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길을 막아야 전라도와 조선이 산다

 

 

 

최혁 주필의 전라도 역사이야기
21. 구례 석주관성(求禮 石柱關城)의 호남의병들
이 길을 막아야 전라도와 조선이 산다
호남관문 석주관 지키려고 목숨 바친 구례의병들
정유재란 당시 왜군에 맞서다 500여명 모두 전사
七義士·義兵·華嚴寺 僧兵 숭고한 뜻 널리 기려야

구례 석주관 칠의사 묘역과 석주관성 전경(1980년대)

■ 구례 석주관성(求禮 石柱關城)의 호남의병들

1597년 일본은 조선을 다시 침략했다. 일본군은 임진년 조선정벌이 실패한 이유 중의 하나가 전라도 공략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정유년 침략 때는 전라도 공략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왜군들은 전라도의 관문인 석주관(石柱關)을 공격했다. 그러나 조선관군은 천혜의 군사요충지인 석주관을 지키지 않았다. 왜군의 수가 너무 많아 석주관을 지켜낼 수 없다고 판단해 순순히 석주관을 내주고 구례읍성으로 철수해버린 것이다.

왜군은 구례를 거쳐 남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남원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조선과 명나라 군대의 저항이 심해 북진이 어렵게 되자 순천 왜교(倭橋)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전라도 통치에 들어갔다.

이때 수많은 벼슬아치와 사림들이 학살당했다. 왜군에 협조하지 않은 사람이면 닥치는 대로 죽였다. 조선 사람들은 앉아서 죽던지, 아니면 왜군에 붙어 목숨을 부지하던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했어야 했다.

특히 구례사람들의 피해가 컸다. 구례는 남원에서 순천으로 가는 도중에 있었기에 다른 지역보다 더 큰 피해를 입었다. 왜군의 잔인한 살육과 약탈을 견디다 못한 왕득인(王得仁)같은 유생은 장정을 모집, 석주관으로 올라가 유격전을 개시했다.

왕득인은 석주진성 주변에 진을 치고 왜군을 습격했다. 이에 왜군은 석주진을 공격해 왕득인 등 의병들을 몰살했다. 그러자 이정익(李廷翼), 한호성(韓好誠), 양응록(梁應祿), 고정철(高貞喆), 오종(吳琮) 등도 각기 가속들을 데리고 석주관에 모여 왜군과 맞섰다. 왕득인의 아들 왕의성도 이들과 합세했다.

이들 육의사(六義士)는 화엄사에 격문을 보내 병력과 군량을 요청했다. 이에 화엄사는 승군 153명과 군량미 103석을 보내왔다. 육의사와 의병, 그리고 화엄사 승군은 왜군의 병참선을 끊고 왜군들을 괴롭혔다.

왜군은 1만여 명의 병력을 동원, 석주관을 공격했다. 의병들은 힘써 싸웠으나 중과부적이었다. 결국 석주관 의병들은 모두 숨졌다. 수천, 수만 명의 왜군을 상대로 수백 명의 의병들이 목숨을 내놓고 싸운 곳이 석주관이다. 이 땅을 지켜낸 호남의병들의 의로움이 가득한 곳이, 바로 석주관이다.
■ 정유재란 발발
1597년 1월 일본이 다시 조선을 침략해왔다. 정유재란이다. 제1진은 가토 기요사마와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부대였다. 가토가 지휘하는 왜군 1만여 명은 130척의 전선을 타고 다대포에 상륙했다. 제2진은 고니시 부대였다. 1만4천700여명이 두모포에 내렸다. 조선에 들어온 왜군 수는 8진까지 모두 12만1천명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다시 침략하면서 부하들에게 분명하게 목표를 정해주었다. 첫 번째 임무는 이순신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이순신과 조선수군을 제거해야 조선을 일본 땅으로 만들 수 있다고 판단했다. 둘째 임무는 전라도 공략이었다.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점령해야 군량을 확보할 수 있고 의병 근거지도 없앨 수 있었다고 여겼다.

