들은 텅 비어있는 성에 유유히 들어와 식량과 무기들을 챙겨간 것으로 나타나있다.

기록은 다음과 같다.

“병영 가장(假裝:임시로 임명한 병사)유사와 장흥 가관(假官:임시 부사) 이수남이 성을 버리고 도망가자 왜적들이 마침내 군량과 병기를 모두 가져갔다. 당초에 관찰사 김주(金澍)가 전 부사 유사를 가장으로 삼아 병영을 지키도록 하고 벽사찰방 이수남을 가관으로 삼아 장흥을 지키도록 한 것인데 모두 먼저 도망간 것이다.

5월 21일에 왜적 50여명이 단지 칼과 창만 들고 병영에 들어와 병기와 잡물을 모두 뒤져가고 찐쌀 700여석도 실어갔다. 왜구들이 병영성을 불태웠다. 22일에는 왜구들이 장흥부에 난입해 성안에 있는 곡식과 값나가는 물건들을 모두 빼앗아갔다”

병영성이 안고 있는 참담한 역사다. 당초 병영성은 왜구들로부터 전라도 해안을 지키기 위해 설치된 성이다. 그런데 조선조정은 방비를 게을리했다. 이 탓에 조선수비의 핵심기지인 병영성조차도 왜구들에 의해 함락되고 분탕질 당하는 수모를 겪은 것이다. 왜구들은 해남과 강진, 장흥, 영암 일대를 마음껏 휘젓고 다니며 조선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을 했다.

그 비극은 1592년 임진왜란과 1597년 정유재란 때 더 크고 처참하게 재연됐다. 을묘왜변은 임진·정유재란의 전조였다. 조정대신들은 나라 지키는 것을 소홀히 한 탓에 을묘왜변 때 남도 땅을 비롯한 조선팔도가 쑥대밭이 됐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아니, 교훈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지도자의 유약함과 조정대신의 어리석음은 결국 조선의 망국(亡國)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을묘왜변 때 불태워진 병영성은 후임 병사 남치근에 의해 재건됐다. 그러나 화재가 발생해 모두 불에 타버리고 만다. 조선 조정은 병영성을 다시 복구하는데 양응정이 지은 <병영중수기>에 따르면 1천800여명의 인원이 동원돼 모두 96칸의 건물이 세워졌다. 병영성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에는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다시 불태워지고 1895년 결국 폐성(廢城)이 된다.

■동학농민혁명과 병영성

병영성 복원 전 모습. 1895년 폐성된 후 강진 병영성은 폐허로 변해버렸다.

동학농민혁명 당시였던 1894년 음력 12월 4일과 5일 장흥에 집결한 장흥과 보성, 강진, 해남, 고흥 일대농민군들은 벽사역과 장녕성(장흥)을 함락시켰다. 6일 농민군은 장흥과 강진병영 접경지역인 사인정(舍人亭 : 현 장흥읍 송암리) 앞들에 모여 점심을 먹은 뒤 저녁 무렵에 강진으로 출발했다.

농민군은 2개부대로 갈라졌다. 1개 부대는 강진으로 향했다. 나머지 1개 부대는 동학도 탄압의 근거지였던 병영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병영으로 진격했다. 1만여 명의 동학농민군은 7일 아침 안개를 이용해 강진읍성 아래로 접근했다.

강진현감 이규하(李奎夏)는 구원을 요청하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6일 새벽에 이미 나주로 달아나고 없었다. 농민군들이 함성을 지르며 포를 쏘아대자 강진읍성을 지키던 대부분의 수성군과 백성들은 무기를 버리고 도망을 쳤다. 그러나 수성군 일부는 농민군에 맞서 장렬히 싸웠다.

민보군 지휘자로 활약하던 오남(吾南) 김한섭(金漢燮)과 강진관아의 아전, 수성군 등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관아와 민가가 불에 탔다. 12월 8일 강진읍성을 함락시킨 동학농민군은 9일 풀치재를 넘어 작천 관내로 들어왔다. 군자리 앞 강변 모래밭에 진을 치고 하룻밤을 보냈다.

