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독립 위해 평생 바친 남편과 죽음으로 그 뜻 따른 아내

최혁 주필의 전라도 역사이야기
17. 일강(一江) 김철(金澈)선생과 단심송(丹心松)
조선독립 위해 평생 바친 남편과 죽음으로 그 뜻 따른 아내
김철 선생, 일본 유학 후 전 재산 팔아 상해망명 독립운동 헌신
김정자 여사, 남편 보호하고 정조 지키기 위해 스스로 생 마감
함평군 신광면에 기념관과 본뜬 상해임정건물, 순절소나무 위치
 

일강 김철 선생 동상. 뒤의 건물이 중국에서 각종 건축자재들 들여와 상해임시정부 건물와 똑같이 만든 건물이다.

함평에서 태어난 일강 김철 선생은 일본 메이지대학을 졸업한 후 고향에 돌아와 일제의 탄압에 시달리는 조국의 비참한 현실을 목도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선생은 아내를 뒤로 하고 상해로 망명한다. 아내 김정자 여사는 남편의 독립운동에 자신이 장애물이 될까봐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함평 신광면 함정리에는 여사가 남편의 안녕을 염원하고 정조를 지키려다 숨진 단심송(순절소나무)이 있다. 또 상해임시정부청사를 그대로 재연한 건물도 있다. 우리가 꼭 들려서 선생부부의 조국애를 살피고 기려야할 곳이다.
 

일강 김철 선생
구봉마을 김철기념관 앞뜰에 높게 걸려 있는 태극기

■어떤 사나이의 삶

‘사나이’는 구한말 함평(영광)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다. 경성법률전수학교와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해서는 집안의 머슴들에게 땅을 나눠준 뒤 밖에 나가 살도록 했다. 일제는 그를 회유했다. 수없이 찾아와 협력하라고 협박했다.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고민 끝에 상해로 망명해 조선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사나이는 1917년 몰래 국내로 들어와 3·1운동 거사를 준비했다. 그런 뒤 전 재산을 팔아 상해로 다시 건너갔다. 가져간 재산은 상해임정의 독립운동자금으로 사용했다. 사나이는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전라도 대표와 교통부총장대리 등 주요 요직을 맡았다. 그의 목표는 조선독립이었다. 그는 젊음과 정열을 바쳐 조선독립투쟁에 매진했다.

그는 1932년 상해임시정부 군무장(지금의 국방부장관)으로 있을 때 김구선생과 함께 윤봉길, 이봉창 의사의 폭탄의거를 주도했다. 일제는 윤봉길의사의 상하이 홍커우(虹口) 공원 폭탄의거 이후 상해임정수반들을 붙잡기 위해 혈안이 됐다. 일제는 포위망을 좁혀왔다. 어쩔 수 없이 임시정부 수반들은 항저우로 임시정부를 옮겼다.

항저우에서의 임시정부 살림살이는 어려웠다. 사나이가 함평 집과 전답 등 전 재산을 팔아 마련해온 독립운동자금도 다 바닥이 나버렸다. 과로로 몸이 약해졌다. 먹을 것도 시원치 않았다. 피로와 영영실조로 몸이 약해졌다. 어느 날, 급성폐렴에 걸렸다. 몸이 견뎌 내지를 못했다. 사나이는 결국 숨졌다. 사나이가 숨진 뒤 11년 뒤 그토록 염원하던 조국광복이 이뤄졌다.

사나이는 중국 저장 성 후산탕의 기독교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의 묘소는 잊혀졌다. 그의 묘소를 찾을 길이 없었다. 나주의 한 뜻있는 향토사학자가 1993년 저장성을 방문, 후산탕 공동묘지 근처에서 흙 한줌을 가져왔다. 후손들은 함평 구봉산 기슭에 그의 묘소를 마련했다. 사나이는 그토록 그가 염원했던 광복조선의 땅에 묻혀 이 강산을 지키고 있다.

■어떤 여인의 삶

여인은 훤칠한 키와 수려한 용모를 지닌 한 사나이의 아내가 됐다. 사나이는 많이 배운 지식인이었다. 재산도 많고 학식도 뛰어나지만 사나이는 교만하지 않았다. 항상 겸손했다. 그리고 처지가 어려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나이이기도 했다. 여인은 그런 남편을 존경했다. 그리고 너무도 사랑했다.