왜군은 7월16일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수군을 몰살시켰다. 선조의 그릇된 판단과 조정대신의 모함으로 당시 이순신장군은 백의종군 상태였다. 용맹스러우나 성정이 거칠고 통솔력이 없는 원균의 조선수군은 오합지졸로 전락한 상태였다. 원균은 치밀하지 않았고 전략도 없었다. 칠천량 해전에서 왜군의 기습과 전술에 말려 원균이 이끌던 160여척의 조선수군은 대패했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지휘하던 12척의 전선만 겨우 살아남았다. 조선수군을 궤멸시킨 왜군은 거칠 것이 없었다. 남해안을 장악한 왜군은, 수군을 전라도 지역으로 보내 공격토록 했다. 육상의 왜군들은 전라도와 경상도를 거쳐 충청도 방면으로 진격하도록 했다. 왜군은 8월3일 진주를 함락했다. 이후 육군은 하동으로, 수군은 섬진강으로 거침없이 쳐들어갔다.

왜군 육상부대는 2개부대로 진격했다. 우키타와 고니시 등이 이끄는 5만6천 여 명의 좌군(左軍)은 남해안을 따라 하동~구례~남원을 거쳐 북상할 계획이었다. 모리수원과 가토가 지휘하는 6만여 명의 우군(右軍)은 거창~안의~진안을 거쳐 전주로 향했다. 왜군은 미처 피난가지 못한 조선백성들을 모조리 죽이고 관청과 민가는 모두 불태웠다.

8월5일 왜군의 전라도침입선단은 남해를 거쳐 하동 악양에 출현했다. 임진?정유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조경남(趙慶男)이 남긴 <亂中雜錄>(난중잡록)에는 남해바다를 가득 메운 왜군전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영남의 바다로부터 5~6리 사이에 배가 가득차서 마치 바다에 물이 없는 듯했다’

하동현에 진출한 일본 전선에서 7천여 명의 병력이 광양 두치진(豆恥津)에 상륙했다. 왜군 선봉은 석주관을 공격했다. 그렇지만 조선관군은 왜군의 병력이 많은 것을 보고 너무도 쉽게 석주관을 포기해버렸다.

조선은 임진왜란 때도 석주관 방비를 소홀히 해 구례지방이 왜군으로부터 큰 피해를 입게 했다. 그래서 정유재란 발발 전 석주관에 성곽을 쌓고 대비했디. 그러나 막상 왜군이 침입하자 성을 버리고 후퇴했다. 명의 군사들 역시 석주관를 지키려면 막대한 희생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해 방비를 외면했다.

만약 조선관군이 석주관을 지키기 위해 철저히 준비했더라면 정유재란 당시 전라도가 그렇게 쉽게 함락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라도의 입구인 석주관 방비를 게을리 해 남원성이 무너졌고, 결국은 전라도가 왜군의 소굴이 돼버린 것이다.

■ 군사요충지 석주관

멀리서 바라본 석주관성

구례 석주관성은 고려 말기에 왜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설치된 진이다. 석주관은 안음의 황석산성, 진안의 웅치, 운봉의 팔량치와 함께 호남과 영남을 연결하는 4대 관문 중의 하나였다. 석주관은 구례와 경남을 연결하는 유일한 육상통로였다. 구례 쪽의 지리산에는 진주와 하동 쪽에서 이어지는 조그만 산길이 있었다. 그 길의 관문이 석주관이었다.

그 석주관의 경사진 산허리를 따라 만든 성곽이 바로 석주관성이다. 석주관성은 지리산 왕시루봉으로 이어지는 험한 산줄기여서 성 쪽으로 접근하기가 힘들었다. 또 석주관 아래로는 섬진강이 흐르고 있어 산 쪽을 제외하고는 공격을 당할 곳이 많지 않았다. 광양만에서 섬진강을 타고 구례 쪽으로 올 수는 있었으나 석주관에서 1Km 정도 떨어진 한수내까지만 배가 들어올 수 있어서 결국 도보로 석주관을 통과해야만 했다.

