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참한 고문·죽음 장소에 용서·사랑의 성당이 들어서다

 

 

 

최혁 주필의 전라도 역사이야기
23. 천주교 순교지에 들어선 곡성성당
처참한 고문·죽음 장소에 용서·사랑의 성당이 들어서다
1827년 정해박해로 곡성 덕실·옹기마을 신자들 고초
곡성현감 성현묵 잔인한 고문·회유로 배교(背敎) 강요
천주교 광주교구, 순교현장 감옥에 1958년에 성당건립

곡성성당 모습. 옥(獄)터에 세워진 성지라는 의미의 옥터성지 비석이 보인다.

■190년 전 곡성 옹기마을에서 벌어진 어떤 싸움

지금으로부터 190년 전인 1827년 음력 2월 전남 곡성의 한 옹기마을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싸움은 주막집 아낙과 한백겸이라는 남자사이에서 시작됐다. 술에 취한 한씨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마을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시비를 벌이자 주막집 아낙이 이를 말리며 몇 마디 툭 뱉은 것이 큰 싸움이 돼버렸다.

“한 씨는 술만 먹으면 망나니가 돼 부니, 그게 머다요? 아버지가 그렇게 가르칩디여?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가 하늘에서 보믄 좋다 하것소. 이 마을 사람들 목숨부지 할라믄 맨 정신으로 조심조심 살아도 부족한 디, 저리 술만 들어가면 있는 말 없는 말 내뱉으며 패악 질이니 이일을 어쩐댜~”

“머시여~이 여편네가. 지금 머라했어? 패악질? 이것이 무슨 패악질이여. 하도 원통해서 하는 소리제.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이 사람 사는 것이여. 백정신세가 우리 신세보다 낫제. 하도 억울해서 그런다. 거기다 왜 또 울 아버지는 끌어대? 이 여편네가 어쩐다고 오장육부를 긁어대는 겨?”

한씨가 주막 한가운데 있는 술 도가니를 발로 걷어찼다. 와장창~깨지는 소리와 함께 막걸 리가 땅바닥으로 쏟아졌다.

“오매~저 징한 사람 하는 것 보소. 열불나면 그 불로 옹기나 굽제, 어쩐다고 애먼 술독을 깨부까? 글고, 술만 먹으면 말이 달라지는 게 머다요? 벌레처럼 사는 인생이지만 나중에 죽으면 천주님 곁에서 행복하게 지낸다더니…그게 천주님 믿다가 아버지 잃은 사람이 할 소리요?”

“아따~ 저 여편네가 기어코 가슴에 불 지르네~에라이~”

한 씨가 느닷없이 주막집 아낙에게 달려들더니 기어코 뺨을 때리고 말았다. 졸지에 뺨을 맞은 아낙이 코에서 피를 흘리며 땅에 쓰러졌다. 술독에서 술을 푸다가 마누라의 고함소리에 깜짝 놀라 마당으로 오던 아낙의 남편 전 씨가 득달같이 달려와 한 씨를 땅에 내팽개쳤다.

“야 이놈아~술 처먹었으면 곱게 집에 가서 잠이나 처 자든지, 아니면 토굴에 들어가 니가 좋아하는 천주님한테 제발 좀 잘살게 해주시소~하고 빌던지 할 것이지, 어쩐다고 남의 마누라를 오뉴월 개 패듯이 패냐? 내 마누라가 니 마누라냐? 이게 어디서 행패여?”

한 씨가 비록 술에 취했지만 험한 산 일에 몸이 튼실한 사람이었다. 몸을 곧추세우더니 전 씨의 멱살을 잡고 좌우로 흔들어대니 전 씨가 숨을 쉬지 못하며 고통스러워했다. 한 씨가 대뜸 전 씨의 얼굴에 박치기를 해대니 전 씨 얼굴이 피범벅이 됐다.

