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들어 있는 이야기

잠들어 있는 이야기

<최유정 동화작가>
 

일복이 터졌다. 여러 출판사에서 의뢰가 들어오고 공동 작업을 계획했던 글들도 끝을 봐야 할 시점에 이른 것이다. 분주한 마음 때문일까? 더 안 써지고 더 안 굴러가는 진퇴양난에 빠지고 말았다. 난처하고 곤궁스럽기 그지없다.

우선 발등에 떨어진 불은 내년 1월까지 넘겨야 하는 문화유산에 관한 기획 원고다. 많은 문화유산 중 꼭 써야 하고 꼭 쓰고 싶은 소재를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자료조사차 사다 나른 책들이 수북하게 쌓여 갈 즈음, 귀한 소재를 만났다. ‘백제금동대항로’가 다시 내게 찾아 온 것이다.

553년, 신라는 120년 동안 지속되어 온 동맹을 깨고 백제를 공격했다. 신라의 배신으로 한강 하류를 빼앗긴 백제. 격분을 한 백제 왕자 ‘창’은 전쟁을 감행한다. 왕자 ‘창’의 기습전은 성공적인 듯, 싶었다. 그러나 신라의 원군이 도착하면서 상황은 역전된다.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고 이 과정에서 왕자 ‘창’을 격려하기 위해 50명의 기동대를 이끌고 관산성으로 오던 성왕이 신라의 매복에 죽임을 당하게 된다. 왕자 ‘창’은 세월이 흘러 아버지 성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백제금동대향로’를 만든다. 백제금동대항로는 국보 제287호로 1994년, 부여 능산리 고분군 사이 절터 구덩이에서 450여 점의 유물들과 함께 발견되었다.

암기하고 있는 연대기에 한 줄을 보태고 싶어 역사를 나열한 것이 아니다. 백제금동대향로를 처음 봤을 때의 느낌을 공유하고 싶기 때문인데, 백제금동대향로와의 첫 만남은 필자에겐 그야말로 흥분 그 자체였다.

백제금동대향로를 처음 본 필자는 향로의 화려함과 정교함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날 이후 계속 몇 가지 생각을 곱씹게 되었다. 왜 나는 백제 땅에 살고 있으면서도 백제의 역사를 알지 못하는가? 다보탑과 석가탑은 알고 있으면서 백제금동대향로에 대해선 왜 아직까지도 알지 못 했는가? 필자는 부끄러웠다. 고백하건대 필자는 그 날을 계기로 내가 살고 있는 땅, 백제와 전라도에 관해 구체적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내년 초에 나올 장편 동화 <녹두꽃 바람 불 적에>는 이런 관심에서, 부끄러운 마음에서 쓰게 된 동학에 관련된 작품이다.

사실 관심을 갖지 못했던 것이 내 잘못만은 아니다. 누군가 그것을 일부러 덮고 묻어놓은 까닭이 더 클 테니까 말이다. 덮고 묻어 놓으면 들여다 볼 수 없으니 사실 관계를 떠나 아무 이야기나 막 지어내도 된다. 의도한 대로 사실을 왜곡하고 비틀어도 상관없게 되는 것이다. 진실을 덮고 사실을 가리려는 나쁜 의도. 어쩌면 우리에겐 숨을 쉬는 능력만큼이나 나쁜 의도를 꿰뚫어 보는 능력이 필요한지 모른다. 그래야 꼭두각시가 되지 않을 수 있고 그들이 의도한 대로 진행되는 온갖 역주행을 막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80년 5·18에 관한 증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유골이 암매장 된 장소를 파헤치는 작업도 연일 벌어지고 있다. 유골을 왜 파내느냐, 유골을 파낸들 역사가 바뀌느냐? 왜 나라를 들쑤셔 시끄럽게 만드느냐? 핀잔하고 힐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문재인 정부가 벌이고 있는 적폐청산에 관해서도 비슷한 비난을 쏟아낸다. 참, 가슴 답답해지는 장면들이다. 그런데 며칠 전 답답한 가슴이 뻥 뚫렸다. 방송을 통해 들은 문재인 대통령의 일갈 때문인데, 대통령은 적폐청산은 편 가르기가 아니며 전임 정부를 사정하거나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라고 밝혔다. 적폐청산은 오래된 폐단을 씻어내고 정치를 바르게 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밝히며 이 과정을 통해 대한민국이 나라다운 나라로 만들어질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하고자 하는 말을 이토록 쉽고 적확하게 하다니! 매번의 연설에서 느끼는 통쾌함과 후련함이 필자를 다시 한 번 더 감동시켰다.

그렇다. 모든 문제엔 원인이 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원인을 파악해야 하고 원인에 대한 정확한 처방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원인을 파악하지 못 하면 병을 고칠 수 없고 뿌리 깊은 병을 얻은 나무에게서는 제대로 된 열매를 절대 얻어 낼 수 없는 것이다. 허리가 휘어 제대로 걷지 못하는 사람에겐 걸음마를 가르칠 것이 아니라 척추를 바로 세워주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 잘못 된 것은 바로 잡아야 한다. 덮이고 묻힌 진실은 반드시 밝혀야 한다. 왜곡된 사실은 반드시 꼭, 바로 잡아야 한다. 어쩌면 모두가 인간답게 사는 길, 우리나라가 똑바로 서서 걸어가는 길은 왜곡된 것을 바로잡는 일들에서 출발했어야 한다. 지금 하고 있는 적폐청산과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 등은 이미, 벌써 했어야 될 일인 것이다. 적어도 필자 생각엔 그렇다.

‘백제금동대향로’와 ‘5·18’, ‘적폐청산’까지 너무 많은 이야기를 싸잡아 했다. 욕심이 과했고 억지스러운 점 또한 있다. 인정하겠다. 하지만 ‘백제금동대향로’를 다음 작업의 주인공으로 정하는 과정이 필자에겐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과정이었다. 또한 자가 동력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기도 했다. 부디 필자의 마음과 몸을 통해 좋은 글이 태어나길 바란다. 필자의 글을 통해 ‘백제금동대향로’가 그 영롱한 빛을 세상에 뿜어낼 수 있길 바란다. 많은 아이들이 필자의 글을 통해 수백 년 동안 잠들어 있던 백제와 다시 만날 수 있길 바란다. 꿈이 현실을 통해 이뤄짐을 믿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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