구례 석주관성. 아래쪽으로 섬진강이 보인다.

석주관성은 적은 수의 병력으로도 대군을 막아낼 수 있는 천혜의 군사 방어지였다. 현재 남아있는 석주관성 성곽의 길이는 736m이다. 돌로 쌓아 만든 성벽의 높이는 50∼120cm이다. 성벽 중간중간 일정한 간격으로 활이나 총을 쏠 수 있게끔 틈을 만들어놓았다. 고려 때 축조된 산성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전라방어사 곽영이 옛 진위에 석주관성을 쌓았다.

석주관성은 현재 행정구역상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에 위치해 있다. 1993년 11월 10일 대한민국 사적 제385호로 지정됐다. 어디가 석주관 옛길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구례지역 지리산 둘레길 상당수가 석주관 옛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후기(13세기)와 조선중기(16세기)의 성벽 축조연구에 매우 중요한 사적지이다.

■ 석주관과 구례·남원성이 무너지다
1597년 8월 6일 일본 좌군 7천여 명의 병력이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 구례를 점령하려고 했다. 구례 현감 이원춘은 왜군들이 석주관으로 몰려들자 소수의 병력으로 왜군을 막아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석주진에서 물러나 구례성으로 후퇴했다.

이원춘은 양곡을 비롯, 창고 쌓아둔 물건들을 모두 불태운 뒤 남원성으로 철수했다. 호남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관문인 석주관을 확보한 왜군들은 구례로 몰려들었다. 왜군들은 약탈과 방화를 하면서 8월 16일 호남의 마지막 보루인 남원성에 도착했다. 그리고 공격을 시작했다.

남원성에서 관군과 의병을 지휘하던 병사 이복남과 방어사 오응정, 이원춘 구례현감은 결국 전사했다. 성은 함락됐다. 왜군의 내륙침략을 막아낼 수 있었던 최후의 성인 남원성이 무너지고 전주성에 왜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전라도의 거의 모든 지역이 왜군천지가 돼버렸다. 왜군들은 전라도를 점령해 가면서 한편으로는 바다와 육지 양쪽에서 이순신을 죽이기 위해 압박해 들어갔다.

■왜군의 살육과 약탈
 

임진정유왜란 당시 조선에서의 전쟁참상을 묘사한 그림. 일본인이 그린 것으로 도요토미히테요시의 일대기를 적은 책에 넣어진 삽화다. 일본인이 그린 임진정유왜란 당시의 조선인 참상. 에혼타이코기(繪本太閤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대기를 적은 책이다. 이 책에는 조서에서의 전쟁참상에 대한 묘사가 삽화와 함께 담겨있다. 이 그림은 길 곳곳에 조선의 양민들이 죽어있고 아기가 죽은 어미의 젖을 빨고 있는 모습이다. 이를 목격한 명나라 군사가 슬퍼하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왜군의 잔악상은 극치에 달하였다. 사람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코를 베고 재물을 약탈하고 집을 불태웠다. 남원성 함락과 더불어 남원·구례·곡성 일대는 전쟁 피해가 극심했다. 백성들은 깊은 산 깊은 곳으로 숨거나 강원도 등으로 피난을 갔다.

임진왜란 때 구례사람들 중 상당수는 명나라 군사와 관군을 믿고 피난을 가지 않았다. 피난을 가더라도 멀리 가지 않고 가까운 산중으로 숨었다. 임진왜란 때 석주성을 지키던 복병장(伏兵將) 고부군수 왕경조와 전판관(前判官) 노종령 등이 도주하는 바람에 왜군들은 큰 힘 들이지 않고 구례로 쳐들어왔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살육하고 약탈했다.

