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조바위 쓴 조선여인의 차분한 얼굴”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2회)
“서울은 조바위 쓴 조선여인의 차분한 얼굴”
헐벗은 산에 버섯 같은 초가집들…조선인 몸매 날렵 행동 우아
대부분 매력적인 하얀 옷 입고 아이들 옷은 다양한 색으로 치장
 

정월 초하루 나들이

스코틀랜드 출신의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1887∼1956)는 1919년 3월부터 5월까지 3개월 동안 동생 엘스펫 K. 로버트슨 스콧(Elspet K. Robertson Scott)과 함께 조선을 여행하면서 조선과 관련된 많은 그림과 글을 남겼다.

키스 자매의 한국에 대한 그림과 글은 1946년 영국 허치슨 출판사가 <올드 코리아, 고요한 아침의 나라>(Old Korea, the Land of Morning Calm)라는 제목으로 출간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 책에는 키스가 제작한 총 39점의 그림과 동생 엘스펫의 설명문이 함께 수록돼 있다.

키스의 수채화, 작품들은 우수성과 희귀성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러던 중 미국 이스트 캐롤라이나 대학의 교수로 근무하던 송영달 교수가 키스의 작품들을 우연히 발견하고 수집하면서 한국에 알려졌다.

송 교수는 키스 자매의 작품과 방문기를 모아 지난 2006년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 1920~1940>을 출간했다. ‘도서출판 책과 함께’ 류종필 사장의 전폭적인 협조를 받아 발간된 이 책에는 <올드코리아>에 실린 39점 작품 외에 송 교수가 수집한 27점이 더해져 모두 66점의 그림이 실려 있다. 지난해 10월의 1회 기사에 이어 2회 기사를 소개한다.

■서울

우리는 만 4년간 일본에 머물면서 친구도 많이 사귀었고, 일본 사람들의 능력과 적응력, 관용성, 지적 호기심, 일상 용구의 단순한 아름다움에 탄복하기도 하며, 인력거로 여기저기를 다니기도 하고, 기차여행도 하고, 도쿄의 데이고쿠(帝國)극장 등에서 연극을 즐기기도 했다. 마침내 우리는 오랫동안 염원하던 한국 여행을 떠나 우리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로 결정했다.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야간열차는 각종 설비가 잘 되어 있고 편안하고 깨끗하였으며, 두 겹의 유리창 사이로 아침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나무 하나 없는 야트막한 언덕의 경치는 원시적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직 봄은 일러서 겨우 나온 볏 잎은 약간의 푸른빛을 보일 뿐이었고, 동산들은 그 둥그런 모습이 마치 오래된 한국 도자기를 닮아 사람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했다.

붉은 해가 올라올 무렵, 달리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땅은 옛날 도공들이 사용했을 듯싶게 질펀했고, 끝없이 이어지는 논밭 사이로 가느다란 농로(農路)가 이어졌다 사라졌다 계속되고 있었다. 가끔 여기저기에 초가집들이 모여 있었는데, 기차 안에서 보기에는 사람 사는 집이라기보다는 거대한 버섯들의 군락지(群落地) 같았다.

날이 밝아오자, 암갈색의 황소들이 잔뜩 짐을 싣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어떤 소는 산더미처럼 실은 장작에 가려서 몸집은 보이지도 않고 다만 사람이 옆에서 걸어가거나 끌고 가는 모습만 보였다. 모두들 시커먼 머리에 상투를 틀고 있었다. 기차 역마다 사람들이 모여 서 있었는데, 모자를 쓴 사람도 있었고 안 쓴 사람도 있었지만, 하나같이 상복(喪服) 비슷한 하얀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흰옷은 사치스럽고 고급스럽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정작 그 옷을 세탁할 사람들을 생각하면 딱한 생각이 들었다. 때때로 키가 크고, 흰옷을 입은 남자들이 기차 안으로 들어왔다 나갔다 하곤 했다. 처음에는 이 갓이라 부르는 모자가 괴상하게 보였지만 시간이 지나니 차차 점잖게 보였다. 아마도 모자란 처음 볼 때에는 좀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그런 물건인가 보다.

우리는 처음엔 좀 우습다고 생각하여 웃음을 터트렸으나 한국 사람들의 진지한 표정을 쳐다보면서 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한국 남자들은 참 좋은 사람들 같았다. 그들은 몸매가 날렵하고 행동거지가 우아하고 표정은 침착했다. 단 하나, 극동 어디에서도 그렇지만, 침을 아무 데나 마구 뱉는 것은 정말 문제였다.

긴 여행 중에 보니 기차 역마다 두세 사람의 일본인 무장 군인이 카키색 제복을 입고 서서 경계를 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독립운동의 기운이 강했고, 고종황제의 장례식 날에는 전국적으로 시위가 있었다. 하지만 창밖으로 볼 때는 모든 풍경이 마치 조바위를 쓰고 서 있는 한국 여인의 차분한 얼굴 마냥 평안하고 조용해 보였다.
 

두명의 한국 아이들

■두 명의 한국 아이들

색동저고리를 입은 남매인 듯 보이는 두 어린이가 문 앞에 서 있다. 이 그림은 1919년 처음 제작되었고, 그 후 1925년, 1935년에 인쇄되었다. 이 작품은 1940년 크리스마스실의 도안으로도 사용되었는데(실에 사용된 것은 위에 실린 작은 그림이다) 거기에는 일제의 탄압에 얽힌 일화가 있다.

