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갈등 속 벌어진 참혹한 학살…절실한 진상규명과 용서

 

 

 

최혁 주필의 전라도 역사이야기
16.여순사건과 손양원 목사
좌우갈등 속 벌어진 참혹한 학살…절실한 진상규명과 용서
여순사건으로 전남·북, 경남 일대에서 1만5천여 명 死傷
희생자 명예회복·유족지원 미흡, 특별법 서둘러 제정돼야
손양원목사, 두 아들 총살한 살인범 용서하고 양자로 들여

6·25 전쟁 당시 손양원 목사는 가족들만 피난을 보내고 자신은 애양원에 홀로남아 거동이 불편한 한센병 환자들을 돌봤다. 그러던 중 1950년 9월 28일, 북으로 후퇴하던 공산군에게 총살당했다. 애양원은 1967년 여수 애양재활병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애양재활병원은 나병 환자들뿐 아니라 장애인들까지 치료하는 기관으로 규모가 커졌다. 1993년 애양원에 손양원목사순교기념관이 세워졌다. ‘ㅅ’자 형태의 기념관은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를 상징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손양원 목사와 두 아들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참혹한 여순 사건의 와중에서 1만5천여명의 무고한 시민들이 죽거나 다쳤다. 손양원 목사가 사랑하는 두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하고 양자로 받아들인 것을 묘사한 그림.
손양원 손동신

■두 아들 죽인 살인범을 양아들 삼은 손양원 목사

어느 날 갑자기, 사랑하는 두 아들이 죽었다. 두 아들은 또래 청년들에게 끌려가 몽둥이와 총자루로 무수히 맞은 뒤 총살을 당했다. 완장을 찬 청년들은 공산주의 사상에 빠진 좌익청년들이었다. 좌익청년들은 동인과 동신, 두 아들에게 ‘미제의 앞잡이’라는 죄목을 붙여 처형했다. 참으로 억울한 죽음이었다. 여순사건 때 벌어진 일이었다.

두 아들을 잃은 아버지는 목사였다. 그 목사는 바로 여수 애양원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보살피며 목회활동을 하던 손양원 목사였다. 손 목사는 비탄에 잠겼다. 그러나 곧 두 아들을 잃은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고 마음을 다잡았다. 두 아들을 잃은 슬픔도 컸지만 두 아들을 죽인 이들의 영혼도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손 목사는 두 아들의 장례식에서 아들을 죽인 이를 회개시켜 아들로 삼겠다고 말했다. 아들을 죽인 ‘좌익청년 안재선’은 국군에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사형을 선고받았다. 손 목사는 안재선에 대한 구명운동을 벌였다.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안재선을 석방되게끔 했다. 그리고 그를 양아들로 삼았다. 친아들 둘을 죽게 한 살인범을 아들로 삼은 것이다.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1948년 여수에서 벌어진 여순사건의 와중에서 실제 벌어진 일이다. 손목사는 양아들 안재선을 신앙의 길로 인도했다. 안재선은 손목사의 용서와 무조건적인 사랑을 감당할 수 없었다. 괴로웠다. 고통과 번민의 세월이 거듭됐다. 그러던 끝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마음의 평온을 얻었다. 그는 전도사가 됐다.

그리고 그 역시 이웃들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베풀었다. 그렇게 살다가 48세에 후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삶은 후회와 회개로 점철된 삶이었다.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혀 앞날이 창창한 청년들을 죽음으로 몰았다. 만용과 치기로 살인죄를 저지른 부끄러운 삶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마지막 여정은 아름다웠다.

안재선의 아들은 아버지의 과거를 모르고 컸다. 아버지가 얼마나 무거운 고통의 짐을 짊어지고 살았는지를 몰랐다. 안재선의 아들은 목사가 됐다. 아버지 장례식에서 손양원 목사의 유복자인 손동길 목사에게서 전후사정을 듣게 됐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고통스런 이야기였지만 그 역시 마음을 가다듬고 더욱 신실한 삶을 살고 있다.