군자리에서 하룻밤을 보낸 농민군은 장흥에서 올라와 있던 농민군과 합류한 뒤 10일 새벽에 병영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병영성은 전라병마절도사가 있는 곳이라 성이 단단하고 그런대로 군사도 많았다. 농민군의 공격에 대비해 성주위에 목책을 단단히 설치하는 등 수비태세도 갖춘 상태였다.

그러나 병영성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농민군들이 병영성 동쪽의 세 봉우리(옥녀봉·성자산·성락산)를 점령하고 포격을 해대니 성안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해버렸다. 성안의 백성들이 앞 다퉈 성 밖으로 빠져나오자 병사(兵使) 서병무(徐丙懋)도 패랭이를 쓰고 백성들 틈에 끼어 영암으로 달아났다.

성을 지키던 지휘관이 도망가자 수성군은 무기를 버리고 앞 다퉈 줄행랑을 쳤다. 농민군들은 목책에 불을 질러 무너뜨린 뒤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성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일부 군관과 군졸들은 농민군에 맞서 싸우다 장렬히 순국했다. 이 과정에서 병영성내 관아건물과 성 밖의 민가가 모두 불에 탔다. 1555년 왜구에 의해 초토화됐던 병영성이 339년만인 1894년에는 농민군에 의해 다시 폐허가 돼버린 것이다.

■참 군인이었던 병영성 군사 김두흡

농민군이 병영성을 공격한 것은 군사요충지인 병영을 함락시켜야 배후가 공격당하는 일을 막을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또 관군으로부터 빼앗은 대포를 계속 사용하려면 화약이 있어야 하는데 병영성에는 상당한 화약이 있었다. 장차 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려면 화약을 확보해야 하는데 병영성에는 화약이 많았다.

병영성이 함락될 위기에 놓이자 김두흡 감군(監軍)은 불 섶을 안고 화약고에 뛰어들어 농민군 9명과 함께 폭사했다. 화약고가 폭파되면서 병영성은 성 전체가 불길 속에 휩싸였다. 농민군의 위세에 눌려 도망친 군사도 많았지만 김두흡처럼 군사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고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나라에 충성을 다한 이도 많았다. 김두흡은 작천 박동리 출신으로 전해지고 있다.

■나라를 구하려는 의(義)와 나라를 지키려는 충(忠)이 맞붙은 병영성

병영성

1894년 병영성에서 벌어졌던 동학농민군과 관군과의 전투는 의와 충의 가치가 맞붙은 데서 비롯된 것이다. 동학농민군들은 관리들의 수탈과 조정대신들의 부패에 항거해 일어섰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부패한 정치를 없애고 조선의 주권을 갉아먹고 있는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 싸웠다. 의를 위한 것이었다.

이에 반해 탐관오리들을 제외하고 농민군들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순절했던 관리들과 병사들은 충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 대표적 인물이 장흥부사 박헌양과 병영성 감군 김두흡, 강진 수성군 김한섭이다. 박헌양은 장녕성을 지키다 순절했으며 유생이었던 김한섭 역시 강진읍성을 지키다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감군 김두흡은 군인으로서의 본분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호남이 배출한 또 한명의 참 군인이다. 그러나 김두흡이라는 군사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는 이들이 드물다. 고 강 재구소령은 수류탄 훈련도중 부하가 실수로 수류탄을 떨어뜨리자 부하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몸으로 수류탄 위에 자신의 몸을 던졌다.

김두흡은 병영성의 화약이 농민군의 수중에 들어가면 더 많은 관군들이 희생당하고 더 나아가 조선의 사직이 위태로울 것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화약고에 불 섶을 안고 뛰어들었다. 충이다. 병영성에는 의와 충의 정신이 있다. 병영성에 담겨있는 의와 충의 정신을 널리 알릴 필요가 크다.

