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

충무공 정충신 장군<5>-장계(狀啓)

태어나면서부터 능히 볼 줄 알았고, 어려서부터 명민했다고 하지만, 자기 발언이 분명한 소년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자 그는 가벼운 현기증마저 느꼈다. 충신은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지, 생각하는 바가 속인들과는 사뭇 달랐다. 그의 눈은 저 멀리, 저 높은 곳에 가있었다.

“큰 세상을 보겠다고 하렸다?”

“그렇사옵니다.”

“음, 그렇군.”

권율 역시도 생각하는 바가 있었다. 세상의 이치는 사뭇 겉돌고 있었다. 국상(國喪)을 당해서 갓끈을 오른쪽으로 돌려 매야 하느냐, 왼쪽으로 돌려 매야 하느냐 따위로 피터지게 싸우는 조정 대신들의 꼴을 볼라치면 당장 부수고 싶은 욕구마저 솟구쳤던 것이다. 하지만 잘못 나섰다가는 어느 칼에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래서 숨어버렸다. 아니, 그 역시 그런 기득권의 한 자락을 붙잡고 안주했던 것이다.

-답답한 일이다. 답답하고 말고. 그런데 저 아랫것이 사물을 꿰뚫고 있으니 두렵고도 빛이 보이는구나…

권율은 속으로 뇌었다. 무엇 하나 결정하는데도 공리공담으로 쭈볏거리는 세상, 그것도 파벌에 따라 갈렸다. 신료들은 가치의 문제로 다투는 것이 아니라 진영에 따라 상대방을 묵살하고 부정했다. 상대 진영의 논리가 옳아도 내 편이 아니면 이단시되고 배척되었다.

붓 한 자루보다는 화살 한 촉이 절실했는데도 흰 수염 휘날리며 체면과 절차를 들먹이며 사안을 깔아뭉개고 있었다. 무슨 세상을 꿈꾸고, 무슨 미래를 설계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해 전 일본에 다녀온 황윤길과 김성일의 적정 파악도 의견이 갈렸다. 정보를 가공해 대처할 능력보다 오직 상대 진영을 부정하는 기제로만 그것을 사용했다. 거기에 무능은 일상화되었으며, 그래서 이백 년의 조선은 벌써 조로현상이 뚜렷했다. 이런 내막을 소년 충신이 꿰뚫고 있는 것이다.

“너의 용기는 가상하다만, 나는 그 말을 듣지 않은 것이다.”

그는 정충신을 이윽히 내려다보았다. 이마에 솜털이 보송보송하고, 총기 가득찬 눈망울을 가진 소년이 그의 앞에 서있다. 몰락한 가대(家代)로 인해 일찍이 광주목영에 들어와 수령의 뒤에서 말단직을 수행하고 있는 일개 통인이지만, 무슨 일이든지 똑부러지게 처리하고, 그러나 언제나 꿈을 꾸고 사는 듯이 시선을 높이 두고, 멀리 보고 있다.

“더 큰 세상을 보겠다고 했느냐? 네가 넓은 세상의 이치를 아느냐.”

“넓은 세상을 보아야 알지요.”

“보아야 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첩서를 품고 간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알고 있느냐. 장계가 적의 수중에 넘어가면 나라는 결딴나고 임금의 목이 날아갈 수 있다. 임금 목이 그렇다면 온 백성의 목이 온전하겠느냐.”

“벌써 온 산천이 시체의 무덤 아닙니까요.”

“왜 이 지경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냐.”

정충신은 한동안 망설였으나 내친 김에 평소 생각하던 것을 말하기로 했다.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