소설 같은 이야기다. 그러나 실제 벌어진 일이다. 남도 땅의 피로 붉게 물들였던 여순사건은 참혹한 일이었지만 이런 고귀한 용서와 화해도 피어나게 했다. 이런 일이 가능하게 했던 것은 사랑과 용서다. 그 연원에는 조선선교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미국인 선교사들과 광주 최초의 목사인 최흥종 목사가 자리하고 있다.

■여순사건의 개요
 

1942년의 여수전경. 14연대의 출동 거부로 발생한 여순사건은 전남·북, 경남 일대 민간인과 군경 1만5천여명이 죽거나 부상을 당하는 피해를 가져왔다. /여수시 제공

여순사건 발생 당시 정부는 이 사건을 여순반란사건 또는 전남반란사건이라고 불렀다. 여순사건은 9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불온 시됐다. 1995년부터 국사 교과서에 ‘여수·순천 10·19사건’이라고 명명됐다. 일반적으로는 여순사건이라 부른다.

여순사건에서 사망한 군경과 우익인사들은 추모의 대상이 됐으나 이 사건의 와중에 사망한 민간인들은 공산주의자들에게 협조하거나 부역한 죄로 처형당한 사람들로 취급됐다. 그러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가 여순사건에 대한 조사를 펼쳐 새로운 정의를 내린 이후로, 이 사건에 대한 평가는 대폭 달라지기 시작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노무현 정부가 지난 2005년 우리 현대사 전반의 반민주적·반인권적 사건 등에 대한 진실을 밝혀내기 설립한 국가기관으로 2010년 6월 30일까지 4년2개월 동안 활동을 벌인 뒤 종합보고서를 작성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정의한 여순사건의 사건개요는 다음과 같다.
<진실화해위원회>
1948.10.19 여수 주둔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의 반란을 시작으로 1950.9.28 서울수복까지 약 2년간 전남, 전북, 경남 일부 지역에서 사건과 관련하여 비무장 민간인이 집단 희생되고 일부 군경이 피해를 입은 사건
그렇지만 여순사건을 바라보는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의 시각차는 아직도 크다. 여순사건의 진상규명을 비롯 정부차원의 사과와 유족들에 대한 지원을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여수지역사회연구소는 여순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지역사회연구소>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지창수를 비롯한 국방경비대 제14연대 병사들은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제주도에서 일어난 항쟁을 진압하라는 파병 명령을 거부하고 주둔지인 여수에서 봉기하였다.

이 봉기는 남로당과 사전에 연락을 갖고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 아니라 14연대 남로당 세포원들이 독자적으로 일으킨 것이었다. 남로당 중앙은 물론이고 전라남도 도당이나 여수·순천지역의 지역당까지도 사전에 봉기 사실을 알지 못했다. 봉기를 계획한 하사관들은 소수에 불과했고 봉기를 일으킨 다음에는 어떻게 진행할지도 뚜렷이 정해진 바가 없었다.

14연대 봉기는 매우 빠르게 파급되었다. 19일 늦은 밤에 시작된 봉기는 다음 날 동트기 전에 여수를 점령했고 아침에는 순천에 진입하였다. 순천에는 인근 지역에서 지원 나온 경찰관들이 봉기군을 막으려 애썼지만 봉기군은 경찰보다 더 많이 불어났다. 순천에 주둔하고 있던 홍순석이 지휘하는 14연대 파견대가 봉기에 합류했을 뿐만 아니라 멀리 광주에서 진압하러 나온 4연대 소속 병사들도 봉기군에 합류했던 것이다. 며칠 만에 여순사건은 광양, 구례, 보성(벌교) 등 전남 동부지역으로 빠르게 번져나갔다.