동네 사람들이 우르르 덤벼들어 두 사람을 떼어놓았지만 한 씨는 한 씨대로, 전 씨는 전 씨대로 분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술에 취한 한 씨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술이나 팔아먹고 사는 것들이 나를 무시해? 너는 다 산 목숨이다~이 놈아”

피투성이가 돼 전 씨 역시 맞받아치며 이렇게 말했다.

“그릇이나 굽는 니 팔자는 상팔자냐? 그래, 니가 죽나 내가 죽나 한번 해보자. 이 썩을 천주장이”

190년 전에 벌어진 일이니 싸움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어떻게 드잡이가 벌어졌는지는 알 길이 없다. 아마도 위에 적은 비슷한 말들이 오갔을 것이다. 이날 싸움은 한 씨의 술 주정만 없었다면 일어날 일이 아니었다. 마을사람들이 모처럼 흥겹게 놀고 즐길 수 있는 날이 난장판이 돼버린 것이다.

그러나 예비신자였던 한백겸과 주막집 내외간에 벌어진 이 다툼이 무시무시한 피바람을 몰고 올 것이라고는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이 다툼으로 인해 500여명이 옥에 끌려가 끔찍한 고문을 당하게 된다.
 

덕실마을 가마터로 가는 길. 멀리 보이는 마을이 덕실마을이다.

■천주교 박해와 옹기마을 사람들의 정체

이날 곡성 미륵 골(미신리)과 덕실마을(당 고개, 승법리) 사람들이 주막에 모인 것은 새 가마터가 열리는 것을 축하하기 위해서였다. 옹기를 구워서 먹고사는 미륵 골과 덕실마을 사람들은 유독 공동체의식이 강했다. 외지에서 흘러들어온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가족처럼 지냈다. 어쩌면 가족 이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신앙으로 한 몸처럼 살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천주장이들이었다. 1815년에 일어난 을해박해 때 관청의 추포를 피해 강원도와 경상도, 지금의 전라북도 지역에서 지리산 자락으로 흘러들어온 사람들이었다. 관군의 눈을 피해 지리산 자락으로 도망 온 천주교 신자들은 곡성 미륵 골과 당 고개에 모여 옹기를 구우며 함께 살았다.

을해박해는 1801년 발생한 신유박해에서 살아남은 천주교인들에 대한 2차 박해였다. 조선조정은 1800년 들어 천주교인수가 1만여 명으로 늘어나자 천주교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조정대신의 권력투쟁과 맞물려 있었다. 정조는 천주교에 대해 적극적으로 탄압하지 않았다. “사교(邪敎)는 자기자멸(自起自滅)할 것”이라는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정조가 죽고 정순왕후 대왕대비 김 씨가 어린 순조의 수렴청정을 시작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벽파는 천주교를 신봉하는 양반들이 많은 남인 시파를 몰아내기 위해 정순왕후를 움직여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다. 1801년 대왕대비 언교(諺敎)로 박해 령을 선포, 전국의 천주교도를 잡아들였는데 이 사건이 바로 신유박해다.

신유박해는 한국천주교회에 가해진 최초의 대대적인 박해였다. 신유박해 때 중국인 신부 주문모와 초기교회 지도자이던 이승훈과 정약종 등이 참수됐다. 정조 서자인 은언 군의 부인 송 씨와 며느리 신 씨도 사약을 받고 죽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경기·강원·충청의 산간지방으로 숨어들어갔다.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간 이도 상당수에 달한다.

1814년 전국에 흉년이 들었다. 먹을 것이 없어진 일부 백성들은 산속에 둥지를 틀고 살고 있는 천주교인들의 재산을 탐내기 시작했다. 여기에 지방수령이 가세하면서 박해는 들불처럼 번져갔다. 조정의 지시가 없었음에도 천주교인들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 경상도와 강원도에서 박해가 시작됐다. 1815년 을해박해는 천주교에 대한 2차 박해였다.