광주와 전남에는 의와 충절의 정신이 도도히 흐르고 있다. 몽골에 맞서, 왜에 맞서 목숨을 바쳐 싸웠던 선인들의 희생정신이 곳곳에 배어있다. 최순실의 국정농단에 분노해 일어선 촛불민심은 의다. 또 한편으로 위기에 처해있는 나라를 다시 건강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 지혜를 모으는 것은 충이다. 의와 충의 조화로운 결합이 절실한 때다. 병영성을 찾아 그런 고민을 진지하게 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병영성 복원

병영성안에 있었던 초등학교(일제는 조선강점 후 병영성 안에 국민학교를 세우고 일본에 충성하는 신민교육을 시켰다)
강진 전라병영성 일원 발굴조사 항공사진
병영성에서 바라본 병영마을모습

병영성은 지난 1992년에 전라남도 기념물 제140호로 지정·관리됐다. 이후 역사적 가치와 중요성이 인정돼 지난 1997년에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397호로 지정된 후 관리되고 있다. 문화재청은 강진 전라병영성 일대를 대상으로 1999년부터 2003년까지 문지, 옹성(甕城), 체성에 대한 발굴조사를 시행했다.

또 2008년에는 동문지와 동문지 남측 성벽에 대한 발굴조사를 벌였다. 지난 2012년부터는 성 내부에 대한 발굴조사가 벌어지고 있다. 발굴 조사 결과 병영성은 평지에 축조된 정방형의 성으로 전체 둘레가 1천60m이다. 4개의 문과 4개의 옹성, 8개의 치성(雉城)으로 구성돼 있다.

성 내부의 주요시설로는 동헌(東軒, 고을의 수령이 집무를 집행하던 건물)과 객사(客舍, 고려·조선 시대 각 고을에 둔 관사), 내아(內衙, 조선 시대 수령의 가족이 거처하던 안채) 등이 있었던 것이 파악됐다. 문화재청은 조사 결과를 토대로 지난해 2000년부터 2016년 말까지 370억 원을 들여 성곽 1천60m의 성곽과 옹성, 동서남북 4개 문을 복원했다.

2012년부터 병영 성 내부 유적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벌인 결과 관아와 부속건물 배치 형태가 밝혀졌다. 발굴조사에서는 여수 진남관보다 큰 객사 터가 확인됐다. 연못도 4개나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따라 2017년부터는220억 원의 예산이 투입돼 병영 성 객사와 관아 건물 복원 공사가 추진된다.

지금 전라병영성 복원사업을 위한 발굴조사를 실시하고 있는 기관은 사단법인 한울문화재연구원이다. 연구원들은 컨테이너 박스에 설치된 사무실에서 더위와 추위와 싸워가며 고된 일을 묵묵히 해나가고 있다. 저들의 정성이 있었기에 베일에 가려져 있던 병영성의 모습이 한꺼풀 씩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한울문화재연구원 석순현 연구원은 “지금까지 동서남북 옹성 및 성벽복원과 남문루, 동문루, 서문루 복원공사가 마무리 됐다”며 “성 내부 주요시설 복원을 위해 발굴조사가 진행 중인 만큼 관아와 객사 등 내부시설 복원공사가 탄력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만약 병영성이라는 문화자산이 영남에 있었더라면?

발굴 및 내부공사가 진행중인 병영성내부

병영성은 국내 다른 성과는 달리 민가가 없이 군사들을 위한 숙박·훈련시설만 있었던 성이라는 점에서 우리나라 군영(軍營)을 이해하는데 매우 의미가 큰 성이다. 병영성 복원이 완료되면 국내에서 유일하게 군영이 복원됐다는 점에서 각광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아쉬운 것은 더디기만 한 정부의 지원이다.

20년 동안 찔끔찔끔 예산이 지원되는 바람에 복원공사가 속력을 내지 못하고 있다. 만약 병영성과 같은 문화자원이 영남지역에 있었더라면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 아래 불과 몇 년 만에 복원공사가 끝났을 것이라는 지적이 크다.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 하나. 김영석씨는 강진의 역사와 문화를 정리하고 보존하는 향토사학자이다. 강진군의회 의장을 역임한 뒤 문화해설사로 일하면서 관광객들에게 강진의 멋과 유적지의 의미를 널리 알리는데 애쓰고 있다. 그가 겪은 일이다.