봉기군이 점령한 여수와 순천에서는 지방 좌익 세력과 청년 학생들이 대거 참여하여 광범한 대중봉기로 발전하였다. 남로당원들은 인민위원회를 건설하여 식량배급과 친일파, 민족반역자, 반동세력 등을 처단함으로써 기초적인 행정을 시작했고, 학생들은 총을 잡고 봉기군을 원조했으며 여학생들과 여성 조직원들은 봉기군에게 밥을 해주는 등의 일을 도왔다. 여수·순천에서 일어난 민중봉기는 남한정권을 완전히 부정하였다.

여순사건은 이승만정부가 들어선 뒤 처음 맞는 정치적 위기였다. 하지만 여순봉기는 전남동부 지역에만 머물렀고 전국으로 파급되지는 못하였다. 봉기군은 여수와 순천을 며칠간 점령할 수 있었지만 나머지 지역은 봉기군과 진압군의 반복되는 점령과 재점령의 순환에 놓여 있거나 한 차례의 휩쓸고 지나가는 바람으로 끝났다.

정부는 38선 경계 병력을 제외한 남한의 모든 군대로 진압군을 편성했다. 미군은 임시군사고문단원으로 하여금 작전과 군수, 인사를 통제하면서 진압작전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다. 진압작전을 주도했던 것은 미군사 고문단과 만주군 출신의 장교들이었다. 광복군 출신의 송호성은 진압작전을 총괄하는 지위에 있었지만 실제로 진압작전은 만주에서 빨치산 토벌 경력이 있었던 김백일, 백선엽 등에 의해 주도되었다. 공식적인 지휘체계도 흔들려 진압작전을 주도했던 인물들의 편의에 따라 변경되기도 하였다.

순천과 여수를 점령한 진압군과 경찰은 우익청년단원들과 지방 우익세력의 도움을 받아 협력자 색출에 나섰다. 혐의자들에게는 아무런 변호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은 채 우익세력의 ‘손가락 총’에 지목되어 즉석에서 참수, 사형되거나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법도 제정되기 전에 실시된 계엄령은 반란지역의 민간인을 적으로 간주하여 처형할 수 있게 만든 ‘살인 면허장’이었다. 그 결과 봉기군이 들어왔을 때보다 진압군이 점령했을 때, 민간인 희생자가 몇 배나 더 발생하였다.

해방 전후의 한국현대사는 서로 체제가 다른 분단정권의 수립으로 귀결된 까닭에 역사적 사건에 대한 평가 또한 연구자에 따라 매우 다르다. 여순사건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당시의 이승만정부와 언론 기관 그리고 국방부에서 간행한 공식 간행물 등은 여순사건을 여수 14연대 ‘남로당 세포들이 대한민국을 전복하기 위해 일으킨 군내의 쿠데타’라던가, 남로당 중앙이나 지방 좌익들이 일으킨 반란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같은 평가는 실제로 일어난 사실과는 부합하지 않으며, 다른 중요한 사실들을 누락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여순사건에서는 좌익에 의한 경찰·우익인사 학살뿐만 아니라 진압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도 광범위하게 일어났는데 이러한 유혈적 결과의 책임은 봉기세력과 지방좌익세력들의 책임으로만 떠넘겨 지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좌익의 폭력성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평가는 편향적인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여순사건은 역사적 사실 규명이 미흡한 채 편향적 해석만이 생산되고 유통된 하나의 예라고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영향이 큰 사건일수록 사건의 원인과 배경을 따져보는 것이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연구 작업이 이루어지기 이전에 그 필요성이 전혀 없다고 미리 재단하고 일방적인 해석만이 생산되고 유포되었던 이유는 당시 이승만정권이 여순사건에 대해 가졌던 위기감과 대응방식이 이후 강력한 반공노선 아래에서 재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부는 여순사건으로 닥친 위기를 진압작전으로 극복한 뒤 반공사회 구축을 위해 온 힘을 쏟았다. 반공사회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여순사건은 반공이데올로기 형성을 위한 주요한 경험과 근거로 작용했고 현재까지도 여순사건에 지식과 이미지는 당시에 형성된 것과 큰 차이가 없다. 좌익세력의 폭력과 비인간성이 강조되었고 심지어 좌익세력은 짐승이나 악마의 수준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진압작전에서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한 군경, 우익 청년단체원들은 공산주의 위협에서 대한민국을 구한 애국자로 칭송되었고 작전이 끝난 다음에는 훈장이 수여되었다. 반공이 애국이며 반공 이외의 것은 체제위협이자 매국으로 간주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여수 14연대 제주토벌출동거부병사위원회 포스터

