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 진도에서 새로운 고려를 꿈꾸다

 

 

 

최혁 주필의 전라도 역사이야기
18. 삼별초와 진도 용장산성
삼별초, 진도에서 새로운 고려를 꿈꾸다
고려조정 몽골 굴복 후 개경환도 결정하자 삼별초 봉기
배중손 수만 명 무리 이끌고 용장산성에 抗蒙기지 마련
전라·경상도 일대 공격 세력 넓히다 麗蒙연합군에 진압돼
김통정 등 제주도 피신 끝까지 항거하다 3년 만에 전멸

북쪽에서 바라본 왕궁지와 용장산성 남벽

■세계를 제패한 원 제국, 고려를 침략하다

서기 1200년대 초 중앙아시아 대륙에서 강력한 세력이 일어났다. 테무진(Temujin: 鐵木眞)은 몽골족을 통일한 뒤 1206년 칭기즈칸(成吉思汗: Chinghis Khan)이라 칭하고 원(元) 나라를 세웠다. 칭기즈칸은 중앙아시아 대륙을 통일하고 중국대륙의 금(金)나라까지 멸망시켰다.

칭기즈칸과 그 후예들은 지금의 남부러시아와 아라비아, 유럽 이탈리아반도 북부까지 정복했다. 아시아와 유럽이 유목민인 몽골족의 말발굽 아래 짓밟혔다. 몽골족은 강인했다. 칭기즈칸은 뛰어난 전술과 기동력으로 카스피해 연안과 남유럽 일대의 각국을 격파했다.

몽골군은 적이 항복하면 관용을 베풀었다. 정치체제와 종교, 문화를 그대로 유지토록 했다. 젊은 남자들만 군사로 차출해 전쟁터로 끌고 갔다. 그러나 저항할 경우 성을 함락한 뒤 철저히 응징했다. 남녀노소는 물론이고 가축까지, 살아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죽였다.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항복해서 살던지, 싸우다가 죽던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고려가 몽골과 맞부딪친 것은 금나라 유민인 거란족이 몽골 군사들에게 쫓겨 고려 땅으로 들어오면서부터이다. 원이 금을 공격할 때 금은 분열했다. 이때 거란족은 대요국(大遼國)을, 금의 요동선무사였던 포선만노(蒲鮮滿奴)는 대진국을 각각 세웠다. 대진은 두만강 유역까지 밀려와 국호를 동진(童眞)이라 개칭했다. 대요국은 여진족을 규합해 재기를 노렸다.