여인 역시 아름다웠다. 눈이 부셨다고 한다. 사람들은 여인을 보면 절로 탄성을 질렀다. 첫눈에 흠모의 정이 생겼다고 한다. 사나이는 일본에서 공부를 마친 뒤 이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였지만, 그들의 결혼생활은 길지 않았다. 사나이가 조국독립운동을 위해 상해로 건너갈 것을 결심했기 때문이다. 남편을 떠나보내야 하는 여인은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여인은 지아비가 중국으로 가도록 했다. 사나이 대장부가 조국광복이라는 큰 뜻을 품은 이상 그 뜻을 펼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자가 종적을 감추자 일제 헌병들이 집에 찾아와 득달했다. 일제는 그 남자가 독립운동에 뛰어든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일제 헌병들은 남자를 잡으려고 집 주변에 숨어 감시했다.

일제 헌병들은 간교했다. 또 잔악했다. 물고를 내겠다고 협박하면서 남편의 행방을 대라고 윽박지르기 일쑤였다. 음흉한 시선으로 여인을 바라보던 헌병은 한밤중에 찾아와 치근덕대기도 했다. 어느 순간 ‘혹시 나 때문에 남편이 잡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몸이 더렵혀질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들었다.

사랑하는 남편이 나를 만나러 왔다가 일제헌병들에게 붙잡히는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될 일이었다. 여인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제 헌병이 몸을 탐하려고 덤벼들었다.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다. 그렇지만 공포가 밀려왔다. 그 헌병은 욕심을 채우기 위해 계속 그런 일을 벌일 것이었다.

여인은 “내가 없으면 남편이 상해에서 몰래 들어와 집을 찾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자신이 없어지면 그럴 위험은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남편에게만 몸을 허락하는 여인으로 남고 싶었다. 여인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집 뒤에 있는 소나무로 향했다. 그날, 여인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일강 김철 선생의 조선에서의 삶
 

구봉마을 안내판. 마을 뒤로 아홉 개의 봉우리(九峰)가 펼쳐져 있다. 마을이름도 그래서 구봉이다.
상해임시정부건물및 김철선생기념관 안내판

앞에 적은 ‘그 사나이’는 일강(一江) 김철(金澈)선생이다. 김철 선생은 1886년 10월 15일 전남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609번지(九峰마을)에서 부친 김동진(金東鎭)과 모친 전주이씨 사이에서 4남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는 영광군 묘량면에 있는 외가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1908년 영광 광흥(光興)학교에서 중학과정을 이수했다. 김철선생의 애국심과 자주 조선에 대한 염원은 광흥학교에서 형성됐다. 광흥학교는 조승찬과 편용무 등 지역 유지들이 뜻을 모아 향교의 세운 사학이다. 경술국치 후 한일합방 반대를 외치며 시위를 계속하다가 결국 일제에 의해 폐교 조치됐다.

이후 선생은 1912년 서울에서 경성법률전수학교를 졸업했다. 그 뒤 일본으로 유학, 1915년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했다. 조선으로 돌아온 선생은 소작인들에게 논과 밭의 일부를 나눠주고 집에 딸린 종들을 자유로운 몸으로 풀어주었다.

이때 선생은 김정자(일명 사천댁)라는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김철·김정자 신혼부부의 달콤한 신혼생활은 아주 짧았다. 일제의 회유와 협박에 시달리던 김철 선생이 중국 상해로 망명을 결심했기 때문이다.

■ 김철 선생의 부인 김정자 여사와 단심송(丹心松)

김철 선생은 조선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떠나가면서 사랑하는 아내에게 이런 편지를 남겼다고 한다.

“나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이 한 몸을 기꺼이 조국에 바쳤으니 더 이상 찾지도 기다리지도 말고 부인께서는 앞날을 알아서 처신하시오”

김철 선생이 조선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떠났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 일제 헌병들은 김철 선생의 부인에 대한 감시를 철저히 했다. 혹시라도 밤중에 김철 선생이 집에 들르거나 혹은 다른 사람을 통해 편지를 보내올지 모른다며 집 주변에 헌병을 배치하고 감시의 눈초리를 번득였다.

그러던 중 일제 헌병들이 부인의 미모에 혹해 괴롭히기 시작했다. 김철선생을 감시한다는 명분 하에 김정자여사를 찾아와 귀찮게 굴기 시작했다. 김정자 여사는 자신이 욕을 당하면 그것은 남편을 욕보이는 일이라 생각했다.

또 혹시라도 남편이 자신을 보러 찾아왔다가 일제에 붙잡히는 일이 벌어지면 이는 천추의 한이 될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남편이 가족 걱정 없이 오로지 독립운동에 전념토록 하려면 내가 죽는 길 밖에 없다’고 마음을 먹었다.