구례사람들은 임진왜란 때 당한 끔찍한 일을 떠올리며 정유재란 때 왜군이 구례를 공격해오자 먼 곳으로 몸을 피했다. 지리산 깊은 산속으로 들어간 사람이 많았다. 왜군은 남원성 공격에 앞서 깊은 산속을 뒤져 숨어있는 조선백성들을 모두 죽였다. 남원성을 함락시킨 뒤에도 대학살을 자행했다.

왜군의 종군승려였던 경념(慶念)이 쓴 <朝鮮日 日記>(조선일 일기)에는 왜군들이 얼마나 참혹하게 조선 사람들을 죽였는지가 다음과 같이 묘사돼 있다.

‘일본군은 상륙하자마자 무차별하게 사람을 베어죽이거나 약탈했다. 가는 곳마다 불을 질러 전라도는 온통 검붉은 화염에 휩싸였다. 어린아이들을 모조리 묶어 끌고 가는 가하면 눈앞에서 부모들을 마구 베어죽여 버렸다. 남원성이 함락되던 날, 성 안팎에 쌓인 시체들을 대했을 때 도저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다’

남원과 전주가 함락되자 전라도는 왜군의 소굴이 돼버렸다. 왜군은 한양을 향해 진격하려 했으나 조선관군과 명군의 저항이 심해 북진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경상도에서는 울산과 사천을, 전라도에서는 순천을 근거지로 삼아 장기 주둔할 계획을 세웠다.

9월 초 소서행장(小西行長)등이 인솔하는 왜군은 구례를 거쳐 순천으로 이동했다. 왜군들은 왜교(倭橋)에 거점을 확보하고 본격적인 전라도 공략을 준비했다. 왜군은 광양성을 비롯 순창·담양·광주·옥과·동복·능주·화순 등지를 점령하고 주둔했다. 시마즈 요시히로 부대는 장성과 나주를 초토화시키고 해남까지 진출했다.

다른 왜군들도 전라도 각 고을에 주둔하면서 살인과 약탈을 자행했다. 이와 관련, 조경남은 ‘난중잡록’에서 왜군 50개 부대가 전라도에 깔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왜군은 항복하거나 복종하는 조선인들에게는 민패(民牌)를 주어 나름대로 보호했다.

<난중잡록>에는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왜군들은 산에 들어간 사람들을 유인해 민패를 주고 쌀도 주었다. 때로는 군사들을 도로에 배치해 길을 오가는 다른 왜군들이 조선백성들을 괴롭히거나 노략질을 하지 않도록 조치하기도 했다. 궁한 백성들은 우선 편안함을 다행으로 여겨 왜군들에게 투항하는 이들이 매우 많았다’

왜군들은 구례공격 초기 조선관군과 백성들을 잔인하게 살해해 자신들에게 반항할 여지가 없도록 했다. 그런 다음 유화정책을 썼다. 민패를 지닌 사람들은 해치지 않도록 했다. 부분적으로는 약탈도 금했다. 사람들은 살기위해 민패를 받았다. 그렇지만 민패를 받지 않고 죽기를 각오하고 왜군과 맞서 싸운 이들도 많았다.

■ 석주관의 의병들

구례 석주관 사적지 전경

왜군은 1597년 8월 6일 구례를 공격할 때 닥치는 대로 조선양민을 살해했다.(일본 종군승려 경념의 <朝鮮日 日記> 8월 7일字 記事) 또 남원성을 함락시킨 뒤 순천으로 돌아올 때도 구례 산간지역 곳곳을 뒤져 살아있는 관군가족과 유림사족들을 처형했다.

왜군들은 조선백성들을 죽일 수 있을 만큼 죽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일부 조선백성들을 포섭해 왜군에 반항하는 이들을 신고토록 하고 상을 주기도 했다. 그래서 왜군들은 자신들에게 반항하는 의병들이 일어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경계심을 늦췄다.

왜군이 구례를 점령한 뒤 1개월 쯤 지나, 구례지역 사림(士林)들은 왜군을 상대로 의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난중잡록>에는 사림들이 의병들을 모으면서 어떻게 말했는지가 나와있다.