원의 사신들은 오만방자하게 굴면서 고려왕과 신하들을 모욕했다. 원에 대한 반감이 날로 커졌다. 이때 발생한 것이 원나라 사신인 저고여(著古與) 피살사건이다. 1225년(고종 12) 1월 원의 사신 저고여가 국경지대에서 살해된 사건이 발생했다. 원은 이를 고려의 소행이라면서 고려에 책임을 물었다. 고려는 거란족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고려와 원의 관계는 험악해졌다. 고려가 굽히지 않자 마침내 원은 고려침략을 결정하게 된다.
■몽골군, 40년 동안 고려를 유린하다
(전남역사이야기 22회: 의와 용이 가득한 금성산성 편 中 ‘몽골의 침략’인용)
몽골은 1231년 3만의 군사를 동원해 고려를 공격해왔다. 고려의 관군과 의병은 귀주성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워 몽골군에게 승리한다. 그러나 몽골은 전열을 정비한 뒤 귀주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개경을 공략했다.
고려는 수가 많고 싸움에 능한 몽골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몽골군은 강했고 무자비했다. 고려는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고 강화를 맺었다. 그러나 최우는 1232년 강화도로 천도한 뒤 몽골과의 장기전쟁을 준비했고 이는 몽골의 재침략을 불러일으켰다.
최씨 무신정권은 오직 자신들의 안위만을 위해 무리하게 대몽항쟁을 펼쳤다. 최씨 정권이 당시 세계최강국이었던 몽골의 요구를 적당한 선에서 수용하고 몽골과 친선관계를 유지했더라면 고려백성들은 그 처참한 전쟁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최씨 무인정권은 비상식적이고 극단적인 방법으로 몽골을 자극했다.
친선관계를 약속해놓고도 병사들을 동원, 몽골군을 기습해 죽였다. 고려왕이 강화도에서 나갈 테니 몽골 군사를 철수시켜달라고 사정한 뒤 군사가 물러가도 이를 지키지 않았다. 이런 거짓말이 몇 차례나 계속됐다. 몽골은 고려의 이율배반적인 태도에 결국 고려를 다시 침범하게 된다. 몽골은 30년 동안 7차례나 고려에 쳐들어와 무자비한 정벌과 약탈을 벌인다.
최씨 정권은 몽골의 지배를 받게 되면 자신들의 권력이 끝이 난다는 생각에 무리하게 대몽항쟁을 이끌고 갔다. 고려 땅 곳곳이 몽골군에 짓밟히면서 백성들은 아비규환의 삶을 살고 있었지만 자신들은 강화도에 숨어 호화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최항과 최의는 몽골의 화친 제의를 거절하고 계속 몽골을 농락했다. 몽골은 고려조정이 강화도에서 나오고 고려왕이 원나라의 왕에게 인사를 드리면 형제의 나라로 평화롭게 지내겠다고 약속했지만 최씨 무인정권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때문에 몽골의 고려침략은 계속된다. 최항의 계속되는 거짓말에 분노한 원나라는 1254년 6번째 고려 정벌에 나섰다. 차라대(車羅大, 쟈릴타이)를 정동(征東)원수로 삼아 고려로 쳐들어온 몽골군은 전국을 휩쓸고 다니며 살육을 일삼았다.
이때가 몽골군의 침략 중 가장 피해가 컸다. <고려사>에서는 ‘몽골군에 사로잡힌 남녀가 무려 20만6천800여명이요, 살육된 자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으며, 지나가는 주군(州郡)마다 잿더미가 되었으니, 난이 있은 이래 이때처럼 심한 적은 없었다. 사람들의 해골이 들마다 널려 있었다’고 적혀있다.
1255년 1월 최항은 사절을 보내 눈물로 호소한 끝에 원나라의 군대를 철수시키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원나라는 그해 4월 다시 고려를 침공한다. 고려조정은 고종이 강화도에서 나가 원나라 황제에게 인사를 드리겠다고 다시 약속했다. 그러자 쟈릴타이는 압록강 일대로 군사를 물리고 사태를 관망했다. 그렇지만 최항은 이 약속을 끝내 지키지 않았다.
최항에게 또 속은 것을 깨달은 쟈릴타이는 6개월 뒤 다시 군사를 이끌고 고려를 쳐들어오는데 이것이 ‘제7차 몽골침공’이다. 쟈릴타이는 원나라 군사들을 곳곳에 배치해 실질적으로 고려를 지배했다. 쟈릴타이는 1년 2개월 동안 고려에 머물면서 군사들과 함께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반원(反元)세력들을 제거했다.
■고려의 굴복과 삼별초 항쟁의 시작
7차에 걸친 원의 침입은 고려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다. 원은 고려왕이 강화도에서 나오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고려는 원나라 군사가 철수해야 고려왕의 입조ㆍ출륙(出陸)이 가능하다고 버텼다. 그 배후에는 어떻게든 정권을 유지하려는 최씨 무인정권이 있었다. 최씨 무인정권은 고려가 원과 강화(講和)하게 되면 자신들이 몰락할 것을 두려워해 어떻게든 강화도에 머물려 했다.
1258년(고종 45) 최씨 정권의 마지막 집권자인 최의가 김준(金俊)에게 피살됐다. 고려조정은 원과 화친해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1259년 고종이 죽자 태자가 왕위에 올라 원종(元宗)이 됐다. 원종은 청의 압력으로 연경(燕京)에 들어갔다가 1270년(원종 11)에 귀국해 개경환도를 결정하게 된다. 1232년 강화도로 들어간 뒤 38년 만이었다.
원종은 개경환도를 선포한 뒤 삼별초를 해산시켰다. 삼별초(三別抄)는 좌별초(左別抄)·우별초(右別抄)·신의군(神義軍)을 말한다. 좌별·우별초의 전신은 야별초(夜別抄)다. 최씨 정권의 최우(崔瑀) 집권기에 나라 안에 도둑이 많아지자 이를 단속키 위해 힘세고 날랜 군사들을 모아 야별초라는 사병(私兵)을 만들었다. 그 군사의 수가 많아지자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뉜 것이다. 신의군은 몽골군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귀환해온 자들로 구성된 부대로 당시의 최고 정예 군사였다.
원종은 1270년 5월 29일 장군 김지저를 보내 삼별초의 명부를 압수한 뒤 삼별초 해산을 공식 통보했다. 삼별초는 친원(親元) 쪽으로 돌아선 대신들이 삼별초의 신상을 몽골군에 모두 넘기면 이는 곧 앉아서 죽음을 당하는 것이라 여기고 분개했다. 그리고 봉기했다. 삼별초를 이끌고 봉기를 일으킨 사람은 배중손(裵仲孫)이었다.
6월 1일 삼별초는 ‘몽골군이 몰려와 백성을 살육하니 무릇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이는 격구장으로 모여라’라는 방을 붙이고 난을 일으켰다. 배중손은 야별초 지유(지휘관) 노영희와 함께 승화후(承化候) 온(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대장군 유존혁과 상서좌승 이신손을 좌우승선으로 삼아 나름대로 조정의 체계를 갖췄다.
삼별초는 난을 일으킨 지 이틀 뒤인 6월 3일, 강화도를 급히 빠져나왔다. 조정의 군대가 대부분 개경으로 가버린 탓에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강화도를 지키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삼별초 무리가 탄 배는 모두 1천척에 달했다. 이 배에는 삼별초 군사들도 있었지만 대신들의 재산을 지키고 있다가 신분탈출의 꿈을 안고 삼별초를 뒤따른 노비들도 상당수 있었다.
또 대신들의 처와 딸들도 있었다. 당시 강화도에 있던 조정대신들은 원에서 돌아온 고종을 마중하러 모두 개경으로 나가 있었는데 그 처와 딸들 대부분은 강화에 남아있었다. 삼별초는 대신들의 처와 딸들을 강제로 배에 태워 데려갔다. 삼별초 군사와 삼별초를 따르는 백성, 노비, 대신들의 아내와 딸들이 배를 타고 남쪽으로 향했다.

