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 물과 정체성

노는 물과 정체성

<나선희스피치커뮤니케이션즈 대표>
 

오랜만에 부부가 식탁에 마주앉았다. 밀린 수다가 펼쳐진다. “경비원 아저씨가 정말 성실한 것 같아. 틈틈이 정원관리도 하고, 놀지를 않아. 빗자루 들고 여기저기 휩쓸고 다니더라고. /경비원이 입구에서 환하게 웃으면서 인사하니까 집에 들어올 때 기분이 다 좋아진다니까? /쓰레기 처리하는 곳이 조금 멀어서 불편하더라. 날 좋을 땐 괜찮은데 비 오면 곤란해. /관리비를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 같던데? 아마도 경비원 수를 줄여서 가능한 것 같아.”

전에 살던 아파트와 비교까지 해가면서 한참을 쏟아낸 이 모든 말은 남편의 입에서 나왔다. 완전 주부모드(mode)다. 남편은 안식월(安息月) 휴가 중이라 몇 달 째 주부를 자처하고 있다. 상당 시간을 집안 살림에 쓰더니 입만 열면 살림 이야기다. 뭐니 뭐니 해도 생선은 남광주 시장이 제일이라는 말을 끝으로 살림이야기는 마무리됐다. 이번에는 신앙 이야기다. 세례를 받고 나서도 시늉만 가톨릭 신자로 보이더니 안식월(安息月) 휴가 기간 동안 많이 달라졌다. 혼자서 피정(避靜)도 다녀왔다. 종교생활에 시간을 할애한 만큼 신앙심도 커졌다. 그러더니 신앙에 대한 말이 늘었다. 다음은 산(山)이다. 산을 좋아해서 무등산 다니기 쉬운 곳으로 이사를 왔다. 매일 서너 시간을 산에서 보내니 산 이야기만 나오면 신이 나는 모양이다. ‘살림, 신앙, 산’, 안식월(安息月) 휴가 기간 동안 남편의 주 화제들이다. 노는 물이 사람을 변화시켰다.

생긴 대로 논다는 말이 있다. 곱지 않은 행동을 할 때 엉뚱한 생김새를 들추어 비하하는 말이다. 그런데 생긴 대로 노는 게 아니다. 노는 대로 생긴다. 남편을 보니 그렇다. 노는 물에 따라 하는 말이 달라진다. 게다가 말은 제2의 얼굴이라지 않은가. 그러니 노는 물에 따라 생긴다는 거다.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의 교육을 위해 세 번이나 이사를 했다는 가르침이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다. 그런데 이 가르침을 다른 방향으로 적용한 부모도 있다. 좋은 환경을 제공해주는 게 아니라, 나쁜 환경을 강압적으로 차단해버리는 방식이다. “00이랑 놀지 마라!” 자식이 바르게 잘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 거다. 도둑질하는 아이, 욕설하는 아이, 공부 못하는 아이와 같이 어울리면 그와 똑같이 될 것이라는 염려에서다. 유난히도 사람을 가려 놀지 못하게 하던 친구 엄마가 있었다. 친구 엄마는 가난한 아이를 꺼렸었다. 고아원 친구와는 말도 못 붙이게 했다. 엄마와는 달리 착했던 친구는 엄마 몰래 고아원 친구를 챙기며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다 어느 날 딱 걸렸다. 고아원 친구와 더불어 친구 집에서 함께 놀다 친구 엄마가 들이닥쳤다. 단번에 우리 모두는 쫓겨났고 친구는 혼쭐나게 당했다. 그래도 우리는 꿋꿋이 흩어지지 않고 함께 놀았다. 친구는 삼엄한 어머니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친구를 가리지 않았다. 노는 대로 생겨선지 중년이 된 친구의 얼굴은 자애롭다. 천사처럼 희고 눈부시다. 친구의 엄마는 무서웠다. 양쪽으로 치켜 오른 눈썹과 삐죽거리던 입매가 떠오르니 말이다. 시골에서도 항상 하얀 분을 바르고 홈웨어를 입고 계셨던 귀부인의 무서운 얼굴. 이것이 친구 엄마에 대한 기억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최적의 환경을 찾아낸다. 맹자의 어머니처럼 ‘발전적 노는 물’을 찾아낸다. 설령 찾을 수 없는 경우라면 스스로 그런 환경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곳에서 놀고 또는 놀게 한다. 마을 앞 개천에서 멱 감는 것이 놀이였던 때는 수영을 배우지 않아도 잘할 수 있었다. 농사가 주업이었던 시골 아이들은 벼 베기, 보리 베기, 풀베기 선수였다. 물 긷기와 마당 쓸기와 같은 집안일도 척척 해냈다. 노는 물이 그랬다.

책 읽는 자녀로 키우고 싶으면 집안 도처에 책을 늘어놓으라고 한다. 일리 있는 말이다. 허나 온 집안에 책이 널려있지만 부모가 텔레비전만 보는 환경이라면 널려있는 책은 쓰레기에 불과 할 것이다. 굳이 교육 특구로 이사 가면서까지 맹자 어머니를 흉내 낼 필요 없다. 공부하는 환경을 조성하면 된다. 책을 깔아놓고 부모가 읽고 있으면 된다. 환경은 입장을 바꾼다는 영국 속담처럼 노는 물이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책 속의 것들은 차고 넘쳐 말로 표현될 것이다. 이것이 노는 물의 정체성이다.

남편이 이번 주에 안식월(安息月) 휴가를 마치고 회사에 복귀한다. 노는 물이 달라진다. “이제 집안일은 손 떼겠네?” 우려하자 출근하더라도 주부모드는 변함없을 거란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남편이 회사와 가정에서 두루 잘 놀아줬으면 좋겠다. 아이고! 그러고 보니 이제 소홀했던 집안 살림 챙겨봐야겠다. 내가 노는 물도 들여다 볼 줄 알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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