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의 ‘타루 한국’(墮淚 韓國)을 만들려면…

감동의 ‘타루 한국’(墮淚 韓國)을 만들려면…

<최혁 남도일보 주필>
 

‘타루’(墮淚)라는 단어는 ‘눈물을 흘린다’는 뜻이다. 墮는 ‘떨어질 타’, 淚는 ‘눈물 누’이다. 즉,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다. ‘흐느끼며 흘리는 눈물’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국어사전의 ‘흐느끼다’는 ‘몹시 서러워 흑흑 소리를 내며 목이 메게 울다’이다. 서러워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이다. 그러나 타루는 안타까움에, 감사함에, 눈물을 흘리는 것에 가깝다. 조금 더 객관적이고 공적(公的)이다. 긍정적 의미의 ‘타루’는 공적이며 따뜻한 눈물이랄 수 있다.

경남 밀양 세종병원의 화재로 37명이 목숨을 잃었다. 중상자 가운데 10명이 위독한 상태여서 사망자는 더 늘 것으로 보인다. 유족들은 절규하고 있다. 그 유족들을 지켜보는 국민들은 안타깝다. ‘타루 한국’이다. 몇 년 전 우리는 타루보다 더 심한 울음을 울었다. 혈루(血淚)다. 피눈물. 한창 피어나던 우리의 딸과 아들들이 차가운 바닷물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에 가슴은 무너졌고 눈에는 피눈물이 흘렀다. 불과 3년하고도 3개월 전의 일이다.

수많은 다짐이 있었다. 그런데 규모만 다를 뿐 비슷한 일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 국민들은 맥이 풀린다. 기자는 우리사회에 벌어지고 있는 참사의 원인이 시스템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인성(人性)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사람보다 물질(돈)에 가치를 두는 가치전도가 사람의 목숨을 보호하려는 노력을 게으르게 만들었다고 여긴다. 돈이 사람보다 위에 있는 세상이기에 눈물 흘리는 세상이 돼버린 것이다.

70년대부터 시작된 우리사회의 초고속 성장은 노동자와 농민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해 이뤄진 것이다. 공단 노동자들은 밤늦게까지 일하면서도 볼멘 소리를 하지 못했다. 기업주에 밉보이면 행여 일자리를 놓칠까봐 그랬다. 중금속에 노출돼 일하기에 몸이 망가져도 하소연하기가 힘들었다. 기업주들은 노동자들을 착취해 돈을 벌었다. 사람보다는 돈이 우선이었다. 그 영향인 듯싶다. 사람을 수단으로 여기기에 온갖 갑질이 횡행하고 있다.

지금은 돈이 사람보다 더 존중받는 사회다. 싹 아지(싸가지)가 없어도 공부만 잘 하면 모든 것이 용서되는 사회다. 여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예쁜 여자는 모든 것이 용서된다. 그래서 여자들은, 돈을 들여 얼굴을 뜯어 고친다. 말이야 외모를 보지 않는다고 하지만 기업들은 이왕이면 더 예쁜 여자를 뽑으려 한다. 이런 속마음을 알기에 여학생들은 너도나도 성형수술을 받는다. 그래서 충장로의 젊은 여자들 상당수는 비슷비슷한 얼굴이다.

사람 됨됨이를 보지 않고 외모와 스펙을 보는 바람에 우리사회는 어느 사이 싹 아지가 없는 사회가 돼버렸다. 사람을 사람답게 대접하지 않는다. 기자는 웬만하면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는다. 되도록이면 계단을 오른다. 건강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정신건강을 위해서 그런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청년들이 사람이 다가가도 시선 한 번도 주지 않고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는 그 모습이 끔찍해서다.

사무실이 있는 건물도 마찬가지다. 기자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에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가르치는 학원이 있다. 꽤 유명한 학원인지 이곳을 찾는 학생들이 많다. 그런데 대부분 안하무인이다. 엘리베이터 안인데도 큰 소리로 이야기하거나 전화를 한다. 비좁아 몸이 부딪쳐도 미안하다고 눈인사를 하는 아이가 없다. 순서도 없이 우르르 타고 우르르 나간다. 기본이 돼 있질 않다. 내가 사장이라면 직원으로 절대 뽑지 않을 학생들이다.

사람을 사람답게 대접할 줄 모르지만, 공부 잘해서 출세하면 ‘훌륭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세상이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훌륭한 사람은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다.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다. 희생이 없는 가정과 직장은 싸움터나 마찬가지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지만 싹 아지가 없는 아이들이 ‘성공’하니 돈 때문에 법을 비틀어대고, 무리하게 수술을 시키고, 갖다 바치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정책을 입안하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한국사회가 제자리를 찾으려면 공부 잘하는 아이보다, 남을 잘 배려하고 예의바른 아이가 지도자가 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지금의 한국사회는 사람을 천시하는 사회다. 그래서 안타까운 눈물이 많은 사회다. 타루라는 말은 덕을 베푼 위나라 양호가 죽자 백성들이 그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고사에서 비롯됐다. 슬퍼서가 아니라 따뜻한 사연 때문에 우는 한국사회가 돼야 한다. 그 첫걸음은 자식들을 사람답게 키우고 사람을 존중하게끔 가르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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