김정자 여사는 구봉마을 집 뒤에 있는 소나무에서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남편이 가족걱정을 벗어버리고 큰일을 이루게 하려는 살신성인의 정신이었다. 또 지아비에 대한 정조를 지 키려는 여인의 곧은 마음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김철 선생의 부인 김정자 여사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소나무. 단심송이라 부른다
김철 선생의 묘소. 왼쪽 소나무가 단심송이다

후손들은 김정자 여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 소나무를 단심송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단심송의 수령은 250여 년 정도로 추정된다. 일명 ‘순절 소나무’라고도 하는데 높이는 13m, 둘레는 1.5m이다. 단심송은 함평 일강 김철선생 기념관 뒤쪽에 자리하고 있다. 국가보훈처가 지정한 현충시설 중 하나이다.

단심송은 구봉마을 뒤쪽의 아홉 개 봉우리를 뒤로 하고 서 있다. 아홉 개 봉우리마다 김 여사의 한과 눈물이 서려 있는 듯싶다. 고인은 아마도 당신의 마지막 날, 그 구봉의 아슴푸레한 모습을 눈에 담으며 소나무에 올라섰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가을 하늘 아래의 단심송은 유난히 푸르렀다. 나라와 남편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배어있는 곳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단심송 아래에서 우리는 남편의 안전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한 한 여인의 숭고한 정신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할 ‘나라사랑 소나무’다.

■ 상해임시정부와 김철 선생

1917년 2월 중국 상해로 망명해온 김철 선생은 1918년 8월 20일 중여운형,장덕수,조동호,선우혁,한진교 등과 함께 발기인이 돼 신한청년당을 창당했다. 신한청년당 부주무로서 기관지<신한청년>을 발간, 독립정신을 고취했다. 선생은 대한적십자회의 상의원도 역임했다.

1919년 선생은 여운형과 협의한 끝에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해 조선독립을 호소토록 했다. 선생은 서병호, 선우혁과 같이 같은 해 1월 조선에 몰래 들어와 함평(영광)의 전답을 정리해 독립운동자금으로 쓸 1만원을 마련했다.
 

제6차 대한민국임시정부국무원 회의폐회 후 새로 성립된 국무원 요인의 기념촬영. 뒤쪽 맨 좌측이 김철 선생이다.

중국으로 다시 돌아가기 전, 선생은 2월에 서울에서 손병희 선생을 만나 3만원의 독립자금 지원을 약속하는 한편 3?1만세운동 거사를 계획했다. 3·1운동 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1919년 4월 10일 의정원의원(전라도 대표)에 선임됐다. 곧 이어 임시정부 재무위원 겸 법무위원이 됐다.

김철선생은 지극한 동포애와 열정적인 조국애로 독립운동을 펼쳤다. 선생이 1920년 1월 10일 독립신문에 기고한 ‘신년의 감상’이라는 글을 보면 선생이 얼마나 겸손한 마음으로 동지들을 대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섬겼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작년을 돌아보면 감개무량하오. 나도 비재(非才)로 최초부터 제형배동지(諸兄輩同志)로 더불어 독립운동의 획책의 말석에 참여하는 영광을 득(得)하였거니와 과거 우리 동포의 충성되고 용감한 활동은 더 감사할 말이 없소.

다행히 우리 동포의 애국심과 단결력은 더욱 치열하고 임시정부의 기초와 각원(閣員) 화합도 더욱 공고하며 대정(大政)의 방침도 연말까지에 확립하였으니, 금년부터는 전년에 배사 대 활동이 있을 줄 믿소.

그러나 정부만으로 어찌하오. 내외의 각 단체와 국민이 일심일체가 되어 일일(一日)도 바라는 대사업을 성취하기에 육력(戮力)하기를 바라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총장 대리 김철’

김철선생은 1924년 5월에는 임시정부 국무원 회계검사원 검사장에, 1926년 12월에는 김구(국무령)내각 국무위원에, 1927년 8월 이동녕 내각에서는 군무부장에 각각 임명됐다. 1931년 11월에는 한·중항일대동맹을 조직, 조소앙과 중국인 오징천, 서천방 등과 함께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특히 1932년 군무장으로 있을 때는 김구선생과 함께 윤봉길, 이봉창 폭탄의거를 주도했다. 김철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무장활동을 관장하면서 김구선생이 조직한 한인애국단에 가입해 활동을 지원했다.