몇 년 전 영남지역에서 몇몇 관광객이 병영성을 찾아왔다고 한다. 그중에는 영남지역에서 고위공직자로 근무했던 K씨도 있었다. K씨는 병영성이 지닌 문화가치를 단박 알아차리고 김영석씨에게 “도대체 이렇게 훌륭한 문화자산을 왜 이렇게 소홀히 취급하고 있느냐? ”고 나무라는 투로 말하더란다.

그래서 김영석씨는 “내가 강진군의회 의장으로 있었던 20년 전에 병영성 복원사업비로 500억원이 필요하다며 정부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정부는 매년 20억 원 정도만 지원하고 있어서 이 모양 이 꼴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영석씨는 덧붙여 “그 양반이 그때서야 호남차별이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를 알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닫더라”고 밝혔다.

■일제의 조선정기 훼손의 현장 병영성

병영성은 또한 일제의 조선정기 말살의 현장이기도 하다. 일제는 조선강점기에 병영성안 관아 터에 ‘國民學校’를 세웠다. 왜구를 막아내기 위해 설치했던 병영성에 조선백성을 일본천황을 위해 생명을 바칠 수 있는 황국신민으로 키우기 위한 학교를 만들었던 것이다. 치욕이다.

일제는 병영성 한복판에 초등학교를 세운 뒤 성벽을 헐어내 신작로(新作路) 개설공사에 사용했다. 신작로는 일제가 조선에서 쌀과 철, 목재 등 각종 물자를 실어가기 위해 만든 도로다. 왜구를 막기 위해 쌓은 성의 돌들이 일본이 쉽게 물건을 실어가기 위해 만든 도로건설용으로 사용된 사실이 새삼 가슴을 아리게 한다. 부국강병(富國强兵). 병영성이 주는 또 하나의 교훈이다.

■병영성에서 꼭 둘러볼 곳

홍교
홍교 다리아래쪽에 돌출돼 있는용머리

<머슴총각과 양반집 딸의 사랑이야기가 담긴 홍교>

강진군 병영면 성동리 병영성 옆에는 홍교(虹橋)가 있다.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129호이다. 병영성 뒤쪽으로 흐르는 배진천 위에 놓인 관계로 배진강다리라고도 불린다. 직사각형 화강 석재 74개를 서로 짜 맞추어 무지개(홍예)꼴로 만들었다. 빈틈은 잡석으로 채운 뒤 점토로 다리 위를 다졌다.

병영성 홍교와 관련해서는 ‘숭록대부(崇綠大夫)가 된 유한소(劉漢所)의 금의환향을 기념하여 양한조(梁漢祖)가 감독, 준공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시 말해 과거에 급제해 고향에 돌아온 유한소를 기념하기 위해 다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기록으로 보면 18세기에 건축된 것으로 보인다.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 길이가 7m여서 크지 않은 관계로 아담한 느낌을 준다. 세월의 이끼가 낀 창연함과 아기자기한 맛이 어우러져 있어 시선을 붙잡는다. 배진강 저수지의 연꽃과 어울려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고 있다. 저 멀리 병영성과 탁 트인 벌판, 옥녀봉의 경치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눈이 즐겁다.

홍교의 상단 중앙에는 여의주를 입에 물고 용 한마리가 머리를 치켜들고 있다. 병영성 홍교에는 노비 유총각(劉總角)과 양반집 딸 김낭자(金娘子)의 사랑이야기가 담겨 있다. 300여년전 병영면 상림리 토착부호인 김씨 집안에는 유총각이 종살이를 하고 있었다. 유총각은 본디 양반의 후손이었으나 집안이 몰락하자 머슴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부호 김씨의 딸이 유총각에 대해 연정을 품게 됐다. 둘은 사람의 눈을 피해 사랑을 나누게 됐고 둘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다. 태어난 아이는 용모가 준수하고 총명해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 아이가 나중에 과거에 급제해 마침내 정승이 됐으니 바로 유한계 정승이다.

그런데 목포대 김선태교수에 따르면 이 이야기는 사실과 다르게 약간 윤색된 것이다. 목포대 박물관팀의 조사결과 유한계(유한소) 정승은 실존인물이다. 장흥에서 살던 아버지 유신방이 병영 상림리 영광 김씨 김진성(金振聲)의 딸과 결혼하면서 병영으로 이주해왔으며 유신방의 아들이 유한계라는 것이다.