지리산 자락, 곡성 미륵 골과 덕실마을(당 고개)에 모여 옹기를 구워서 연명하던 이들은 바로 관군의 체포를 피해 경상도와 강원도 등지에서 흘러들어온 사람들이었다. 240명 정도 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주막집에서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던 한백겸 또한 천주교 신자였다. 한백겸의 아버지는 신유박해 때 숨진 한 덕운(토마)였다.

■주막집 주인의 고변으로 정해박해가 벌어지다

주막집 아낙의 남편 전 씨는 분했다. 마누라가 한 씨에게 뺨을 맞은 것도 분했지만 나이도 어린 한 씨에게 멱살을 잡힌 채 욕을 당한 것에 화가 솟았다. 평소 어렵게 사는 옹기마을 사람들의 처지가 딱해 모두를 살갑게 대했건만 이런 수모를 당하고 나니, 분이 차올랐다. 게다가 옹기마을 사람들도 한 씨만을 두둔했지 그 누구도 전 씨 편을 들지 않았다.

코를 씩씩 불며 화를 삭이던 전 씨가 무슨 생각이 들었든지 몸을 벌떡 일으켜 방문을 박차고 나갔다. 전 씨는 당고개로 향했다. 주막에서 벌어진 싸움으로 흥이 깨진 마을사람들은 가마터로 몰려간 모양이었다.

전 씨는 사람 기척이 없는 집이면 마구 들어가 뒤지기 시작했다. 마룻장을 들춰보니 묵주와 성경, 십자가가 나왔다. 다른 집 농짝에서도 같은 물건들을 찾아냈다. 전 씨는 몇 집에서 찾아낸 천주장이들의 물건을 들고 곡성관아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전 씨의 고변에 곡성현감 성 경묵은 대경실색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조정에서 이 같은 사실을 알면 파직은 물론이고 목숨을 부지하기도 힘든 일이었다. 나라에서 법으로 금지하고 있는 서학을 믿는, 그런 나쁜 놈들이 200명도 넘게 곡성 땅에서 살고 있었다니…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조상도 모르고 임금도 모르는 그런 놈들이 여기에? 당장 호통이 내려졌다.

“아니~서학장이들이 내가 다스리는 곡성 땅에 살고 있었다고? 그것도 여기서 이십 리도 되지 않은 곳에? 그릇을 구워 먹고 사는 그 천한 놈들이 다름 아닌 천주장이들이었다고? 여봐라~당장 그놈들을 모두 끌고 오너라. 내 이놈들을 물고를 내고야 말 것이다!”

그날 덕실마을과 미륵 골 옹기마을에서 240여명이 끌려왔다. 곡성현감은 객사를 임시로 감옥으로 만들어 천주장이들을 가뒀다. 그런 다음 이 같은 사실을 전주감영에 알리고 천주장이들을 고문하기 시작했다. 포졸들이 오기 전 미리 몸을 피한 신자들은 더 깊은 산속으로 도망갔다.

그러자 전주감영에서도 포졸들을 풀어 천주장이 체포에 나섰다. 순창과 임실, 장성, 고산, 전주까지 샅샅이 뒤졌다. 전주에서만 240여명이 붙잡혔다. 곡성에서 시작된 천주장이 색출작업은 4개월 동안이나 계속됐다. 천주장이를 잡아들이는 일은 전라, 경상, 충청 등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를 정해박해라 부른다.

정해박해가 앞서 벌어졌던 신유·을해박해와 다른 점은 순교자가 적다는 것이다. 체포된 천주교인들은 500여 명에 달했으나 다른 박해 때에 비해 목숨을 잃은 자가 적다. 이는 지독한 고문으로 천주교를 버린 신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정해박해 때 순교한 사람은 16명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곡성현감은 잔인했다. 3일 동안 모진 고문을 계속했다. 그런 다음 뼈가 바스러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장독(杖毒)이 든 그들을 모진 추위 속에 방치했다. 먹을 것과 마실 것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그리고 교활했다. 천주장이들이 목숨 때문에 신앙을 버리는 것을 즐겼다.