김철선생은 국무위원으로 국무회의에 참석해 김구의 한인애국단 조직과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사전에 승인해 실행에 옮기도록 도왔다. 한인애국단은 1932년 1월 이봉창의사가 일본 도쿄(東京)에서 일왕에게 폭탄투척을 감행토록 했다.

또 그해 4월에는 윤봉길의사가 상해 홍커우공원(虹口公園)에서 일본 상해 주둔군 사령관 등을 폭사시키는 의거를 감행토록 뒤에서 도왔다. 또한 최흥식·이덕주·유상근 등 한인애국단원의 일본 관동군사령관과 조선총독 암살미수사건들을 일으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김구·김철 선생이 이끄는 임시정부와 한인애국단의 무장독립운동은 침체에 빠져있던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김철 선생은 윤봉길의사의 상해 홍커우 공원 폭탄의거 후 일제경찰이 포위망을 좁혀오자 김구·엄항섭·안공근과 같이 미국인 피치부인 집에 숨어 있다가 항저우로 피신했다.

김철 선생은 자신의 숙소인 항저우 시 소재 청태제2여사(淸泰第二旅社)에 대한민국 임시정부판공처를 설치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업무를 재개했다. 이런 김철 선생의 활동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존폐의 위기에서 벗어나 그 법통을 이어갈 수 있었다.

김철선생은 1933년 7월 임시의정원의원에 선임돼 활동했다. 1934년 다시 국무위원에 선임돼 재무장(財務長)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비서장(國務院秘書長)에 선출돼 활동했다. 또 임시정부의 여당인 한국독립당의 이사로 선출돼 일을 봤다.

그러던 중 선생은 영양실조와 과로가 겹쳐 쓰러지고 만다. 급성폐렴이었다. 동지들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1934년 6월 29일 4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만다. 항저우에 온지 2년만이었다. 운명 직전 선생은 생활고와 격무에 시달렸다. 조선에서 가져온 거금은 모두 독립운동에 써버리고 겨우 끼니를 때울 정도로 곤란하게 살았다.

김구선생이 남긴 백범일지에는 임시정부 요인들이 얼마나 곤궁하게 살았는지를 헤아릴 수 있는 대목들이 있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중국인 하층 노동자보다도 못한 생활을 하는 등 그 비참함은 말로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러한 생활의 곤궁에 굴하지 않고 가정을 꾸리며 학교를 세워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등 조국 독립의 꿈을 키웠고 임시정부를 지켜나갔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정부의 명의조차 유지할 길이 막연하였다. 잠은 정청(政廳:임시정부 청사)에서 자고 식사는 직업을 가진 동포들의 집에 다니며 걸식하고 지내니 거지는 상등 거지였다.”

김철선생의 장례는 대한민국임시정부장으로 치러졌다. 그러나 그의 육신은 고향땅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광복이 됐지만 그가 묻힌 묘지 일대가 개발되면서 그의 유해가 공사와중에 휩쓸려 사라져 버렸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평생을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한 김철 선생에게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저우 구지(舊址·옛터)기념관과 김철 선생의 묘

중국 항저우 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들어서 있었던 곳이 매우 중요한 사적지라는 판단에 따라 지난 2002년 복원작업에 착수했다. 설계는 저장대학교(浙江大學校) 건축설계원이 맡았다.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끝낸 후에는 저장대학교 한국연구소에서 자료를 모아 기념관을 조성했다.

이 기념관에는 상해 소재 대한민국 임시정부(1919~1932년)와 항저우 임시정부(1932∼1937년)를 시기별로 구분한 뒤 김구선생과 임정요원들의 활동상에 관한 자료가 전시돼 있다. 이 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김철 선생과 관련된 기록은 다음과 같다.

‘1934년 6월 29일, 한국독립당 이사이자 임시정부 국무위원인 김철선생이 항저우 신민로 광지병원(廣濟病院·광제병원)에서 급성 폐렴으로 순국하였다. 광지병원은 현재 제팡로(解放路·해방로)에 위치하고 있는 저장성 제2인민병원이다.

7월 2일 광지병원에 빈소를 차리고 항저우 법원로 후산탕(湖山堂·호산당·예수교회)에서 추도회를 거행 후, 악비묘(岳飛廟) 뒷산 뒤편의 리둥산루에 있는 후산탕 공동묘지(개신교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

악비묘 뒤편 리둥산루에 있었던 김철선생의 묘는 1978년경 아파트 건립을 위해 공동묘지가 없애는 과정에서 소실돼 버렸다. 1993년 나주의 향토사학자 나천수(羅千洙)선생이 저장성을 방문, 김철 선생 혼령을 위한 초혼제를 지낸 뒤 후산탕 인근 공동묘지에서 흙 한줌을 가져와 구봉산 기슭에 봉분이 없는 평묘를 썼다.