■진도를 거점으로 삼은 삼별초

진도삼별초 관련 유적지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고 강화도를 떠난 삼별초 세력들은 진도를 근거지로 택했다. 강화도를 떠나온 삼별초 세력은 진도에서 활동을 개시했다. 어떤 연구자들은 강화도와 진도 사이의 뱃길 거리를 들어 삼별초가 6월 하순이나 7월 초에 진도에 도착했으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8월 19일 즈음일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삼별초가 진도를 새로운 거점으로 삼은 것은 몇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는 육지와 가까우면서도 유사시에 쉽게 바다로 빠져나갈 수 있어 대몽항쟁에 매우 유리하다는 점이다. 둘째는 진도에는 울돌목이라는 거센 물살이 흐르는 해협이 있어 수전(水戰)에 약한 몽골군이 쉽게 침범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셋째는 진도가 전라·경상의 조운선(漕運船)이 다니는 길목이어서 식량을 쉽게 빼앗을 수 있고 이는 곧 고려조정에 막대한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삼별초는 진도 북동쪽 벽파 진으로 들어와 가까운 산에 성을 쌓았다. 바로 용장산성(龍藏山城)이다. 삼별초는 자신들이 고려의 정당한 왕조를 계승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용장산성에 왕궁을 쌓고 왕실의 위엄을 지켰다. 삼별초는 고려의 개경왕조가 몽골에 굴복했기 때문에 고려왕조의 정통성을 상실했다고 여겼다. 그래서 자신들을 고려의 정통왕조라 주장하면서 일본에도 외교문서를 보냈다.
삼별초가 고려라는 국호를 사용해 1271년 일본에 보낸 외교문서에는 ‘강화로 옮긴지 40여년 만에 오랑캐의 풍습이 싫어 진도로 천도했다’는 내용과 함께 수만 명의 병력을 요청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삼별초는 자신들이 정통왕조라 주장하며 일본과 연합해 몽골군을 격퇴하려는 외교 전략을 구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 관리들은 고려가 보내온 외교문서의 내용이 과거와는 전혀 다른 것이어서 매우 의아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문서를 받은 일본 지방관리들은 과거의 고려국서는 몽골을 칭찬하는 내용이었는데 이번에는 몽골을 비난하면서 함께 몽골을 공격하자는 내용까지 있어 어리둥절해했다. 그들은 고려가 보낸 외교문서 중에서 이해하기 힘든 부분만을 추려 교토조정에 보냈는데 이 문서가 바로 도쿄대학 사료편찬소에서 발견된 <고려첩장불심조조>다.