곡성현감은 수시로 감옥에 찾아와 이렇게 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너희들이 서학을 믿지 않는다고만 말하면 지금 당장 풀어주마. 너희들이 믿는 천주가 정말 신이라면 지금 당장 너희들을 구해줄 수가 있을 텐 데, 아무런 조짐이 없지 않느냐? 부질없는 믿음 때문에 목숨을 잃지 말고 현명하게 처세해라. 자~이 묵주를 발로 밟고 성경을 찢기만 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너를 풀어주마”

많은 이들이 고문과 허기, 추위, 공포를 이기지 못해 배교(背敎)했다. 성경묵 곡성현감은 끝까지 버티는 신자들은 전주감영으로 보냈다. 공명심에 사로잡힌 전라감사 이광문(李光文) 역시 고문으로 악명을 떨쳤다. 배교할 때까지 옥에 가두고 붙잡아뒀다. 무려 9년 동안이나 옥에 갇혀 있다가 순교한 이도 있다.

그렇지만 체포된 신자 대부분이 고문과 옥살이의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배교했다. 감옥에서 풀려나온 뒤 그들은 회개 가운데 다시 신앙생활을 했겠지만 평생 마음의 짐을 지고 살았을 것이다. 옥에서 풀려나온 이들은 참회 속에서 더 깊은 산으로 숨어들어갔다. 신앙공동체였던 곡성 미륵 골과 덕실의 옹기마을은 그렇게 해체됐다. 천주교인들이 절멸(絶滅)되고 만 것이다.

덕실 마을 가마터 정해박해 진원지. 덕실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는 정해박해 진원지 기념석

■고통의 장소가 평화의 장소가 되다

천주교 광주교구장이었던 하롤드 헨리 주교는 1957년 순교의 현장인 객사자리(정해박해 때 감옥으로 사용됐던 곳)를 매입하여 본당을 설립키로 결정했다. 정해박해 후 130년이 지난 뒤였다. 허 미카엘 신부를 파견해 신도 수 10여명에 불과했던 이곳에 제대를 봉헌했다.

1958년 10월 6일 마침내 성당이 준공됐다. 또 2002년에는 신앙유지를 위해 옹기를 구우며 생활했던 신앙선조들을 기리기 위해 옹기형태의 연못(하늘 못)이 마련됐다. 곡성성당은 성당내부나 외부 모두가 곡성 옹기마을의 순교자나 핍박받았던 믿음의 선조들을 기리기 위해 꾸며졌다.

곡성성당 본당 옆에 조성된 하늘 못의 옹기들. 정해박해 때 지금의 성당 터에 있었던 감옥에서 순교했던 덕실 옹기마을 천주교인들을 상징하고 있다.

곡성성당의 분위기는 그래서 다른 성당과는 사뭇 다르다. 순교자들의 피위에 세워진 성당이어서인지, 전체적으로 엄숙하다. 성당의 규모는 작으나 2층 건물의 성당에는 범접키 어려운 숭고함이 있다.

곡성성당 앞에서면 왼쪽에는 ‘정해박해진원지’라는 문패가, 오른쪽에는 ‘천주교곡성성당’이라는 문패가 보인다. 성당 건물 정면에는 두 팔을 벌리고 이 세상에 복음과 사랑을 내려 보내는 예수 상이 있다. 성당내부는 정해박해를 상징하는 옹기가마터 형상의 돔형이다. 로마군병의 창에 찔려 피가 흐르던 예수님의 갈비뼈를 형상화한 것이기도 하다.

