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총 개발해 이순신과 함께 나라 구한 정사준

최혁 주필의 전라도 역사이야기
29. 조선조총을 개발한 정사준
조선조총 개발해 이순신과 함께 나라 구한 정사준
이충무공 휘하의 順天 정사준 조선 승자총통 개량
日本軍 조총(鳥銃) 장점 본떠 화력 월등한 총 제작
조선조정 뒤늦게 훈련도감 설치하고 포수(砲手)양성
선조, 별시에 조총사격술 무과 시험과목에 편입시켜
전투참가·총통개발 불구 공신녹권(功臣錄卷)서 제외돼
옥계서원·타루비 통해 정사준 우국충정 느낄 수 있어
 

조선 정철총통을 개발한 정사준을 모시고 있는 순천 옥계서원

■조총의 위력 앞에 무너지는 조선관군

임진왜란 초기 조선은 일본군에게 철저히 당했다. 조총(鳥銃) 때문이었다. 조총은 임진란 초기의 승패를 좌우해버렸다. 조총은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다’ 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조총은 살상력이 뛰어났다. 조총에 맞으면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더구나 일본군이 한꺼번에 조총사격을 하면 벼락 치는 소리가 들려 조선관군들은 전의를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총은 15세기 말 유럽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일본은 1543년 포르투갈을 통해 조총을 입수한 뒤 이를 발전시켜 전력화했다. 일본 내에서는 포르투갈 선박이 정박한 섬의 이름인 다네가시마(種子島)를 따서 종자도총(種子島銃)이라 불렸다. 일본 각 지역 제후들의 전투는 조총으로 무장했느냐 여부에 승패가 갈렸다. 일본 전국시대 오다 노부나가는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3열(三列)조총부대를 운용해 승리해 전국통합의 바탕을 만들었다.

중국 군기도설의 조총윤방도(3단사격)

오다 노부나가가 암살된 뒤 권력을 이어받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8만 대군을 조총으로 무장시켜 1592년 4월 조선정벌에 나섰다. 조선에 투입된 일본 병사들 대부분은 일본 전국시대의 여러 전투에서 살아남은, 노련한 싸움꾼이었다. 조선관군이 사실상 괴멸당해 버린 신립장군의 탄금대 전투는 조총의 위력이 여실히 드러난 전투이기도 했다. 조선관군은 궁수와 기병을 앞세워 평지에서 기선을 제압하려 했으나 조총의 파괴력은 활보다 컸다.

■조선, 조총을 개발하고 조총부대를 만들다

조선시대의 조총

조총을 무시하던 조선은 뒤늦게야 조총개발에 나선다. 흔히 임진왜란이 터지고 나서야 조선이 조총이라는 무기를 알게 됐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는 그렇지 않다. 1590년(선조 23) 3월 대마도주(對馬島主) 소우 요시토시(宗義智)가 선조에게 조총을 진상하고 간 일이 있었다. 그렇지만 조선은 조총의 성능이 활보다 뛰어나지 않다고 판단해 창고에 넣어두고 방치해 버렸다.

조선은 일본 침략 2년째인 1593년 훈련도감을 설치한다. 조선조정은 일본군과 맞서 싸우려면 새로운 군사조직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타격부대인 훈련도감을 만들었다. 훈련도감에 소속된 군사들은 총을 쏘는 포수(砲手)와 활을 쏘는 사수(射手), 창을 다루는 살수(殺手) 등이었다.

 

탐라순력도 중 제주조점(총을 든 포수의 모습)

특이한 사실은 조선조정은 포수들을 양성하기 위해 ‘면천’(免賤)’을 내걸었다는 점이다. 면천이라는 것은 총을 잘 쏴서 공을 세우면 노비 같은 천민 신분에서 해방을 시켜주는 것이다. 면천을 통해서 조선이 어느 정도의 포수를 확보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면천과 함께 매달 쌀 여섯 말의 급료를 받을 수 있는 자리였기에 많은 사람들이 포수로 지원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은 1593년 별시를 치르면서 무과에 조총 사격술을 넣었다. 원래 무과시험은 목전(나무살 쏘기)을 비롯 철전(쇠살 쏘기), 편전(애기살 쏘기), 기사(마상궁술), 기창(마상창술), 격구 등이었다. 그러나 선조는 조총 사격술을 무과 시험과목에 편입시키면서 “말 위에서 활을 쏘는 기사의 경우 실력이 좀 떨어지더라도 조총 세 번을 쏘게 한 뒤 한번 이상 맞힌 자는 모두 뽑으라”<선조실록 40권, 선조 26년 7월 14일 병인>고 지시하기도 했다.

