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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의 남도일보 칼럼

유희춘과 송덕봉의 부부관계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1570년 5월 27일에 서울에서 홀로 벼슬살이를 하고 있는 미암 유희춘은 처향(妻鄕)인 전남 담양 집에 편지를 썼다. 편지 내용은 <미암일기>에 없다.

6월 12일에 부인 송덕봉은 유희춘에게 답장 편지를 보냈다. 이를 읽어보자.

“삼가 편지를 보니 갚기 어려운 은혜를 저에게 베푼 양 하였는데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다만 군자가 행실을 닦고 마음을 다스림은 성현의 밝은 가르침인데, 어찌 나 같은 아녀자를 위해 억지로 힘쓸 일이겠습니까. 또 중심이 정해지면 물욕(物欲)을 가리기 어려운 것이어서 자연히 잡념도 없어질 것인데, 어찌하여 안방 아녀자의 보은을 바라십니까.

3,4개월 동안 홀로 잤다고 해서 고결한 척하여 은덕을 베푼 기색이 있다면, 결코 담담하거나 무심한 사람은 아닙니다. 편안하고 결백한 마음을 지녀 밖으로 화사한 미색을 끊고 안으로 사욕을 없앤다면, 어찌 꼭 편지를 보내 공(功)을 자랑해야만 알 일이겠습니까.

곁에 지기가 있고 아래로 가족과 종들이 있어 뭇사람이 보는 바이니, 공론(公論)이 퍼질 것이거늘 굳이 편지를 보내시다니요.

이를 보면 신은 아마도 겉으로는 인의(仁義)를 베푸는 척하는 폐단과 남이 알아주기를 서두르는 병폐가 있는 듯합니다. 제가 가만히 살펴보니 의심스럽고 걱정스러움이 한량이 없습니다.”

덕봉은 미암이 ‘몇 달 동안 여색을 멀리하고 홀로 지낸 것을 은혜로 알라’고 한 것을 은근히 비꼬고 있다.

편지는 이어진다.

“저 또한 당신에게 잊지 못할 공(功)이 있습니다.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당신은 몇 달 동안 홀로 잤던 일을 두고 붓끝의 글자마다 그 공을 자랑했습니다. 60에 가까운 나이로 이처럼 혼자 잔다면 당신의 건강에 매우 이로운 것이니, 결코 저에게 갚기 어려운 은혜를 베푼 것이 아닙니다. 하기야 당신은 귀한 관직에 있어 도성의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처지이니, 몇 달 동안의 홀로 잠자리도 사람으로서 하기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저는 옛날 당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사방에 돌봐주는 사람이 없고, 당신은 만리 밖에 있어서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며 슬퍼하기만 했지요. 그래도 저는 지성으로 예법에 따라 장례를 치러 남에게 부끄럽지 않게 했는데, 곁에 있던 어떤 사람은 ‘묘를 쓰고 제사를 지냄이 비록 친자식이라도 이보다 더할 순 없다’라고 말하였습니다.”

1558년에 미암의 모친 최씨가 별세했다. 덕봉은 미암이 함경도 종성에서 유배중이라 홀로 3년 상을 치렀다.

계속하여 편지를 읽어보자.

“삼년상을 마치고 또 만리 길에 올라 험난한 곳을 고생스레 찾아간 일을 누가 모르겠소. 제가 당신에게 한 이런 지성스런 일을 두고 바로 잊기 어려운 일이라 하는 것입니다.”

1560년에 송덕봉은 함경도 종성 유배지를 찾아갔다. 그 길이 어찌나 멀었던지 덕봉은 시를 남겼다.

마천령 고개를 지나면서

걷고 또 걸어 마천령에 이르니(行行遂至磨天嶺)/ 동해는 거울처럼 끝없이 펼쳐있구나(東海無涯鏡面平)/ 부인의 몸으로 만리 길을 어이 왔던가(萬里婦人何事到)/ 삼종(三從)의 의리는 중하고 이 한 몸은 가벼운 것을(三從義重一身輕)

위 시에 대하여 김시양(1581∼1643)은 <부계기문>에서 ‘성정(性情)의 바름을 얻을 만하다’고 평했다.

이제 마지막 부분이다.

“당신이 몇 달 동안 홀로 잤던 공과 제가 했던 몇 가지 일을 서로 비교하면 어느 것이 가볍고 어느 것이 무겁겠습니까. 바라건대 당신은 영원히 잡념을 끊고 기운을 보양하여 수명을 늘리도록 하세요. 이것이 제가 밤낮으로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제 뜻을 이해하고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송씨(宋氏)가 아룁니다.”

덕봉의 편지를 읽은 미암은 “부인의 말과 뜻이 다 좋아 탄복을 금할 수 없다”고 감탄했다. 6월 12일자 <미암일기> 말미에 나온다.

이를 보면 유희춘과 송덕봉의 부부관계는 남존여비(男尊女卑), 여필종부(女必從夫)의 관계가 아니다. 부인도 남편에게 할 말을 다하는 대등한 관계, 양성평등이다. 그런데 유희춘 부부만 그랬을까? 16세기 선비들은 대체로 처가살이했고, 부인의 발언은 상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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