선교사 셔우드 홀은 한국에서 결핵으로 죽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고, 크리스마스실을 만들어 팔아 결핵퇴치운동을 하고 있었다. 매년 실 제작을 해 오면서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유독 그해에는 인쇄까지 다 마치고 배부하기 직전에 일본 경찰이 들이닥쳐 압수해 간 것이다. 이미 당국의 허가를 받고 준비했던 홀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알아보니, 그림에 산이 너무 높아서 군사법에 어긋나며, 서기 1940년이라고 연도를 쓰면 안 되니 일본 정부의 연호를 쓰라는 등 일제의 억지는 장난스러운 트집에 불과했다. 원화를 그린 키스에게 홀이 저간의 사정을 이야기하자, 키스는 화가 많이 났지만 좋은 일을 위해서 참기로 하고, 다시 그림을 그렸다. 금강산을 생각하고 그린 산은 대문 속에 집어넣어 20m가 안 넘는 것으로 보이게 하고, 서기 연도 대신 9년째 발간이라고 숫자를 써넣었더니 일제가 허락을 했다.

아이들의 의상은 그 디자인에 있어서 부모나 조부모가 입는 옷과 다를 바가 별로 없으나 대신 색깔이 더 다양하다. 어린 여자아이들은 넓은 분홍장미 색깔의 치마를 발목까지 내려오게 입고, 어린 남자 애들도 같은 색깔의 옷을 입는다. 조금 큰 남자아이들의 바지는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통이 넓고 발목까지 내려간다. 갓난아기들의 저고리에는 색동 소매가 달려있다. 파란 하늘, 회색 돌, 혹은 빛바랜 담을 배경으로 해서 볼 때 이런 색동옷들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두 명의 학자

지저분한 거리를 지나가다 이 두 학자를 보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그런 모습을 별로 의식하지 못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아주 눈에 띄는 흥미로운 광경이었다. 마침 그림을 그리기로 약속한 다른 사람을 찾아가던 길이라 그날은 그냥 지나쳤다. 하지만 그 다음날, 나의 친구이자 고문 격인 게일씨에게 그 노인 학자들을 스케치할 수 있게 해달라고 졸랐다. 한 가지 문제는 내가 외국인일 뿐만 아니라 여자라는 사실이었다.

게일씨가 한참을 설명했더니 그 학자들은 그제야 우리의 목적이 무엇인지 깨닫고 자못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협상은 한참이나 끌었는데 그게 동양식 대화법이었다. 그들과 얘기하려면 용건을 빙 둘러서 해야 하므로 요점까지 도달하는 데 좀 시간이 걸렸다.

내가 스케치하기 시작하니 그들은 곧 중국 고정 얘기를 나누면서 금방 내 존재를 잊어버렸다. 내가 훗날 한국을 다시 찾아왔을 때, 그때도 이런 멋진 사람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주막

■주막

이곳은 남자들과 쥐들만이 출입하는 곳으로, 고급 음식점은 아니고 막일꾼들이 와서 식사를 하는 곳이다. 맛있는 음식 냄새가 솔솔 밖으로 새어 나온다. 솥에는 매운 고추 또는 다른 양념이 들어간 국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창문 안쪽에 보이는 남자는 커다란 반죽을 이기면서 그 속에 대추를 집어넣고 있다.

주막 안에는 음식을 만들고 담아주는데 사용되는 구리 그릇과 놋그릇들이 반짝거리고 있다. 주막은 추운 겨울날 거리를 걸어가거나 무거운 짐을 나르는 시골 사람들에게 아주 인기 있는 곳이다. 진한 국수 국물이 솥에서 천천히 끓고 있다. 국수는 가늘고 길며, 한국 사람들은 이것을 마치 이탈리아 사람들이 마카로니 먹을 때처럼 급하게 먹어치운다.

선반 위에 있는 항아리들에는 갖가지 종류의 절인 것들이 있고 큰솥에서는 밥이 끓고 있다. 한국 쌀은 일본이나 중국산보다 좋아서 많은 사람들이 선호한다. 주막의 부엌에는 그 외에도 마른 생선, 배 깎은 것, 그리고 그 유명한 배추김치가 있다. 한국 사람들은 음식을 예쁜 놋그릇에 담아서 놋숟가락으로 먹는다. 젓가락도 사용한다.
 

연날리기

집에서 식사할 때는 밥그릇을 손에 들고 먹는 것이 실례지만, 음식점에서 먹을 때는 좀 더 자유스럽다. 아마 여자들은 거의 외식을 안 하고 남자들만 주막에서 식사를 하는 탓인지도 모르겠다. 주막의 바닥은 아주 잘 다진 진흙으로 되어 있고 쥐들이 맘대로 드나든다. 또한 파리들이 쉴 새 없이 음식물에 달라붙는다.
 

한국의 어린이들

한국 남자와 파리가 다른 점 한 가지는 한국 남자는 식사 후에 자기 방에서든 길거리에서든 한바탕 자는 것이 상례인데, 파리는 불행하게도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집을 닮은 초라한 다른 주막이 하나 있었는데 그 집 문 위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달을 쳐다보는 데 최고로 좋은 집.”

글/엘스펫 K. 로버트슨 스콧, 번역/송영길 교수, 정리/촤혁기자kjcho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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