오랜 세월동안 여순사건을 연구하면서 여순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주철희 박사의 경우는 ‘여순사건’을 ‘여순항쟁’으로 정명(正名)하고 여순항쟁을 대한민국 항쟁역사의 서막으로 보고 있다. 즉 여수에 주둔한 국군 제14연대 병사들이 ‘동포들을 학살하라’는 제주4·3사건 진압명령을 거부하고 단독정부 수립반대, 미군 철수를 주장하며 여수, 순천 등 전라남도 동부지역을 점령한 사건이라는 시각이다.

주철희박사는 이 항쟁을 계기로 이승만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강력한 반공국가를 구축했다고 적시하고 있다. 주 박사는 여순사건 발발 69주기를 맞이한 2017년 10월 19일동성자동차학원(옛 14연대 터)에서 북 콘서트를 갖고 여순항쟁의 진상규명과 특별법제정 등 정부의 성의 있는 대책마련을 촉구하기도 했다. 주철희 박사는 여순항쟁으로 희생당한 사망자가 1만 5천여 명에 달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국방부가 1948년 11월10일에 발표한 ‘여수·순천반란사건 종합전과’에 따르면 반란군 사살 363명, 포로 2천116명이다. 1949년 1월 10일 재판에 회부된 반란군 혐의자 2천287명 중 410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568명은 종신형, 나머지는 유죄판결을 받아 복역했다. 일부는 석방되기도 했다. 반란군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은 1천200명, 부상자 1천150명, 행방불명자 3천500명이었다.

그런데 여순사건으로 인해 죽거나 다친 민간인의 수는 모두 1만5천650명에 달한다. 군경에 의해 무고하게 희생된 민간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동인과 동신의 죽음
일제 강점기 당시 손양원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손목사가 감옥에 오래 갇혀 있는 바람에 아들들은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장남 동인과 차남 동신은 그래서 늦은 나이에 학교를 다녔다. 여순사건이 일어난 1948년 동인은 24살이었다. 순천사범학교 6학년생이었다.

동신은 19살로 순천중학교 2년생이었다. 동인은 당시 기독학생회 회장이었다. 좌익학생들로 이뤄진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은 동인을 ‘반역죄’로 붙잡았다. 동신도 끌어왔다. 10월 21일이었다. 좌익학생들은 두 형제를 마구잡이로 때린 뒤 순천경찰서 뒷마당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들 앞에 두 형제를 세워놓고 총살을 시키려 했다.
 

동인·동신 형제가 죽임을 당한 당시의 순천경찰서.

이때 동생 동신이 형 동인의 앞을 가로막으며 형은 집을 돌봐야하니 살려주고 자신만 죽이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눈에 핏발선 청년들은 동생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형을 쏴 죽였다. 어린 나이의 동신은 자신에게 총부리가 겨눠지고 있는 그 상황에서도 좌익학생들을 향해 “예수를 믿고 회개해야 한다”며 신앙인으로서 담대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동신 역시 곧 죽임을 당했다.
 

손동인·동신을 안장한 후 무덤앞에 선 가족과 교우들

경찰서 뒷마당에 버려져 있던 두 형제의 시신은 26일 수습돼 여수 애양원으로 운구됐다. 그리고 다음날 장례식이 치러졌다. 그날 두 아들의 장례식에서 손양원 목사는 ‘10가지 감사문’을 읽었다.