■삼별초의 세력 확장과 대몽항쟁

삼별초항쟁이동로

진도에 성과 왕궁을 세운 삼별초는 내륙으로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삼별초는 지금의 특수부대 성격이라 전투력이 뛰어났다. 몽골군과의 수많은 전투로 실전경험이 풍부했으며 무엇보다 몽골에 대한 증오심이 컸다. 삼별초 수군도 해전에 능했다. 전투할 때 징과 북을 동원했으며 배에 괴상한 그림을 그려 적의 사기를 죽였다.
바다싸움에 능하고 사기도 높은 삼별초군은 남해안 일대를 공략해가기 시작했다. 삼별초는 1단계로 전라도 연해와 주요 고을을 장악했다. 장흥·보성·나주·전주를 점령해 무기와 곡식을 확보했다. 2단계로 제주도를 수중에 넣었다. 제주도 관군을 물리쳐 제주도를 후방기지로 삼았다. 3단계로 경상도로 진출해 남해를 거점으로 삼아 그 세력권을 마산·김해·동래까지 확대시켰다.
진도에 터를 잡은 삼별초는 1270년 8월 19일 전라도 해안가의 여러 주·군을 점령했다. 9월 2일에는 나주로 진출해 성을 포위하고 군사를 나누어 전주까지 공격했다. 나주를 지키고 있던 전라도토적사 신사전은 삼별초가 공격해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성을 버리고 개경으로 도망쳐버렸다.
전주부사 이빈도 전주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나주부사 박부 역시 허둥대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나주와 전주 백성들은 삼별초에 함께 항복해야 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이때 나주사록을 맡고 있던 상호장 김응덕이 백성들을 설득, 금성산으로 들어가 삼별초의 공격에 대비해 가시울타리를 치고 수성을 준비하기도 했다.
삼별초는 고려조정의 김방경장군과 몽골군 장수 아카이(阿海)이가 이끄는 1천여 명의 여몽연합군이 나주로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나주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11월 3일 이문경 등이 이끄는 삼별초 수군은 제주 명월포에 상륙해 제주 고려군을 송담천에서 격퇴시키고 제주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삼별초가 세력 확장에 성공한 것은 몽골군의 잔혹한 학살과 약탈에 치를 떨던 백성들이 삼별초 세력에 적극 동조했기 때문이다. 1271년 1월에 경상도 밀성(현재의 밀양)에서 방보, 계년, 박평, 박공, 박경순 등이 삼별초 정부를 따르자며 부사를 죽이고 인근의 청도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또 개경의 관노 숭경, 공덕 등 관아노비들이 무리를 모아 몽골의 다루가치(고려를 다스리던 몽골 관리)와 고려인 관리를 죽이고 진도로 투항하고자 하다가 발각되기도 했다. 또 2월 7일에는 착량(손돌목)을 지키던 몽골군이 대부도에서 백성들을 약탈하다가 백성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백성들은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됐다.
■삼별초의 진도 패퇴
1271년 5월 15일, 삼별초 군은 위기를 맞는다. 고려의 김방경장군과 몽골의 홍다구, 힌두등이 이끄는 여몽연합군이 진도를 공격해온 것이다. 400여척의 전선에 타고 온 여몽연합군의 병력은 1만 명이 넘었다. 여몽연합군은 세 방향으로 군사를 움직여 삼별초를 공격했다. <고려사 김방경열전>에는 여몽연합군의 부대편성 및 공격방향이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고려의 김방경, 몽골의 힌두 중군-벽파정 공격
▲영녕공의 아들 희, 옹 및 홍다구 좌군-장항 공격
▲대장군 김석과 만호 고을마 우군-진도 동면 공격
<고려사>에는 삼별초가 벽파정의 중군을 공격하자 좌군의 홍다구가 진도의 삼별초 본진에 ‘불을 질러가며’ 협공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 ‘불을 질러가며’라는 표현은 몽골군이 화약무기를 사용했음을 의미한다. 몽골군은 일본을 침략했을 때 화약무기를 사용했는데 이 화약무기는 삼별초 진압에서도 위력을 발휘한 것으로 추정된다.
삼별초는 병력과 무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전세는 불리해졌다. 결국 용장성이 무너졌다. 배중손은 남도포로 퇴각했다. 김통정은 왕을 호위해 의신포(금갑포)로 후퇴했다. 남도포로 물러선 배중손부대는 여몽연합군의 추격을 받아 전멸된다. 배중손은 남도석성에서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삼별초에 의해 왕으로 추대됐던 승화후 온(溫)역시 홍다구 몽골군에게 사로잡혀 참살됐다. 김통정은 간신히 살아남은 부하들을 추슬러 제주도로 퇴각했다. 여몽연합군은 진도공격에서 남녀 1만여 명을 포로로 사로잡았다. 이 중에는 강화도에서 삼별초를 따라온 백성들뿐만 아니라 진도에서 대대로 살아왔던 백성들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몽골군은 포로로 잡은 진도사람들을 삼별초 무리와 죄 없는 백성으로 구분하지 않고 모두 몽골로 끌고 갔다. 여몽 연합군의 삼별초 섬멸 이후 진도는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이 돼버렸다. 대부분이 죽거나 끌려갔다. 고려조정은 몽골로 끌려간 진도백성들을 돌려보내달라고 몇 차례나 몽골 측에 요구했으나 송환은 잘 이뤄지지 않았다.
삼별초는 비록 무신정권을 지탱해주는 사병이었으나 고려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항쟁한 부대이기도 했다. 삼별초가 세운 고려조정은 몽골에 굴복한 고려조정 대신 세워진 독립(대체)왕조 성격이 강하다. 외세에 맞서 죽음으로 항거했던 삼별초 항쟁은 민족투쟁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고려를 지배해 일본침략의 전진기지로 삼으려는 몽골군의 의도에 따라 삼별초 군은 섬멸되고 만다. 진도에 터를 두었던 독립왕조 성격의 삼별초 정부는 불과 10개월 만에 붕괴되고 만다. 그렇지만 제주도와 남해일대 섬으로 후퇴했던 삼별초군은 전열을 회복해 김통정장군을 중심으로 해 다시 대몽항쟁을 전개한다.