■정사준과 정철총통

1593년(선조 26) 9월 13일 이순신(李舜臣)장군은 휘하의 훈련주부(訓鍊主簿) 정사준(鄭思竣)을 시켜 소승자총(小勝字銃)을 만들었다. 소승자총은 조총과 기존의 승자총(勝字銃)을 절충한 새로운 것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휘하의 각 관에 조총을 만들도록 하는 한편 5자루를 조정에 올려보내기도 했다.

이순신장군은 선조에게 올린 <봉진화포장>(封進火砲狀)을 통해 소승자총의 제조동기와 대량생산방안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신(이순신)은 왜군과 여러 차례 큰 전투를 치르면서 조총을 많이 얻었습니다. 그 조총을 자세히 살피며 기묘한 이치를 시험했습니다. 왜군의 조총(種子島銃)은 몸체가 길고 총구멍도 깊었습니다. 따라서 포의 기운이 맹렬하여 맞히는 것은 모두 부서졌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승자(승자총통)나 쌍혈 등의 총통은 몸체가 짧고 총구멍이 얕아 소리도 작고 맹렬하기가 왜군의 총통만 못합니다.

그래서 신의 군관인 훈련원 주부 정사준을 시켜 (정철)총통을 만들었습니다. 정사준은 신묘한 방법을 터득해 대장장이(冶匠:야장)인 낙안의 수군 이필종과 순천의 사노(私奴:개인의 종) 안성, 난을 피해 김해 병영에 살고 있는 사노(寺奴:절의 종) 동지, 거제의 사노(寺奴) 언복 등을 데리고 총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들은 만든 총은 좋은 철(精鐵:정철)을 두드려 만들었기에 체제가 매우 정교하고 포탄의 맹렬함이 (왜군)조총과 같습니다.

정철총통(精鐵銃筒)은 실 같은 구멍과 불을 붙이는 기구 등이 (왜군조총과) 조금 다르지만 며칠 내로 만들 수 있습니다. 만드는 것도 대체로 어렵지 않습니다. 왜군을 물리칠 수 있는 무기로는 이보다 더 나은 것이 없습니다. 조총 다섯 자루를 봉하여 올려 보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각 도와 관가에서도 이 같은 총을 제조하도록 명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정사준과 야장 이필종 등은 별도로 상을 주시어 그들이 감동을 받아 즐거운 마음으로 조선조총을 만들게끔 하여주시옵소서”

■조선조총의 명성과 명사수 조선관군들

런던신문에 실려있는 총을 든 구한말 군사

정사준의 정철총통은 일본 조총(종자도총)의 장점을 차용해 조선의 승자총통을 개량한 것이다. 스스로의 연구와 노력으로 총기를 개량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깊다. 더 강하고 더 멀리 날아가는 총을 만들어가는 노력은 결국 조선이 성능이 우수한 조총을 개발하는 성과를 올렸다. 정사준과 그와 함께 굵은 땀을 흘렸던 대장장이들의 노력이 씨앗이 된 것이다.

1655년(효종 7)에는 제주도에 표착한 하멜 일행을 서울로 압송, 훈련도감에 배속시켜 조총제조에 참여토록 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조선조총은 대단히 성능이 좋은 총으로 발전됐다. 1657년(효종 9)에는 청나라에서 조선 측에 조총구입을 요청하기도 했다. 또 조선관군 대부분이 조총으로 무장을 하는 등 조총은 조선의 주력무기가 됐다.