■ 함평에 있는 김철기념관과 상해임시정부청사
 

일강김철선생기념관 전경
김철기념관

함평군과 영광군, 그리고 후손들은 김철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1975년 8월 함평군과 영광군의 경계에 숭모비를 세웠다. 또 1984년 6월, 서거 50주년을 맞이하여 신광면 구봉산 기슭에 기념비를 건립했다. 2003년 6월 29일에는 일강 김철기념관이 준공됐다.

함평에는 상해임시정부청사가 있다. “무슨소리?”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진짜다. 다만 상해에 있는 상해임시정부청사를 그대로 본 따 만든 것이다. 모든 것이 실물과 같다. 건물 크기에서부터 내부구조, 책상·침대 등 소품까지 똑같이 만들었다.

함평군은 지난 2008년 사업비 22억원을 들여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605-1번지(구봉마을) 일대에 건물 평수가 140여 평에 달하는 상해임시정부청사를 지었다. 상해임시정부의 국무원을 역임한 일강 김철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외국주재 대한민국 임시청사를 재현해 교육의 장으로 활용키 위해서였다.
 

함평에 세워진 임시정부청사 내부 모습. 상하이 임정건물 내부를 그대로 재현했다. 집기들도 모두 중국 현지에서 제작됐다.

이 건물은 외양과 크기가 상해 청사와 똑같다. 각종 가구와 소품은 중국 현지에서 제작해왔다. 현장성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함평의 임시정부청사에는 기념관이 들어서있다. 1전시실은 1920년대 상해임정 3층을 재현한 곳이다. 3전시실은 상해임정 1층 모습이다. 2전시실에는 일제의 만행과 고문시설, 장면이 전시돼 있다.

김철기념관과 상해임시정부청사는 김철선생의 양손자인 김만선(金萬善)씨가 관리하고 있다. 김철 선생은 후사가 없었다. 선생은 첫 번째 부인 김정자 여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 혼자 살다가 중국에서 최혜순(崔惠淳)여사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미경, 혜경씨 등 딸만 둘을 두었다.

최혜순 여사는 전남도립병원 간호사출신으로 상해에서 산파 일을 하며 독립자금을 마련해 남편의 독립운동을 도왔다. 최혜순 여사의 장녀 미경씨는(LA거주)가 1997년 나천수선생의 도움을 받아 저장성을 방문, 아버지 김철 선생이 과거 묻혀 있던 곳을 둘러보기도 했다. 신광면 구봉산에 있는 김철 선생 묘소에는 선생과 첫 번째 부인 김정자 여사, 최혜순 여사가 합장돼 있다.
 

함평 구봉마을 기념관에 있는 김철선생의 묘. 김정자, 최혜순 여사가 함께 합장돼 있다.

■김철선생의 뜻을 기리는데 정성을 다하고 있는 함평군과 영광군
 

함평과 영광군 경계에 있는 김철 선생 숭모비. 서 있는 이는 김철기념관을 관리하고 있는 양손자 김만선씨이다.

전남 함평군과 영광군, 두 군은 힘을 모아 정성껏 김철선생의 뜻을 기리고 있다. 김철 선생은 함평과 영광 두 곳 모두에 연고가 있다. 김철선생의 출생지인 현재의 주소지 전남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609번지는 과거 영광 땅이었다. 영광 불갑사 입구에도 선생의 숭모비가 서 있다.

그런 연고로 함평과 영광 경계의 땅에 ‘독립운동가 일강 김철선생 숭모비’가 세워져 있다. 영산 김씨 종중은 함평, 영광 두 군(郡)의 도움을 받아 1975년 8월 김철선생 숭모비를 세웠다.

숭모비로 오르는 계단 좌우에는 김철선생 숭모비라는 글이 두 바위에 새겨져 있다. 정성을 다해 선생을 기리고 있으나 숭모비가 세워져 있는 일대는 세월이 많이 흐른 탓에 계단이 바스러지고 시설물이 낡은 상태다. 다행스럽게도 내년에 영광군이 예산을 마련해 대대적인 보수작업에 들어갈 예정이다.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함평/이경신 기자 lks@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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