■삼별초의 최후(제주도 항몽항쟁)

제주도 항몽유적지. 토성변 유채밭

제주도로 들어온 김통정은 항파두리에 성을 쌓고 여몽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항파두리성의 내성은 돌로 쌓은 석성(石城)으로 둘레가 700m정도이다. 외성은 언덕과 계곡의 지형을 이용해 토성으로 쌓았다. 둘레가 6Km에 달한다.

제주도 항몽유적지. 토성

지금 제주도 해안 곳곳에 남아있는 돌담은 고려관군이 쌓았던 환해장성이다. 고려관군이 완성하지 못한 것을 삼별초군이 마무리해 여몽연합군 공격을 저지했던 돌담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도에서 기력을 회복한 삼별초는 다시 고려 해안지역을 공격해 식량과 물자를 확보했다. 전라도 일대는 다시 삼별초의 세력권에 들어갔다. 삼별초는 서해안까지 올라와 개경에 위협을 가했다. 충청도와 경기도 일대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그 뒤에는 일본정벌을 위해 전선을 만들고 있는 경상도지역까지 쳐들어가 전선을 불태우기도 했다. 일본정벌용 전선이 삼별초 진압에 나설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여몽연합군은 1274년 4월 28일, 전선 160척과 군사 1만2천명을 동원해 제주도 삼별초 섬멸에 나섰다. 삼별초가 제주도에 들어온 지 3년만이었다.

구시물. 삼별초의 하급장교와 군사들이 주로 이용했다는 샘물.

삼별초는 여몽연합군을 맞아 처절하게 싸웠다. 항파두리성이 함락당하자 삼별초를 이끌던 김통정장군과 휘하 군사들은 한라산 자락의 붉은오름까지 퇴각했다. 그러나 여몽연합군의 추격을 피할 수 없었다. 김통정장군은 이곳에서 마지막까지 싸우다 이미 일이 글러버린 것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장수물. 여몽연합군이 삼별초 최후 보루인 항파두성을 공격할 때 김통정장군이 바위에서 뛰어내리자 바위에 발자국이 패이면서 그곳에서 맑은 샘물이 솟아나게 됐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제주도 삼별초가 섬멸되면서 고려의 대몽항쟁은 사실상 끝이 났다. 강화도에서 진도와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겨가며 4년 동안 몽골에 항쟁했던 삼별초의 최후는 비참했다. 삼별초를 진압한 몽골은 이제 거침이 없었다. 고려를 속국으로 삼아 100년을 지배했다.