곡성 성당 내부

성당내부는 처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화려하다. 아마도 성당 창문을 장식하고 있는 스테인드글라스 탓일 게다. 여러 순교자의 모습을 담았는데 남도 쪽에서는 여간해서 보기 힘든 화려한 작품들이다. 자칫 엄숙 분위기로만 흐를 수 있는 성당 내부 분위기를 상당히 밝게 해주고 있다.

천주교와 개신교에서는 예수에 대해 세상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희생양이 되신 분이라 설명한다.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인류는 구원을 얻었다고 가르친다. 당시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곡성감옥에 끌려온 천주장이들은 참으로 이상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곡성 옹기마을 천주장이들은 감옥에 끌려와서도 한사코 서양코쟁이들이 믿는 신(神)을 버리지 않는다고 버텼다. 그러다가 고통에 못 이겨 “이제는 예수와 마리아를 믿지 않겠다”고 토설한 뒤 감옥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몇몇은 예수가 이 세상의 구원자이며,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모두 우상이라며 끝까지 버티다 목숨을 잃었다. 조선 관리와 일반 백성들에게 천주장이들은 ‘반 미친 사람’이었다. 조상들에게 제사도 지내지 않는, 불충한 사람들이었다.

그렇지만 배교했던 사람들은 육신의 고통에 연약했을 뿐, 마음속으로는 예수와 마리아를 저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배교를 하지 않고 끝내 순교했던 이들은 육체적으로 좀 더 강인했고 믿음의 깊이가 더 크고 깊었을 뿐이다. 곡성성당의 예수상은 배교자들의 불쌍한 영혼을 보듬어주는 한편 옹기마을 천주장이들을 감옥에 처넣고 주리를 틀던 현감과 그 수하포졸들까지도 이미 오래전에 용서했는지 모른다. 원한과 통곡이 가득했던 감옥 터는 예수의 사랑과 용서가 가득 찬, 구원의 장소로 바뀌었다.

■곡성옥사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곡성성당에 조성된 곡성관아 옥사. 옥 앞에 죄인을 묶어놓도 곤장을 때리던 틀이 보인다.

곡성성당은 2008년 10월 본당 설립 50주년 기념사업으로 성당 뒤편에 옥사(獄舍)를 복원하고 야외 십자가의 길을 조성했다. 옥사는 최대한 옛적 감옥분위기를 살리려고 애쓴 것이 역력하나 조금은 현실감이 떨어진다. 옥사 내에 밀랍으로 만들어져 있는 ‘천주장이 죄인’들의 옷차림과 감옥내부가 너무 깨끗해서 인 듯싶다.

곡성옥사 내부에 전시돼 있는 정해박해 당시에 옥에 갇혀 있던 천주교인들(밀랍인형). 기도를 드리고 있는 모습이다.

게다가 감옥에 갇힌 죄수들에게서 흘러나오는 신음소리나 하소연도 없으니 ‘감옥 맛’이 날 리 만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곡성성당 내의 옥사는 조선시대 감옥의 분위기를 헤아려볼 수 있는 몇 되지 않는 장소다. 옥사 내에는 포졸들이 고문에 사용했던 각종 도구와 고문장면을 그려놓은 그림들이 비치돼 있어 ‘고문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곡성옥사 내부. 옥 안쪽에 주리를 틀던 형틀이 보인다. 각종 고문도구와 고문을 받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들이 전시돼 있다.

곡성성당 뒤편에 재연돼 있는 옥사는 당시의 감옥 풍경을 그려보는데 조금은 도움이 되지만 실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을 감옥 내부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조선시대 감옥은 일단 지옥이었다. 다산 정약용이 그렇게 말했다. 다산은 그의 저서 <목민심서>에서 감옥을 ‘이승에서의 지옥’이라고 표현했다.

다산은 감옥에서 겪는 다섯 가지 고통을 형틀의 고통, 토색질의 고통, 질병의 고통, 춥고 배고픈 고통, 오래 갇혀 있는 고통이라 했다. 그러면서 이중에서 가장 큰 고통은 감옥에 오래 갇혀 있는 것이라 꼽았다.

