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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2>-장계(狀啓)

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

충무공 정충신 장군<2>-장계(狀啓)

일국의 왕이 난을 피해 외국으로 피신한 사례도 사천년 역사상 없는 일이고, 전국토가 유린되는 수모도 처음있는 일이다. 강 건너는 부모국인 명이 아니라 오랑캐 나라인 후금국이다. 그 땅을 거쳐야 명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런데 임금은 후금국 영수를 소학 한 구절 외지 못하는 축생(畜生) 정도로 취급했으니 붙들리면 더 험한 꼴을 당하고, 목숨마저 잃을 수도 있다. 앞에는 왜, 뒤에는 후금. 이래저래 나라는 칼날 위에 서있다.

그러나 광주목사 권율은 가슴 뜨거운 한줄기 빛을 보았다. 전라도 사람들이 하나같이 단결해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군대를 물리친 것이다. 그래서 밤을 새워 왕에게 올리는 첩서, 장계(狀啓)를 썼다.

-하늘이 어두운 운을 내려 국가가 불행한 때를 만나 관문과 요새를 지키지 못하고 한 사람도 성을 보호하지 못하여 각처를 보전치 못하고 흉적의 소굴이 되었나이다. 전국이 곳곳마다 유린되고 우리의 모든 군사는 어디서나 불리하옵니다. 왜적은 금산을 침범하여 권종(權悰)을 죽이고 의병은 진산에 이르러 조헌(趙憲)이 죽었습니다. 왜 적장 고바야카와는 수 만을 이끌고 정탐하여 승려 영규(靈圭)가 거느린 칠백 용사가 전멸하였는데, 이때에 진영에 앉아서 왜적을 규탄하며 탄식만 하고 있어서 되겠나이까. 용감한 군졸은 말머리를 남으로 돌려 각처의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고, 막료들과 숙의를 거듭하였습니다. 황진(黃進)은 용맹함이 능히 군을 통솔하여 선봉이 되고, 권승경(權升慶·권율의 조카)은 울분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기병(騎兵)을 인솔하여 이치령(梨峙嶺)에서 적을 만나 싸웠습니다. 이때 병졸은 천명이었으나 의로써 북을 울리니 적은 만 명이 넘어 용맹함을 믿고 돌진하여 왔으나 묘시(卯時)에서 유시(酉時)까지 세 번을 승리하였습니다. 한 사람이 백 명을 당해내니 적은 패하여 퇴각하였는데, 열 명 중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으며, 적의 시체는 팔십 리까지 쓰러져 있었으나 우리 군사의 죽은 자는 열한 명 뿐이었습니다. 기병은 요충지에서 적의 퇴로를 차단하여 적장의 머리를 베어 바치게 하였습니다. <이치전첩서(梨峙戰捷書) 중 일부>

호남의 의병들이 활과 죽창과 낫을 들고 관아로, 군영지로, 성터로, 장터로 군집했다. 왕은 두려워서 내빼고 있지만 백성들이 머리에 수건 질끈 동여매고 전의를 불태우며, 이치령과 웅치재로 모여들었다. 서인(西人)이 제거될 때 동래부사직이 파직되어 담양에 낙향해 있던 고경명과 두 아들 고종후 고인후가 의병군을 모아 웅치재에 이르렀고, 동복현감 황진, 나주판관 이복남, 김제군수 정담, 전주만호 황박, 승려 영규 등이 의병들과 함께 이치령에 이르러 왜군 일만사천 여 병력을 패퇴시켰으니 그야말로 놀라운 전과였다.

이런 백성들의 용전분투를 진려(振勵)하기 위해서도 왕이 돌아와야 한다. 의연히 돌아와 용기를 북돋고 종묘사직이 살아있다는 자존감을 보여야 한다. 관군은 겁먹고 패주하고 있지만, 백성들이 대신 짓밟힌 강토에서 용맹스럽게 일어나고, 의병이 일어나고, 적장의 목을 베는 이름없는 별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렇게 격정적인 감동의 장계를 써서 보내려는데 경험많은 병졸들을 제치고 열일곱 살의 소년이 대뜸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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