항몽순의 비

삼별초는 거대한 제국 원을 맞아 고려인들이 목숨을 걸고 싸운 의로운 투쟁이었다. 원나라를 상대로 해 그렇게 오랫동안 전쟁을 벌이고, 또 임시왕조를 세워가면서까지 투쟁했던 민족은 고려인들이 유일하다.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 거대한 외세에 맞서 40여 년 동안 항쟁했던 삼별초의 대몽항쟁은 우리가 잘 기념하고 간직해야 할 자랑스러운 역사다.
■용장산성(龍欌山城)

용장산성 발굴지역 전경

용장산성은 1964년 6월 10일 사적 제126호로 지정됐다. 산성은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 106번지 일대에 자리하고 있다. 1989년부터 시작된 발굴조사 결과 용장산성의 둘레는 약 13Km로 밝혀졌다. 이 둘레를 기준으로 할 경우 성내면적은 258만평에 이른다. 석축과 토축으로 이루어진 나성(羅城) 형식의 산성이다.
해발 264m의 용장산 좌우의 능선을 따라 약간씩의 석축이 부분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성내에 용장사지(龍藏寺址)와 왕궁지(王宮址)가 남아 있다. 용장산성은 1243년(고종30)에 이미 축조됐으며 고종대(高宗代) 대몽항쟁 과정에서 해도입보처(海島入保處)로 활용된 것으로 조사됐다.
1270년(원종11) 8월 삼별초군이 진도에 들어오면서 내성(內城: 왕궁과 석심 토축의 토루)과 외성(外城: 용장산성)으로 이뤄진 도성체제(都城體制)를 갖추었다. 진도에 도착한 삼별초군은 기존의 사찰건물을 개조 또는 일부 공간의 확장을 통해 왕궁으로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용장산성 행궁터

용장산성의 북벽과 서벽 및 동벽 일부는 바다와 접하고 있으며 나머지 구간은 산 능선을 통과하고 있다. 북쪽은 우리나라에서 유속이 가장 빠른 곳으로 잘 알려져 있는 명량해협과 접해 있다. 용장산성 발굴조사 과정에서 명문기와와 동전 류, 청자유물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
■진압군이었지만 진정한 무인이었던 김방경(金方慶)

김방경장군영정-삼별초 항쟁을 진압했으며 원나라의 일본 정벌 때 고려군 도원수로 출정했다. 김송배 화백이 그린 영정이다.

김방경은 삼별초 토벌의 임무를 맡았던 고려군의 지휘관이었다. 배중손 등이 삼별초의 난을 일으키자 추토사(追討使)로 임명돼 삼별초 진압에 나섰다. 삼별초 공격으로 함락 직전에 놓여 있던 전주와 나주를 구했다. 삼별초 토벌에 진력하다가 무고로 개경에 압송되기도 했다.
1271년 몽골군 원수 흔도와 진도 공격에 나서 삼별초 토벌에 성공했다. 김통정이 부하들을 이끌고 제주도로 들어가 항전하자 흔도, 홍다구(洪茶丘) 등 몽골군 장수들과 함께 제주도로 들어가 삼별초를 완전히 평정했다. 이 공로로 시중에 오르고 원나라에 들어가 세조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1273년 10월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고려군 8천명을 이끌고 몽골 군사들과 함께 출정했다.
김방경이 이끄는 고려군은 10월 19일 모모치바라에 상륙한 뒤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둔다. 이때 고려군은 용맹하게 싸워 명성을 날렸다. 이에 반해 몽골군은 상당히 소극적으로 전투에 나선 것으로 전해진다.
몽골군을 이끌었던 홍다구는 아버지가 고려인이었다. 일본 원정기간 동안 홍다구는 김방경장군의 전공을 시기했으며 작전을 짜면서 자주 갈등을 빚었다. 1277년 김방경장군이 모함을 받아 옥에 갇혔을 때 홍다구는 모질게 김방경을 고문하기도 했다.
1281년 2차 일본 정벌군의 고려군 도원수로 임명돼 고려군을 이끌고 큰 공을 세웠다. 삼별초의 대몽항쟁을 높이 평가하는 민족주의 역사가들로부터는 몽골의 앞잡이라고 비난받고 있지만 실제로는 왕명에 따라 충직하게 자신의 소임을 다한 무인이다.
수차례나 모함을 받아 모진 고문을 받는 등 고초를 겪었지만 원망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 당시 준엄하게 영을 세우고 철저하게 준비를 시켜 고려 군사들이 승리할 수 있도록 했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을 지키다 순절했던 진주목사 김시민이 김방경 장군의 12대손이다. 백범 김구 선생은 25대손이다.
도움말·사진제공= 전남 진도군, 제주특별자치도
그래픽= 류기영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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