손 목사는 첫 번째 감사로 자기와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들 장남과 차남을 순교자로 바칠 수 있는 축복을 준 것을 꼽았다. 또 일곱 번째 축복으로는 사랑하는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회개시켜 아들로 삼고자 하는 마음을 준 것에 대해 감사한다고 말했다.

■ 애양원의 역사
애양원의 설립되기까지는 1904년 광주 양림동에서 선교활동을 했던 미국 남장로교회 소속 유진 벨(Eugene Bell, 배유지)과 오웬(Clement C. Owen, 오기원), 목포에서 활동하던 포사이드(Wiley H. Forsythe)선교사, 그리고 광주최초의 목사인 오방 최흥종 목사의 헌신과 노력이 뒷받침됐다.

1909년 급성폐렴으로 앓고 있던 오웬선교사를 치료하기 위해 목포에서 포사이드선교사가 광주에 왔다. 이때 최흥종은 포사이드선교사를 맞이하러 효천으로 나갔다. 효천에서 포사이드선교사를 만나 함께 광주로 오는데 이때 누더기 옷에 피와 고름을 흘리며 추위에 떨고 있는 여자 한센병 환자(문둥병, 나병환자)를 만나게 된다.

오방 최흥종 목사

포사이드 선교사는 이 환자를 자신이 타고 있던 말에 태우고 자신은 걸어갔다. 또 자신의 털옷을 벗어 환자에게 입혔다. 이 장면은 최흥종에게 대단한 감명을 안겼다. 이후 최흥종은 나환자를 위해 평생을 살기로 결심하고 1911년 광주 양림동과 봉선동에 있는 자신의 땅 1천 평을 기증해 나환자 수용소가 들어서도록 했다.

광주제중병원(기독병원)의 병원장이었던 로버트 윌슨은 이 수용소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치료했다. 이 수용소는 다음해인 1912년 한국최초의 한센병 전문병원인 광주나병원이 됐다. 광주기독병원의 병원장이었던 로버트 윌슨은 1909년 여름, 병원 인근 봉선리에서 나병 환자 10여 명을 치료한 것을 시작으로 나병 환자들을 위한 광주나병원을 설립했다.

광주나병원은 영국 에든버러에 있는 영국 한센병자협의회로부터 도움을 받아 설립된 병원이었다. 광주나병원은 기부자의 이름을 따서 처음에는 비더울프 나환자 수용소라 명명됐다. 광주나병원은 수용소와 진료소, 교회 등을 갖춘 나병 전문 치료기관이었다. 자연 한센병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1924년에는 수용된 한센병 환자가 560명에 달했다.
 

광주봉선리 남자병동

한센병 환자들이 많아지자 “봉선동에서 생산된 배추에 한센병 환자들의 균이 묻어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광주시민들의 반발이 커졌다. 일제 역시 전남의 중심지인 광주에 전염성이 강한 한센병 환자들이 몰려있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래서 광주봉선동에 있는 광주나병원은 1926년 인적이 드문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로 이전하게 됐다. 1935년 환자들에게 비더울프 나환자 수용소의 새 이름을 공모했는데 ‘애양원’(사랑으로 양을 키우는 동산)이라는 이름이 채택됐다.

인민군에 의해 처형된 손목사님 시신과 함께한 가족들
부임당시 애양원 사택 앞 가족들 모습.
손양원 목사와 애양교회 당회원들의 기념사진.

1928년 600여명의 한센인 환자들의 신앙생활을 위해 2층 규모의 석조 건물인 예배당이 준공됐다. 애양원 예배당이다. 손양원 목사는 1939년 7월 14일 애양원 교회에 부임했다. 손 양원 목사는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먹고 자면서 그들을 돌봤다.

