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반

<나선희스피치커뮤니케이션즈 대표>

어떤 행위를 오랫동안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익혀진 행동방식을 습관이라고 한다. 내가 반복적으로 행하는 것은 습관이 되어 내 자신으로 규정지어진다. 나는 매일 반복된 일상으로 ‘나선희’가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규정지어진 나도 늘 ‘똑같은 나’는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월을 따라 조금씩 다른 모습의 ‘나선희’가 되는 것이다. 그 시기에 반복적으로 했던 행위가 달랐기 때문이다.

어려서의 나는 어리광쟁이 막내, 사춘기를 거쳐 결혼 전까지는 참한 듯 끼가 있는 내숭쟁이, 왕성한 활동을 하던 삼십대까지는 반듯하고 똑 부러진 캐리어 우먼, 사십을 넘어서부터 오십대가 된 지금은 ‘부드러운 카리스마’의 이미지라고들 한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는 상관없이 남들이 하는 얘기다. 그러니까 ‘타인이 생각하는 나’의 이미지다.

사남매 중 막내로 자란 탓인지 어린 시절 내 혀는 짧아 어리광을 질질 흘렸다. 그 버릇 어디 가겠는가? 이 말투는 아나운서가 되고나서도 지속되었나보다.

“나 아나운서는 왜 방송에서 어리광을 부려? 시청자가 어리광이나 받아주는 사람들인가? 어리광은 집에서나 부리라고!”

아나운서 대선배로부터 혼쭐이 난 뒤, 이를 갈며 훈련 끝에 어른스러운 말투로 바꿔버렸다. 그 결과, 입사 후 일 년도 안 된 스물네 살 아가씨는 청취자들로부터 아줌마냐는 말을 듣게 되었다. 말투는 각심과 노력에 의해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체득했던 실화다.

언어습관을 싹 바꿔버린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에 경험했다. 전라도 사투리 팍팍 쓰던 내가 아나운서가 되고자했으니 어땠겠는가? 지금은 아나운서가 되려면 아나운서 사설학원을 거치는 추세다. 나 또한 방송인을 키워내는 일을 하고 있지만 그 때는 혼자서 독학해야만 했다. 나는 당시 국내 최고였던 KBS 신은경 아나운서의 뉴스를 따라하며 훈련했다. 운이 좋았는지 아나운서 시험에 합격했다. 합격 후로도 나의 연습은 계속됐다. 수습기간은 물론이고 표준말이 몸에 배기까지 몇 년 동안 매일 ‘방송-모니터링-연습’ 과정으로 혹독하게 반복했다. 덕분에 사투리를 쓰던 ‘평범한 나선희’는 표준말을 구사하는 ‘아나운서 나선희’가 될 수 있었다.

“저 사람은 정말 타고났어! 무슨 말을 저리도 잘해?”

흔히 하는 말이다. 하지만 탁월함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습관에서 온다. 말 잘하는 사람은 말 잘할 수 있는 환경에서 살았거나, 훈련을 했기에 가능하다. 유쾌한 어머니에게서 자란 자녀는 유쾌하게 자란다. 말 잘하는 부모의 자녀가 말을 잘하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컨설팅한 사람들을 살펴보면 엄한 집안에서 자란 사람들이 말하기를 두려워했다. 그래서 나는 말하기는 타고나기보다 훈련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말 뿐 아니지 않은가. 꾸준히 몇 해를 반복하면 각자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내가 변화를 시도해 꾸준히 노력해 성공한 사례는 또 있다. 삼십대에 똑 부러진 캐리어 우먼으로 비춰지던 나는 사십대에 웃는 연습을 통해 좀 더 부드러운 이미지로 바꾸었다. 쉽진 않았다. 십 수 년을 감정을 배제한 표정으로 뉴스를 해 온 앵커 이미지에서 부드럽고 따뜻한 소통 강사로 거듭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일단 입 꼬리를 올리는 연습, 얼굴 전체의 근육을 동시에 작동시키는 훈련을 습관이 될 때까지 반복했다. 그 결과는 꾸준히 찍어 온 내 프로필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오십이 되면서부터 다시 문제가 생겼다. 근육을 많이 써가며 웃다보니 부작용이 생긴 거다. 밝아 보인 게 아니라 도리어 무섭다. 젊어서는 그저 크게 웃으면 됐는데 말이다. 나는 연구 끝에 다른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다. 얼굴 근육은 조금만 쓰는 거다.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는 정도다. 대신에 눈빛으로 승부를 걸기로 했다. 상대를 깊고 그윽하게, 최대한 따뜻하게 바라봐주는 거다. 상대가 무슨 말을 해도 다 들어줄 것 같은 눈빛. 쉽진 않았다. 처음엔 느끼한 눈빛이었다가 다음엔 게슴츠레 졸린 눈빛. 하지만 반복해서 노력한 끝에 이제 따뜻한 눈빛은 나의 정체성이 되었다. ‘부드러운 카리스마’, 그렇게 독하게 훈련해서 얻어 낸 나의 이미지다.

새해부터 우쿨렐레를 배우고 있다. 지금은 손가락으로 코드 잡는 것도 어렵고, 퉁기는 것도 자연스럽지 않다. 초등학생 때 피아노를 배우다 집어치워버렸던 기억이 겹친다. 그래도 우쿨렐레로 조급해하진 않는다. 그 때는 반복 훈련해야만 내 것이 될 수 있다는 지혜와 신념이 부족했다.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것은 없다. 시작이 반이라지 않던가. 반복적으로 오랫동안 되풀이하다 보면 어느새 익숙해질 것이다. 십년 후 우쿨렐레를 매고 강단에 선 나를 기대한다. 그래서 왕초보를 위한 교본을 놓고 ‘엄마돼지 아기돼지’를 연습하는 오늘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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