심재우씨가 쓴 <조선시대 형벌제도>에 관한 글을 보면 조선시대 형법은 일반적으로 명의 <대명률>(大明律)을 따랐다. <대명률>에는 태(笞)·장(杖)·도(徒)·류(流)·사(死)라는 다섯 가지 형벌이 있었다.

태·장형은 가벼운 죄를 범한 이에게 태와 장으로 죄인의 볼기를 치는 벌이었다. 태형은 10~50대의 매를, 장형은 60~100대의 매를 치는 것이었다. 도형은 중형을 저지른 자를 관아에 붙들어두고 중노동을 시키는 벌이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노역이었다.

유형은 먼 곳으로 유배를 보내는 벌이었다. 사는 극형인 사형을 뜻하는 것이다. 원래 옥사를 판결할 때는 최고 30일을 넘지 않도록 규정돼 있었다. 그러나 이는 규정일 뿐이었다. 지방수령들은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죄인들을 감옥에 붙들고 있으면서 죄를 캐물었다.

지방수령들이 죄인들의 범죄를 입증하는 방법은 단순했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고 일갈한 뒤 고문을 통해 자백을 받는 것이었다. 지방수령이 원하는 답(以實直告)이 나올 때까지 장으로 때리고, 불로 지지고, 주리로 다리를 틀었다.

조선시대 사용된 형구(刑具)는 세 가지였다. 태와 장, 신장, 곤장이었다. 몽둥이인 태는 일반적으로 물푸레나무로 만들었다. 신장은 가시나무로 만든 것으로 끝이 넓적해 죄인의 볼기와 넓적다리를 때리는데 사용됐다. 곤장은 버드나무로 만들었는데 충격이 심해 군영에서만 사용됐다.

이외에도 수많은 고문방법이 있었다. 발가락을 뽑아버리는 난장, 나무 두개를 정강이 사이에 얽어 끼운 뒤 두 다리를 비틀어대는 주리, 무거운 나무로 무릎을 내리누르는 압슬형, 인두로 지지는 낙형, 여러 개의 붉은 몽둥이로 마구잡이로 두들겨 패는 주장당문 등이 그것이다.

곡성현감이나 전라감사는 옹기마을 천주장이들을 오래 감옥에 가둬두고 고문했다. 사람을 쉽게 상하게 만드는 곤장뿐만 아니라 앞에 열거한 각종 고문을 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처절한 고통과 죽음에 대한 공포로 옹기마을 상당수 신자들은 고개를 떨구고 신앙을 버렸다.

■감사가 절로 나오는 곡성성당

본당 옆 야외정원의 제단과 성모마리아상

곡성성당을 찾는 이들은 우리가 누리는 신앙의 자유가 참으로 소중한 것임을 새삼 깨닫는다. 그리고 초기 천주교 신자들이 얼마나 심한 박해와 고초 속에서 그들의 신앙을 지켜냈는지를 알 수 있다.

곡성성당은 야외 십자가의 길을 조성하는 등 성당 주변을 공원화하는 사업을 꾸준히 펼치고 있다. 또한 미산리 가마터와 성당을 잇는 정해박해 기념성지 조성을 추진 중에 있다. 과거의 곡성은 모진 고문을 당하던 천주교인들이 내지르던 곡성(哭聲)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어느 곳보다 평화와 여유로움이 가득한 곡성(谷城)이다. 사람들은 곡성에 을 찾아와 섬진강과 지리산의 품에 안기면서 행복을 느낀다. 곳곳에 볼거리와 맛 거리가 즐비하다. 선조들의 풍류와 문학의 향기 또한 넘쳐난다. 곡성성당은 ‘평화 곡성’의 중심에 있는 곳이다.
 

김대건신부의 동상과 옹기들이 세워져 있는 하늘 못

사진=위직량
도움말=손민호씨
자료제공=곡성군청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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