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춘과 송덕봉의 부부 사랑

유희춘과 송덕봉의 부부 사랑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전남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 미암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보물 제260호 <미암일기>는 미암 유희춘(1513∼1577)이 1567년 10월부터 별세하기 이틀 전인 1577년 5월 13일까지 11년에 걸쳐 쓴 일기이다. 현재 남아 있는 일기는 모두 11책으로 일기 10책과 유희춘과 부인 송덕봉(1521∼1578)의 시문을 모은 부록 1권으로 되어 있다.

<미암일기>의 내용은 조정의 정치사에서부터 집안의 대소사 및 개인의 신변잡기 등 그야말로 광범위하다. 더구나 정창권이 쓴 책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는 관직생활, 살림살이, 부부 생활과 갈등, 그리고 노후 생활 등을 쉽게 풀어쓰고 있어 조선 중기 가족사와 여성사 연구에 크게 관심을 끌었다.

그러면 미암 유희춘과 부인 송덕봉의 부부생활에 대하여 살펴보자.

1547년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 간 미암 유희춘은 그곳에서 18년간 유배를 살다가 충청도 보은으로 이배되어 다시 2년간 유배를 살았다. 선조가 즉위한 1567년 10월에 유희춘은 홍문관 교리로 복직했다. 그는 가족도 못 만나고 서울에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1년 뒤인 1568년 9월에 부인 송덕봉은 딸과 사위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와 1569년 9월 하순까지 1년간 살림을 했다.

1569년 8월 26일에 유희춘은 우부승지로 영전했다. 이 날부터 그는 계속하여 승정원에서 숙직하였다. 그런데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서 송덕봉은 옷과 이불을 챙겨서 미암 유희춘에게 보냈다.

이에 감복한 미암 유희춘은 송덕봉에게 술 한 동이와 시 한수를 보냈다.

모주(母酒) 한 동이를 집으로 보내며, 아내에게 /눈은 내리고 바람 더욱 차가운데(雪下風增冷) /추운 방에 앉아 있을 당신을 생각하오(思君坐冷房 ) /이 술 비록 하품이기는 하나(此酒雖品下) /언 창자 따뜻하게 해줄 수는 있으리(亦足煖寒腸).

궁중 술을 가족과 함께 마신 송덕봉은 9월 2일에 미암에게 화답시를 보냈다. 압운은 2구의 방(房)과 4구의 장(腸)이다.

국화잎에 비록 눈발은 날리오나 (菊葉雖飛雪) /은대(승정원을 말함)는 따뜻한 방이 있겠지요(銀臺有煖房 ) /차가운 방에서 따뜻한 술을 받아(寒堂溫酒受) /언 창자 채우니 매우 감사합니다(多謝感充腸).

이렇듯 송덕봉은 유희춘과 시를 주고받으며 부부애를 과시했다. 며칠간 숙직하고 비로소 집에 온 미암은 덕봉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그는 이 날 일기에 ‘부인과 6일간 떨어졌다가 만나니 너무 반가웠다’고 썼다.(1569년 9월 2일자 미암일기)

한편 1569년 9월 하순에 미암은 장기 휴가를 얻어 담양으로 내려간다. 그런데 11월 6일에 유희춘은 홍문관 부제학으로 발령을 받아 다시 서울에서 홀로 관직생활을 한다. 1570년 4월 어느 날 미암 유희춘은 밤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라는 내용의 시를 지어 약간의 물품과 함께 담양에 있는 부인 덕봉에게 보냈다. 비록 예순이 가까워지는 나이이지만 홀로 있으니 부인이 더욱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자 4월 26일에 송덕봉이 화답 시를 보내왔다. /스스로 원결마냥 물욕이 없다 하더니 /어찌하여 오경까지 잠 못 이루시나요 /옥당(홍문관)의 금마(金馬 관직)가 비록 즐겁다지만 /추풍(秋風)에 마음대로 돌아오는 것만 하겠소.

원결(719∼772)은 중국 당나라의 시인이다. 인격이 고결하고 고통 당한 민중을 위해 시를 많이 지었다. 그리하여 백거이(772∼846) 등 후세의 시인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 시에서 송덕봉은 원결처럼 물욕이 없다고 자처했으면서 어찌하여 밤늦도록 잠 못 이루고 뒤척거리느냐고 미암에게 되묻고 있다. 그러면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오라고 은근히 권유한다.

송덕봉은 허난설헌(1563∼1589)보다 40년 먼저 태어난 여류문인이다. 그녀는 시집 <덕봉집>이 있을 정도로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두루 섭렵한 여성 선비(女士)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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