그러나 손목사는 부임한 지 1년이 못돼 일제에 의해 감옥에 갇혔다. 일제가 기독교를 탄압하면서 신사참배를 강요했으나 이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광복 후 손양원 목사는 다시 애양원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좌우대립이 심한 와중에 1948년 여순사건이 발생해 두 아들이 좌익청년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손양원 목사를 만나 글을 써주고 있는 김구선생.
김구선생이 손양원 목사에게 남긴 글.
손양원목사 옥중생활을 묘사한 그림. 손목사는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피난하지 않고 있다가 죽임을 당했다.

이후 6·25 전쟁이 벌어졌으나 손양원 목사는 가족들만 피난을 보내고 자신은 애양원에 홀로남아 거동이 불편한 한센병 환자들을 돌봤다. 그러던 중 1950년 9월 28일, 북으로 후퇴하던 공산군에게 총살당했다.

애양원은 1967년 여수 애양재활병원으로 이름이 바꿔졌다. 애양재활병원은 나병 환자들뿐 아니라 장애인들까지 치료하는 기관으로 규모가 커졌다. 1993년 애양원에 손양원목사순교기념관이 세워졌다. ‘ㅅ’자 형태의 기념관은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손양원 목사와 두 아들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수시는 2012년에 손양원목사유적지테마기념공원을 조성했다. 애양원, 성산교회, 애양원박물관, 순교기념관, 삼부자의 묘, 사랑의 열매탑, 토플하우스 등이 자리하고 있다. 애양원에는 머나먼 이역 땅인 조선에서 헌신적으로 선교와 봉사활동을 했던 미국인선교사들의 헌신, 최흥종목사의 한센인에 대한 사랑, 손양원목사의 원수를 용서하고 품었던 사랑이 스며있다.

■회한과 아쉬움 컸던 여순사건 69주기

여순사건 69주기 위령제. 지난 2017년 10월 19일 여수시 여서동 미관광장에서 당시 민간인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는 위령제가 올려졌다.

여순사건이 발생한지 69주년이 되는 날인, 2017년 10월 19일 전남 여수시 여서동 미관광장에서는 여순사건 여수유족회와 시민 등 200여 명이 참석해 당시 민간인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는 위령제를 지냈다.

그러나 여수가 사건이 발생한 지역이면서 또한 민간인 피해가 가장 많았던 지역인데도 불구하고 여수지역 일부 정치인들의 무관심으로 ‘여순사건에 대한 조명과 희생자들에 대한 예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지난 2014년 11월 17일 발의된 ‘여수시여순사건민간인희생자위령사업지원등에관한조례안’은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정되지 못하고 있다.

여순사건 과정에서 무고하게 숨진 이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유가족에 대한 배상이 이뤄지려면 정부차원의 특별법 제정이 요구되고 있다. 여러 가지 정치적 입장 차이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여순사건의 분명한 성격규정과 기념사업을 위해서는 정부와 자치단체들의 성의 있는 지원이 요구된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이영일소장은 “여순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소장은 그 이유로 진실화해위가 2005년부터 2010년까지 활동하면서 신청자 중심의 조사를 실시해 실제 피해규모에 비해 턱없이 낮은 피해결과만 접수됐다는 점을 들고 있다. 이소장은 피해접수 건이 실제 피해사례에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소장은 정부차원의 공식사과와 교과서 수정,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 유가족들에 대한 지원 등이 서둘러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지금처럼 여순사건에 대한 정치권의 무관심이 지속될 경우 자칫하면 여순사건은 잊혀진 역사가 될 우려가 크다는 것을 환기시키고 있다.

이 소장은 여순사건이 격동기 통한의 슬픈 역사이지만 지역의 미래를 위해서 언젠가는 매듭지어져야 할 숙제라고 강조한다. 유족들과 지역공동체가 힘을 합쳐 여순사건과 같은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교훈을 찾아내고 내일을 준비하는 전환점으로 삼아야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손양원목사 모습. 손 목사는 ‘사랑의 원자탄’이라 불린다.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여수/백충화 기자 choong@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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