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봄날

12월의 봄날

<나선희스피치커뮤니케이션즈 대표>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린다./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 정호승 시인의 ‘첫눈 오는 날 만나자’의 한 대목이다. 눈이 어여쁘게 내린 날 아침, 절친한 후배는 SNS에 이 시를 올려놓고는 “눈이 온다고 이른 아침부터 전화해주는 이가 있어 행복한 아침”이라고 덧붙였다. 사십을 훌쩍 넘기고도 여전히 솔로인 그녀라서 누군가 생긴 건가 싶어 내 마음이 다 설레었다. 그래도 확인 전화를 하진 않았다. “선배, 남자는 무슨… 우리 엄마 전화였어.” 이런 반응이 돌아온다면 내가 더 아쉬울 것 같았다. 대신 내 맘대로 상상했다. 뒤늦게 찾아온 그녀의 핑크빛 사랑을 감정이입하며 즐겼다. ‘첫눈 오는 날 만나자’를 인터넷에서 다운 받아 출력 버튼을 누르고 커피를 내렸다. 커피메이커에서 커피가 쫄쫄쫄 소리를 내며 내려온다. 그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A4 용지에 인쇄돼 나온 시를 또박또박 소리 내어 읽는다. 제법 근사하다. 내 목소리에 내가 취한 아침, 창밖에선 여전히 소담스런 눈이 내린다. 창 밖에서 순하게 내려준 눈 덕분에 창 안의 일상이 행복이 된다.

나이가 들수록 소소한 것에 행복해진다. 길을 가다 군고구마 장수를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 없다. 집에 고구마가 박스 째 저장되어 있어도 비싸게 군고구마를 산다. 군고구마가 담긴 노란 봉지를 가슴에 품으면 몇 겹의 옷을 헤집고 온기가 전해진다. 그러니 군고구마는 반드시 노란 봉지에 담겨져야 한다. 노란 군고구마 봉지를 안고 집으로 가는 길은 눈보라가 몰아쳐도 따뜻하다.

주일 미사를 마치고 나올 때 성당에서 나눠주는 붕어빵의 행복도 뺄 수 없다. 붕어빵은 함께 먹어야 제 맛이다. 앗, 뜨거! 왼 손으로 던지고 다시 오른 손으로 옮겨가며 호들갑 떠는 재미는 덤이다. 애어른 할 것 없이 붕어빵 한 개씩 들고 성당을 나선다. 나는 머리부터 먹는데, 당신은 꼬리부터냐며, 남편과 실없는 농담을 하며 먹다보면 어느새 집에 도착한다. 밋밋할 뻔 했을 중년 부부의 일요일이 붕어빵으로 훈훈해졌다.

어느 겨울, 선물 받은 한라봉 한 상자를 들고 와, 앉은 자리에서 두 개를 홀라당 해치웠다. “아따, 그나 겁나 잘 먹네잉? 앞으로 한라봉만 사들고 와야겠네! 그렇게 좋아한지 몰랐네, 몰랐어!” 옆에서 보던 남편이 입을 다물지 못한다. 나도 처음 알았다. 내가 한라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한라봉은 비싸서 귤처럼 쉬 사지지 않았다. 내 손에 쥐어져도 어미라고 자식들 입에 넣어줄 생각만 했다. 자식 둘 다 집을 떠나 없으니 이제야 한라봉이 내차지가 됐다. 세 개째 한라봉 껍질을 까놓고는 배가 불러 더 이상 먹지 못했다. ‘미안하다, 나선희. 네가 뭘 좋아하는지도 몰라줘서…’ 나에게 미안해하고 있는데 남편이 거든다. “아무도 주지 말고 나머지 자네 혼자 다 먹소잉?” 남편의 한마디에 울컥해진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오버랩되어서다. 아버지 드시라고 한라봉을 사들고 갔다가 한 쪽 얻어먹는데 아버지도 그랬었다. “우리 선희가 한라봉을 좋아하는구나. 나머지 도로 갖고 가 네가 먹어라.” 아버지는 경쾌하게 움직이는 딸 입모양만 보고도 알아차린 거다. 순간 아버지가 보고 싶어져 남은 한라봉 싸들고 아버지 대신 어머니께 냅다 달려갔었다.

자꾸만 주고 싶은 12월의 사람들은 행복하다. 이맘때가 되면 어김없이 이웃돕기 성금 모금이 이어지고 자선냄비도 등장한다. 늘 만나던 사람들과 굳이 송년회라는 이름으로 또 만나서는 달력, 새해 다이어리와 같은 선물을 주고받는다. 티격태격하던 사람끼리도 한 해 동안 고마웠다고 내년에도 잘 살아보자고 덕담을 나눈다. 바쁘다는 이유로 못 만나고 지냈던 이들과도 얼굴 맞대어 기어이 팥죽이라도 먹어야 서운치 않다. 그래야 개운하다.

행복의 다른 이름은 평화라고 한다. 한 해 동안 벼라 별일 다 겪고 나니 소소한 일상이 행복한 게 아닐까. 진정한 행복은 고난과 시련을 거치고 나서야 오는 것. 언제나 행복해 보이는 사람은 언제나 좋은 일만 있어서가 아니다. 가시밭길을 지나왔고 현재도 고난의 여정일 수 있다. 그 와중에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전화를 거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의 12월은 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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