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정뱅이보다 무서운 것

주정뱅이보다 무서운 것

<문상화 광주대학교 외국어학부 교수>
 

하퍼 리(Harper Lee)가 쓴 <앵무새 죽이기>는 가을에 읽기 좋은 책이다. 1960년에 처음으로 세상에 나와 극찬을 받은 이 소설은 인종차별이 심했던 1930년대 미국 남부의 한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백인들과 소수 흑인들이 함께 살고 있는 시골 마을에서 일어난, 흑인에 의한 백인의 성폭력 사건을 다루는 이 소설은 진실을 외면하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별다른 사건 없이 하루하루를 지내는 미국남부의 한 마을에서 성범죄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피해자는 백인여성이고 가해자는 흑인남성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흑인에 대한 반감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간다. 소설 속에서 백인들은 한쪽 팔을 쓸 수 없는 흑인이 정상적인 백인여성에게 성폭력을 저지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진실에 관계없이 백인여성에게 가해진 불명예의 올가미를 벗겨주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흑인을 범죄자로 몰아가는 과정을 통해 저자는 우리가 진실을 외면하는 과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다.

“네 손에 들려 있는 성경이, 주정뱅이의 손에 들려 있는 위스키보다 위험한 것이야.” 성범죄에 관한 재판으로 마을이 뒤숭숭한 가운데, 마을에 사는 한 할머니의 충고는 사건의 정곡을 찌른다. 일요일마다 교회에 나가 목사의 설교를 듣고, 교회공동체를 위해 생활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할머니의 이러한 지적은 듣기가 거북한 이야기일 수 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성경의 가르침과 목사님의 인도로 하루하루를 건강하고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가장 기본적인 성경의 가르침마저 외면한 채 흑인을 죽음으로 모는 것은 오히려 성경의 구절을 인용해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을 뿐이다.

그 할머니가 암시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편협된 시각으로 성경을 해석하거나, 자신의 이익에 맞게 성경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들의 악행을 합리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은 좀 더 커다란 악을 부르는 길일 뿐이다. 흑인 청년이 성폭력을 저지를 능력도, 의지도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보다 마을에서 흑인을 추방하겠다는 백인들의 집단적 이기심이 앞서기 때문이다. 그 흑인청년의 육체적 무능력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면, 그리고 자신들의 마을에는 오직 백인들만이 사는 것이 올바르지 않다고 여겼다면 그 흑인청년의 목숨이 무의미하게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파편화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 게 어제 오늘이 아니다. 또한 파편화의 기저에는 보고 싶은 것만을 보겠다는 이기심이 뱀처럼 또아리를 틀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지역과 세대와 성별과 직업군으로 파편화된 우리 사회는 전체적 맥락에서 사고하고, 객관적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몹시 인색하다. 균형 잡힌 사고보다는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에 오염된 논리로 자신을 합리화하고 상대방을 공격하는 경향이 강하다.

성경 같은 선한 가르침이라도 이기심에 사로 잡혀 아집과 편견으로 해석한다면 주정뱅이의 손에 들려있는 술보다 무서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주정뱅이의 악행은 소수에게 그 피해가 가겠지만, 왜곡된 논리와 편견으로 진실을 가리는 것은 다수에게 피해가 돌아가는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 ‘나의 이익 우선’ 논리가 지나치게 팽배하고 있다. 그러한 논리 덕분에 우리 사회는 ‘나의 이익을 위한 소모적 논쟁’으로 가득하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언제든 사실을 왜곡하고 훼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에게도 양심이라는 것이 있는지 궁금해진다. 어쩔 수 없다는 말로 자신을 합리화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적어도 그들에게 부끄러움을 느끼는 기관이 있는지 궁금하다. 부분으로 전체를 재단하는 논리로 자신의 이익을 포장하고, 또 마치 정당한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고 싶다. 그래야 그들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덜 어지럽히고,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줄 세상을 덜 혼탁하게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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