그러나 유한계는 과거에 급제해 정승벼슬에 오른 것이 아니라 107세의 장수를 누려 수직(壽職)으로 숙종 무인년(1698년)에 종 2품의 벼슬(가선대부종지중추부사)를 받았다. 유한계는 경술년(1730)에 종1품의 벼슬(승록대부)을 다시 받았다. 유한계는 백목장수였으며 그가 죽은 뒤 정승직책이 내려왔다는 구전도 있다.

병영성 홍교와 관련된 ‘사랑의 전설’과 현실은 차이가 있다. 그러나 신분을 초월한 사랑과 그들의 아들이 높은 벼슬을 받고 돌아왔다는 내용의 ‘유한계 금의환향’ 전설은 신분을 따지지 않은 남녀 간의 사랑과 신분상승에 대한 백성들의 열망을 담고 있는 것이다.

병영성 홍교는 그런 전설에 어울린다. 아름답고 또한 애절한 맛이 있다. 다리 밑의 용머리는 이무기의 승천을 상징하는 듯싶다. 갑오년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이 다리 주변에서도 많은 피가 뿌려졌을 것이다. 병영성 안은 모두 불에 타버렸지만 홍교는 병영성을 비켜선 곳에 위치해 있고 또한 돌다리라 화를 면한 것으로 여겨진다.

<홍교 석장승>

병영성 홍교의 석장승
장승이 있었던 때의 홍교(70년대)

홍교 입구에는 문인상과 무신상의 석장승(벅수) 2구가 세워져 있다. 병영성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벅수는 옛것을 대신해 세워진 것이다. 홍교 입구 벅수는 지난 1984년에 누군가 몰래 가져가 버렸다. 지금의 석장승은 1990년에 새로 조성된 것이다.

김선태교수에 따르면 당초의 두 벅수는 무뚝뚝하면서도 야무진 모습의 무인(병사)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이 벅수가 월출산의 드센 기를 막아내기 위해서 세웠던 것이라고 말한다. 예전에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아낙네들이 이 벅수에 입을 맞추면 아이를 낳았다는 그런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도 전해온다.

<병영성 하멜기념관>

병영성은 제주도에 표착했던 네덜란드인 하멜(1630~1692)이 8년여 동안 억류됐던 곳이기도 하다. 범선을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하던 하멜 일행 33명은 풍랑을 만나 1653년 8월16일 제주도에 표착했다. 그들은 조선 땅에 13년20일 동안이나 억류됐었다. 제주도에서 9개월, 한양에서 1년 9개월, 전라도에서 11년을 보냈다.

성동리 은행나무

전라도에서는 남원과 순천, 여수등지에서 살았다. 하멜일행은 1656년(효종 7년)부터 7년 동안 병영에서 억류돼 있었다. 그들이 살던 곳은 현재 성동리 사무소 근처다. 이곳에는 수령이 600년이 넘는 은행나무 한그루가 서있다. 하멜일행은 이 은행나무 아래에 움막을 짓고 살았다.

하멜일행은 자신들을 고향으로 보내 달라고 기회가 될 때마다 간청했다. 그러나 효종은 “너희들이 새라면 그곳으로 날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외국인을 나라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다. 우리가 너희들에게 식량과 의복을 주어 보호해 줄 테니 이 나라에서 여생을 마치라”라고 대답했다.

하멜 일행들은 억류 초기에는 식량을 제공받았으나 얼마 되지 않아 지원이 끊겼다. 이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각종 허드렛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견뎌냈다. 이들은 한달에 두 번, 관청의 노역에 동원돼 고된 일을 했다. 주로 벽을 쌓거나 하천을 보수하는 일이었다. 논밭의 잡초를 뽑기도 했다. 나막신을 만들어 팔거나 춤을 추고 먹을 것을 받기도 했다.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자 구걸을 하는 등 비참한 생활을 했다.

