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시리도록 푸른 아드리아 해변 모습에 ‘탄성’

발칸 9개국을 가다…<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⑨아드리아 해의 진주 두브로브니크
눈이 시리도록 푸른 아드리아 해변 모습에 ‘탄성’
‘공공의료복지 시초’ 13세기 흑사병 치료 프란체스코 수도원
‘세상 어떤 보물도 자유와 바꿀 수 없다’ 전쟁사진기념관 ‘눈길’

오노프리오 분수의 관광객들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가해 죽은 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1788∼1824) “지상에서 살면서 과연 천국이 어떤지 미리 맛보려면 두브로브니크에서 살아보라.”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묘비명으로 유명한 극작가 버나드 쇼 (1856∼1950).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는 유럽인들이 가장 가고 싶은 관광지다.

지난 6월 2일 오전 8시30분에 두브로브니크에 도착했다. 서문인 필레 관문을 통과해 오노프리오 분수를 지나 구 시가지를 걸었다.

두브로브니크 폐허 사진

우체국 옆에서 두브로브니크 폐허 사진을 보았다. 1991년 10월부터 세르비아는 1979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두브로브니크를 완전 봉쇄하고 도시와 성벽을 파괴했다.

이어서 군둘리치 시장을 보고 두브로브니크 대성당에 도착했다. 근처에 렉터 궁전과 루자 광장이 있다. 루자 광장에는 롤랑의 조각상이 있다. 롤랑은 778년 이슬람과의 스페인 전투에서 프랑크 왕국의 카를 대제를 구하고 전사한 기사였다. 이 전투를 기린 프랑스 최초의 서사시 <롤랑의 노래>가 만들어졌고, 롤랑은 이슬람 세력을 보호하는 상징이 됐다.

루자 광장의 롤랑 조각상

조금 가니 플라차 거리이다. 번화가답게 기념품 가게, 레스토랑, 카페들이 즐비하다. 일행은 다시 오노프리오 분수에서 멈췄다. 30분간 단체 투어를 마쳤다. 성벽투어를 할 일행은 가이드를 따라 갔다.
필자 부부는 성벽투어를 안 하고 구시가지 답사에 나섰다. 먼저 오노프리오 분수부터 자세히 본다. 이곳은 1438년에 만들어진 급수대이다.
이탈리아 출신 건축가 오노프리오 데라 카바가 11.7㎞나 떨어진 곳 리예카에서 물을 끌어와 시민들에게 식수를 공급했다. 분수에는 수도꼭지가 16개 있는데 각기 모습이 다르다.

 

 

오노프리오 분수대의 분수 꼭지

근처의 프란체스코 수도원을 구경했다. 프란체스코 수도원은 13세기 초에 흑사병 환자를 치료 했던 곳인데 공공의료 복지의 시초였다. 1317년에 설립된 ‘말라 브라차(작은 형제들이란 의미)’ 약국부터 들어갔다.

이 약국은 유럽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약국인데, 장미크림을 팔고 있다.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약국 종업원들은 몸단장만 하고 있다. 이어서 입장료 30쿠나를 내고 박물관에 들어갔다. 회랑을 지나 들어가니 박물관에는 중세 약국의 모습이 재현돼 있다.

수도원 박물관 내부. 약 그릇이 있다

다시 우체국 옆의 전쟁 사진 기념관으로 갔다. 그런데 문이 닫혀 있다. 다시 오기로 하고 근처의 세르비아 정교회에 들어갔다. 정교회 제단 위에는 최후의 만찬 그림이 그려져 있다.

세르비아 정교회 내부

이윽고 두브로브니크 대성당 내부를 구경한 뒤에 렉터 궁전 앞에 섰다. 렉터 궁전은 최고 통치자인 렉터가 기거하면서 집무를 보는 곳이다. 50세 이상의 귀족 중 한 명이 선출되어 1개월간 공화국을 통치했는데 재직기간에는 궁전 밖을 나갈 수 없었다. 궁전 안 문 벽면에 ‘개인적인 일은 잠시 잊고, 공적인 일에 전념하라’고 적혀 있다는데 궁전이 공사 중이라 들어가지 못했다.

궁전 앞에 동상이 하나 있다. 이 분이 극작가이자 교육자인 두브로브니크 출신 마린 드르지치(1508∼1567)이다.

드리지치 동상

다시 루자 광장으로 갔다. 광장 왼편에는 스폰자 궁전, 오른편에는 두브로브니크 수호성인 성 브라이세 성당이 있다. 성 브라이세는 4세기의 아르메니아 주교인데 로마의 박해로 316년에 참수형을 당했다. 스폰자 궁전은 해상무역국가였던 라구사 공화국이 1522년에 세관으로 지은 건물인데 지금은 기록보관소로 활용되고 있다. 플라차 거리엔 사람이 너무 많다.

그래서 부두로 향했다. 아드리아 해가 정말 푸르다. 스르지 산도 보인다.

이어서 해안을 따라 성벽 아래를 둘러보는 투어를 했다. 성벽 투어 동문 매표소인 플로체 게이트도 있다. 계속 걷고 있으니 아드리아 해변 모습이 환상적이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아드리아 해변 모습.

루자 광장으로 돌아온 시간은 10시 반. 자유시간이 1시간 반이나 남아있다.

세 번째로 전쟁 사진 기념관으로 갔다. 마침 한 가이드가 단체여행객들에게 두브로브니크 폐허에 대해 열심히 설명을 하고 있다.

두브로브니크 폐허에 대해 설명하는 가이드

1991년 6월 25일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선포하자 크로아티아 내의 세르비아인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세르비아 유고군과 함께 크로아티아 내 여러 지역을 점령했다. 10월부터 유고군은 두브로브니크를 전면 봉쇄했고, 12월에는 대대적으로 파괴했다. 건물의 56%가 파괴됐고, 650회 포격을 받아야 했다.

이러자 유럽연합은 세르비아에 대한 제재를 하였고, 세계 언론들은 두브로브니크 파괴에 우려를 표명했다. 세계 각지의 지식인들은 인간 사슬을 만들어 도시를 지켰다.

한편 화장실도 갈 겸 노천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신 후, 또 다시 기념관으로 갔다. 아직도 문이 닫혀 있다. 별 수 없이 건물 주변의 전시물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건물 벽 포스터에는 ‘1991년 12월 6일’이라고 적혀 있다. ‘우리 잊지 않기 위하여’란 글귀도 있다. 또 옆의 포스타는 ‘1993년 12월6일’이 적혀있다. 이들은 아침에 보았지만 자세히 보니 보인다.

1991년 12월 6일 전시물

그런데 정문 위에는 ‘85th 생일축하 플래카드’가 붙어 있다. 오른편에는 Ivo Grbic(1931생)의 약력이 붙어있고, 왼편에는 크로아티아 어, 영어 ,독일어, 일어, 중국어 등 여러 나라 말로 적힌 표시판이 있다. 윗부분은 영어로 “Freedom is not for sale for all the treasure in this world”라고 적혀 있고, 아랫부분에는 한국어로 ‘세상의 그 어떤 보물도 자유와 바꿀 수 없다’고 적혀 있다. 자유란 이렇게 소중하다!

정문 앞의 게시물들

이후 플라차 거리를 두세 번 왔다 갔다 하면서 쇼핑을 하고, 골목 투어도 했다. 골목길이 오밀조밀하여 소소한 재미가 있다. 많은 관광객들을 보는 것도 즐겁다.

플라차 거리의 관광객들

아쉬운 점은 성벽투어를 못 한 것이다. 다음에 다시 오리라. 아듀, 두브로브니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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