‘지금 적병은 사방으로 흩어져 왕래함이 고약(孤弱)하고 우리 백성들은 전란에 익숙해져서 야음을 이용해서도 서로 통하니 만일 이때 효유하여 군사를 모집, 복병을 설치하여 적을 사로잡고 또 군사를 몰아쳐 그들을 추격하면 임진년에 곽의사(郭義士)가 영우지방(嶺右地方)을 수복한 것 같이 우리도 오늘날 이 지방을 회복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

◎ 왕득인 의병장

정유재란 당시 구례에서 처음으로 의병을 모집해 왜군과 싸운 이는 왕득인(王得人)이다. 왕득인은 명종(明宗) 11년(1556) 구례현 남전리(藍田里)에서 태어났다. 그는 임진왜란 때에도 의병에게 군량미를 조달하며 의병들을 지원했다.

구례·남원성을 함락시킨 후 왜군들이 저지른 살인과 약탈 소식을 듣고 왕득인은 장정들을 모집했다. 50여명이 그와 뜻을 함께 하기위해 달려왔다. 9월에 왕득인과 의병들은 석주관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왜군의 보급선을 차단하고 괴롭혔다.

왜군은 석주관을 통해 공주까지 진격한 선봉대에게 탄약과 군량미를 보급하려 했으나 석주관 의병들이 이를 가로막자 석주관 공격에 나섰다. 왜장 고니시는 왜군 2천여 명으로 석주관을 공격했다.

의병들은 총을 쏘며 덤벼드는 왜군들을 상대로 용감히 싸웠다. 바윗돌을 굴려 내려 보내면서 대항했다. 그러나 당해낼 수가 없었다. 결국 왕득인과 의병군은 몰살당하고 말았다. 가족들은 왕득인의 시신도 수습하지 못했다.

왕득인 등이 석주관에서 순절 한 후 11월 초 구례에서 2차 의병이 다시 일어났다. 구례읍내 에 살던 20대 젊은 선비들이 주축이 돼 의병을 일으켰다. 이정익·한호성·양응록·고정철·오종 등 이른바 5의사군(五義士軍)이 합세한 의병연합체였다.

여기에 왕득인의 아들 왕의성(王義成)이 주축이 된 왕의성군(王義成軍)이 합세했다. 어버지의 시신조차 찾지 못한 왕의성은 아버지의 혼을 불러 초혼장(招魂莊)으로 장례를 치르고 부친의 원수를 갚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의병이 됐다.

5의사와 왕의성 주변으로 모인 의병 수는 수백 명에 달했다. 5의사 집안의 하인들과 산중에 피난 중이던 백성들이 왜군과 싸우다 죽기를 각오하고 의병이 된 것이다. 사실 당시 상황은 1596년 의병장 김덕령이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죽은 뒤 끝이었기에 선비들이 의병을 일으키기를 꺼려하는 형국이었다. 그런데 구례에서는 유림선비들이 의병에 앞장선 것이다.

당시 구례는 전라도 53개 읍 가운데 가장 읍세(邑勢)가 약했다. 그러면서도 정유재란 때 왜군들로부터 받은 피해가 가장 컸던 곳이다. 읍세가 약하면서도 왜군들의 무차별 살육으로 살아남은 장정들의 수가 별로 없었던 구례에서 500여명 이상의 의병이 일어난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 구례의병은 구례사람들의 의로움과 화엄사 승려들의 용맹함 때문에 가능했던 의병이었다.

11월 8일, 구례의병은 구례 화정에서 남원의병장 조경남과 왜적을 토벌할 계책을 논의했다. 11월9일에는 연곡에서 남원의병과 함께 연합작전을 펼쳐 왜군 60여명을 죽이고 포로로 잡혀있던 조선양민 200여명을 구출했다.

연곡 전투에서 패한 왜군은 대규모 보복전을 계획했다. 1만여 명의 왜군을 동원해 석주관 공격에 나섰다. 구례 의병은 화엄사에 격문을 보내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화엄사는 의승병 (義僧兵) 153명과 군량미 103석을 보내 왜군과 싸우도록 했다.