조선을 탈출한 하멜은 조선에 억류돼 있는 동안의 임금을 받기위해 동인도회사에 ‘임금 청구보고서’를 작성하는데 이것이 ‘하멜 보고서(하멜 표류기)’다. 1668년에 만들어진 하멜보고서를 통해 조선이 유럽에 알려지게 됐다.

정약용 선생의 ‘감춰진 스승’ 하멜

그러고 보면, 병영은 동서양 문명교류의 창구였다. 하멜일행이 언급했던 조선억류생활은 사실 병영생활에 대한 기록이나 다름없다. 또 병영사람들은 하멜일행을 통해 세계지리나 유럽문명에 대해 눈을 뜨게 됐다.

사학자 김정호는 이 우연찮은 문명의 교차가, 전라도가 실학의 요람이 된 배경이 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병영에서 살던 푸른 눈의 이방인들이 전한 먼 바다 건너 세상의 이야기와 학문은 장흥의 실학자 위백규의 씨앗사상이 됐다는 것이다.

위백규선생이 지은 <존재존서>에 세계지도가 실려 있는 것은 하멜일행이 남긴 영향으로 간주하고 있다. 지방에서 편찬된 책중에서 세계지도가 실린 것은 <존재존서>가 처음이다. 위백규선생의 실학사상은 후에 정약용선생의 실학사상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 그렇게 보면, 하멜이 정약용 선생의 ‘감춰진 스승’ 이었던 셈이다.

하멜일행의 손때가 묻은 병영마을 옛 담장

한골목의 옛담장. 하멜일행이 쌓은 네덜란드식 담장이다

병영 한골목은 옛 마을의 고즈넉함과 빗살무늬 돌담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한골목에 있는 토담들은 전형적인 네덜란드 식 담쌓기를 이용해 만든 것들이다. ‘하멜식 담쌓기’는 얇은 돌을 15° 정도 눕혀서 촘촘하게 쌓고 다음 층에는 다시 엇갈려 쌓는 기술을 사용하고 있다. 일종의 빗살무늬 형식이다. 한골목은 등록문화재 제264호이다. 2km에 달하는 토담골목길을 걸으며 역사의 향기에 취해보는 것은 어떨까?

<병영 설성 사또주가 뜨다>

병영 설성 사또주가 뜨고 있다. 광주지방조달청은 2017년 1월 강진군 소재 병영 양조장의 ‘병영 설성 사또주’에 대한 구매계약을 체결하고 나라장터 종합쇼핑몰에 등록했다. 설성(雪城)은 병영성을 축조한 마천목이 어느 곳에 성을 지을지를 고민하던 중 눈내린 다음날 아침 신기하게도 눈이 쌓이지 않은 곳이 빙둘러 있는 것을 보고 이 곳을 성터로 삼았는데 이곳이 현재의 병영성터다. 그래서 병영성을 설성이라고도 부른다. 광주·전남지역에서 생산되는 전통주가 조달청 나라장터에 등록된 것은 2016년 10월 계약한 완도 ‘황금과 비파와인’에 이어 두 번째다. ‘병영 설성 사또주’는 조선시대 전라 병영절도사가 즐겨 마셨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100% 강진산 햅쌀과 지역의 복분자, 오디를 발효시켜 빚은 전통주다. 세계 각 곳의 주류품평회에서 호평을 받으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술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병영 삼인리 비자나무>

삼인리 비자나무

병영 한길목 아래쪽 입구에서 산 쪽으로 올라가는 북쪽 비탈길에는 수령이 500년이 넘은 비자나무가 있다. 높이가 10m, 가슴높이 둘레는 5.2m에 달한다, 가지가 동서남북으로 15m정도에 달해 말 그대로 울울창창(鬱鬱蒼蒼)한 모습이다.

강진 삼인리 비자나무가 500년이 넘게 자랄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두 가지 추측이 전해진다. 하나는 전라병영성을 지을 때 다른 나무는 모두 베어졌으나 이 나무는 볼품이 없어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비자열매가 기생충을 없애는 약효가 있어 사람들이 잘 키웠다는 것이다. 이 비자나무는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우는 소리를 낸다는 전설이 있다.

병영성 일대 관광명소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강진/이봉석 기자 lbs@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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