고대부터 한반도 사람들은 손재주가 좋아 활쏘기에 능했다. 그런 만큼 총기 역시 잘 다뤘다. 청나라는 헤이룽강 국경부근에서 총포를 지닌 러시아군에게 밀리자 1654년 조선에 원병으로 조총 수 파병을 요청했다. 이에 효종은 1654년과 1658년 두 차례 조선조총부대를 보내 러시아군을 섬멸했다. 이것을 나선정벌(羅禪征伐:러시안 Russian 정벌)이라 하는데 이는 그만큼 조선조총부대의 실력이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정사준(鄭思竣)과 옥계서원

옥계서원

1618년(광해군 10) 이수광은 전라도 순천부 읍지인 <승평지>(昇平誌)를 편찬하면서 정사준에 대해 이렇게 썼다.

‘정사준은 판관 정승복의 아들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본 현(순천)의 주사(主事)로서 충무공 이순신을 따라 일곱 차례 전투에서 여러 차례 적함을 격파했다’

정사준은 순천 옥계서원에 모셔져 있다. 옥계서원은 전남 순천시 연향동 1097에 위치해 있다. 옥계서원은 정사준의 5대조 정지년(鄭知年)을 주벽(主壁:서원에서 가장 어른으로 모시는 분)으로 하고 있다. 이 서원에는 정사준의 아버지 정승복(鄭承復), 아들 정선, 동생 정사횡, 형 정사익의 아들 정빈도 함께 모셔져 있다.

이순신 장군은 정사준을 매우 신임했다. 충무공은 자신이 쓴 장계 <장송전곡장(裝送戰穀狀)>에서 정사준에 대해 ‘경상도 접경 지역 요충지인 광양현 전탄의 복병장으로 보냈는데 군사를 매복시키는 등 왜적을 막는 일에 특별한 계책을 마련해 적이 감히 다가오지 못하도록 했다’고 적기도 했다.

안타까운 것은 정사준이 공신책봉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조선조정은 1604년(선조 37)의 선무공신 책봉 때 빠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1605년 4월 선무원종공신 9천60명을 추가로 녹훈하면서 정사준을 공신으로 넣지 않았다.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는 대목이다. 이순신장군을 도와 왜적과의 싸움에서 공을 세우고 정철총통을 개발해 조선군의 전력을 높인 인물이 공신에서 제외된 것이다. 조정대신들의 편협함에 새삼 고개가 저어진다.

도망 다니기에 급급했던 선조를 따라다니며 목숨을 부지했던 인물들에게는 호성공신이라는 칭호를 내리면서도 목숨을 걸고 싸운 무인(武人)들의 공은 하찮게 여겼던 선조, 한 나라의 왕이라 하기에는 너무도 옹졸하고 부끄러운 모습이다. 그 원통함을 풀어줄 사람은 우리 후손들이다. 옥계서원에 들려 정사준선생의 애국충정에 깊은 경의를 표하는 것이 선생의 영혼을 위로하는 길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타루비

 

타루비

정사준은 이순신 장군이 세상을 떠난 지 6년 후인 선조 36년(1603)에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타루비(보물 1288호)를 세우는 데 힘을 보태고 1604년 숨을 거둔다. <승평지>에는 ‘이 충무공 비가 수영(여수)에 있는데 읍인(순천 사람) 전 현감 정사준과 통제사(이순신) 막좌(부하들)가 세운 것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타루’(墮淚)라는 단어는 ‘눈물을 흘린다’는 뜻이다.

일제강점기였던 1942년 여수경찰서장 마쓰키는 대첩 비각을 헐고 ‘통제사이공수군대첩비’(좌수영대첩비)와 타루비를 어디론가 가져가 버렸다. 통제사이공수군대첩비는 조선조 광해군 7년 3도수군통제영이었던 여수에 이총무공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대첩비이다. 대첩비에는 이순신장군의 수많은 공적이 기록돼 있다.

좌수영대첩비와 타루비(오른쪽 비가 타루비이다)

광복 후 여수지역 유지들은 초대 여수경찰서장인 김수평을 서울로 보내 대첩비와 타루비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다행스럽게도 1946년 대첩비와 타루비가 발견됐다. 일제가 경복궁 앞뜰 땅 속 깊이 파묻어 두었던 것이다. 1947년 좌수영대첩비와 타루비는 이순신장군의 작전 지휘소가 있었던 고소대로 옮겨졌다.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고소대 비각. 안에 좌수영대첩비와 타루비가 있었다.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