11월 하순에 큰 전투가 벌어졌다. 구례의병들은 지형지물을 이용해 전투에 나섰다. 석주성 아래 협곡을 사이에 두고 좌우측 산등성이에는 오의사군과 화엄사 승병(의승군)이, 산 정상에는 왕의성군이 포진했다.

구례의병은 계곡으로 왜군을 유인했다. 왜군이 다가오자 계곡 좌우 숲 속에 잠복한 오의사군이 의승군과 합세해 일제히 적을 공격했다. 계곡 북쪽 정상부에 진치고 있던 왕의성군은 산으로 오르는 왜적들을 향해 큰 돌을 굴러내려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수천 명의 왜군을 물리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비통하게도 오의사군과 의승군은 모두 전사했다. 산정에 있던 왕의성 부대만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때 의병과 의승들의 시체가 골짜기를 뒤덮었다. 피 냄새가 골짜기를 진동하였다. 나중에 사람들은 이곳을 피아골이라고 불렀다.

◎ 왕의성과 병자(丙子) 창의

인조(仁祖) 14년(1636) 병자(丙子)년 12월에 청이 압록강을 건너 침략했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하고 팔도에 원병(援兵)을 보내라는 교지(敎旨)를 내렸다. 이때 전라도 각처에서 많은 의병들이 일어났다.

전라도 출신의 이홍발, 최온(崔蘊) 등이 격문을 보내어 의거를 호소하자 각 고을의 의병들이 전주로 집결했다. 이때 왕의성은 “석주에서 구차히 살아남은 몸, 이제야 죽을 곳을 얻었노라”하고 많은 의병들과 군량을 모았다. 그는 화엄사 승 벽암대사(華嚴寺 僧 碧巖大師)의 3천 의병과 함께 과천으로 진군해 청나라 군사와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칠의사 비

■ 구례의병의 석주관전투 의미
 

칠의사 순절사적비

석주관 전투는 읍세가 가장 약했으면서도 왜군들로부터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구례사람들이 왜군에게 타격을 입히기 위해 석주진성을 근거로 벌인 싸움이었다는 점에서 대단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석주관은 영호남을 연결해주면서 또한 남해로부터 전라·충청도 진입을 저지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러나 이 같은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조선관군은 석주관을 너무도 쉽게 포기해 버렸다. 그래서 정유재란 초기 전라도가 왜군에 의해 너무도 쉽게 점령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칠의사순절부조

명나라 군사 역시 석주관 지키기를 외면했다. 석주관을 지키려고 하면 순천 왜교성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들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을 것이라 두려워하면서 석주관 진격을 외면했다.

결국 왜군의 병참선인 석주관을 장악하고 왜군에게 타격을 입힌 사람들은 칠의사와 의병, 그리고 화엄사 승려들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전라도 의병들은 대규모적이었고 타지역까지 진출해 왜군을 물리치던 근왕의병(勤王義兵) 성격이 짙었다.
 

칠의사 사당

그러나 구례의병은 구례지역의 선비들과 하인, 피난민, 승려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모두 힘을 합쳤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외부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대규모의 왜군들과 전투를 벌였다. 싸우다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석주관으로 올라간 것이다. 구례의병들은 두 차례의 대규모 석주관 전투에서 모두 순절했다는 점에서도 다른 의병전투와 차이점이 있다.

구례군문화해설사 임세웅씨가칠의사 비앞에서 석주관전투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과 전라도인들은 구례의병들의 숭고한 뜻과 기개, 그리고 석주관 전투의 처절함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고 있다. 전라도 지역의 정유재란 사에 대한 적극적인 이해와 함께 구례의병과 석주관전투를 널리 알리고 나라사랑의 표본으로 삼는 노력들이 절실하다.
 

칠의사 비 앞의 최혁 주필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도움말=구례군청 김인호·김은영. 임세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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