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주는 소중함

일상이 주는 소중함

<최유정 동화작가>
 

수능을 마친 딸은 매일이 즐거운 모양이다. 충분히 그럴 만하다.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시험이라는 압박에서 벗어났으니 어찌 하루 하루가 즐겁지 않겠는가? 절로 콧노래가 나올 것이고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고 싶을 것이다.

며칠 전 일이다. 제 방에서 뒹굴며 놀던 딸이 거실로 나오더니 내 귀에 핸드폰을 들이댔다. 요 며칠 딸아이가 지겹도록 듣고 있는 모 가수의 노래였다. 낮고 그윽한 남자 가수 목소리가 귓속으로 쾌속 직진을 했다. 나를 바라보는 딸아이 눈빛 역시 그윽했다. 엄마와 교감을 이뤘다는 뿌듯함이 딸아이 눈빛에 가득 담겨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당장 그만 둬.”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싶었지만 뱉어낸 말을 주어 담을 수 없었다. 무색을 당한 딸이 다시는 보지 않을 것처럼 휙, 내게서 등을 돌려 방으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 날 오후 내내 딸아이 방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뿐만이 아니다. 동네 가게에 빵을 사러 가서도 나는, 숨기고 있던 발톱을 드러내고 말았다. 바로 먹지 않을 거면 냉장 보관을 해야 한다는 둥 저기 저 빵은 새로 나온 빵인데 기가 막히게 맛있다는 둥 늘 주고받는 빵집 직원의 친절에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사실 빵집에 머물러 있는 동안 묻지 않는 말에 원치 않는 대답을 해야 하니 짜증이 치솟고 있었다. 아, 정말 왜 이러는 걸까?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빵 봉지가 천근만근, 무거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 마음은 벌써 거실 구석 책상에 가 있었으니…. 출판사에 보내야 할 원고만 계속 눈에 어른거렸다.

이렇듯 날이 선 채로 살아갈 때가 많다. 일에 치여 주변을 돌아보지 못 한다. 괜한 일에 상처를 주고 때론 상처를 받기도 한다. 원고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 쓰나미급 반성을 하게 되면서도 늘 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위태롭고 날카롭기만 하다. 하지만…!

계속되는 압박과 긴장을 견뎌낼 수 있는 것 역시 어쩌면 내 일상 때문일 것이다. 위태롭고 날카로운 일상 너머에 있는 내 또 다른 일상 말이다. 글 작업 앞뒤로 있는 사소하고 소소한 일상이 없었다면 나는 예전에 글 쓰는 작업을 걷어 치워 버렸을지 모른다. 나는 일상 너머에 있는 내 작고 사소한 일상이 내 글의 원천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원고를 출판사에 보내고 나면 신기하게도 들리지 않던 것들이 다시 들리게 된다. 딸이 틀어 놓은 모 가수의 노래가 귀에 팍팍, 꽂힌다. 설거지를 하다 문득 문득 딸아이가 틀어놨던 노래들이 생각난다. 나는 몇 번이고 딸아이에게 전화를 건다. 오늘 아침 같이 듣던 그 노래 제목이 뭐냐고, 꼬치꼬치 캐묻고 또 캐묻는다. 베란다 너머 소음처럼 들리던 아이들 뛰어노는 소리도 여지없이 다시 들린다. 햇빛 속에 뛰어노는 아이들 웃음소리는 천상의 소리다. 창문을 열어 둔 채 나는, 몇 시간이고 아이들 뛰어 노는 소리를 들으며 앉아 있곤 한다. 어디 소리뿐이랴? 보이지 않던 것들도 보이기 시작한다. 바삐 오가느라 한 동안 보지 못 했던 풀 숲, 작은 꽃이 보인다. 빵 집 직원의 미소 너머에 묻어 있는 일상의 피곤함도 보이기 시작한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사장에게 야단이라도 맞은 걸까?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그녀의 사생활까지 헤아리며 나는 괜히 가슴을 졸인다. 그렇게 나는 글을 쓰지 않는 많은 시간, 그것들, 작고 사소하고 별 거 아닌 것들에 눈을 맞추고 말을 건넨다. 작고 사소하고 별 거 아닌 것들과 관계하며 살아가는 동안 내 삶은 더할 수 없이 풍요로워지며 따뜻해진다. 비로소 내가 바라는 나로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일상이 주는 힘을 사랑한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찾아 낸 별 거 아닌 것들을 사랑한다. 그 별 거 아닌 것들이 모여 이야기가 되고 인생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 별 거 아닌 것들을 빼고 나면 인생은 물거품이라고 생각한다. 글을 쓰는 순간이 아무리 특별하고 의미 있는 시간일지라도 작고 사소한 일상, 별 거 아닌 것들이 주는 기쁨이 없다면 글 작업이 주는 특별함 역시 아무 의미 없어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순간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것! 그러고 보니 인생은 참으로 멋진 여행인 것 같다. 순간, 순간을 여행하는 것이고 별 거 아닌 특별함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니 말이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아가야겠다. 원고를 출판사에 보낸 새벽, 딸아이 핸드폰으로 듣는 음악이 참으로 감미롭다. 모처럼 게으르게 지내고 있는 딸아이도 사랑스럽다. 딸아이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들겨 주고 싶은 새벽이다.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