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

충무공 정충신 장군<21>-제3장 의주로 가는 길

“네 놈이 공부하는 거렁뱅이라… 한지에 한문자라… 너는 정신병자가 아니면 결단코 후방에서 활약하는 첩보원이다.”

초소장이 먹물이 묻힌 두루마리 종이를 들어 허공에 날리며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정충신은 그러거나 말거나 그의 시선을 피해 잠시 강 어귀 마른 억새풀밭으로 눈을 돌렸다. 묵살하고 무시하겠다는 태도였다. 억새풀밭 사이로 사람의 시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엎어져있거나 하늘을 쳐다본 채 눈을 뜨고 죽어있는 사람들이었다. 그중 하나는 몸뚱이는 어디로 사라진 채 두상만 나뒹굴고 있었다.

“저 시체들은 무엇이오?”

“네가 알 바 아니다. 다만 너도 여차하면 저 꼴 당한다는 걸 알아두어라. 이것이 무엇이냐.”

초소장이 두루마리 종이를 흔들어보였다.

“공부하는 잡록장(雜錄帳)이요. 거지도 공부는 해야지. 조선은 신분의 귀천(貴賤)에 상관없이 공자왈맹자왈 한다는 소문 못들었소? 나가 이래 봬도 정승판서 자제요.”

“이놈아, 정승판서 자제가 그 모양이냐? 거지가 공자왈맹자왈 한다고 해서 밥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 한심한 새끼들이야. 칼 잘쓰는 놈한텐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 뭣도 모르고 헛소리하는 꼴 보면 참 웃기지도 않는다니까. 이 두루마리는 또 무엇이냐?”

초소장이 재미가 있다고 여기면서도 한껏 건방진 태도로 다른 두루말이 종이를 펼쳐보였다.

“서찰이오.”

“네가 왜 이런 서찰을 간직하고 다니냐?”

“부상(負商)의 벌목(罰目)이오. 조원이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 징치한다는 조문(條文)이오.”

“조문?”

“그렇소. 저지른 죄의 경중에 따라서 죄가 가벼우면 태형으로 다스리고, 무거우면 멍석으로 말아서 물미장으로 팬다는 조문이요. 동료 부상들이 모두 죽고, 나 혼자 거지꼴로 다니고 있소. 밥이 있으면 좀 주시오.”

충신은 가는 도중 감시병들에게 문초를 당할 것에 대비해 부상의 벌목을 구비했다. 필요하면 부상으로 위장할 작정이었다.

초소장이 벌목을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부모에게 불효하고 형제간에 우애 없는 자는 볼기 50대를 친다 △두목(頭目)을 속이는 자는 볼기 40대를 친다 △장에서 물건을 강매하는 자는 볼기 30대를 친다 △술주정하면서 난동을 부린 자는 볼기 20대를 친다 △질병에 걸린 동료를 돌보지 않은 자는 볼기 25대를 치고 벌금 3전을 물린다 △문상하지 않은 자는 볼기 15대를 치고 벌금 5전을 물린다…

“부상들에게 이런 조목과 강령이 있단 말이냐.”

“그렇소. 훈장을 주는 장려패도 있소. 옳고 그른 것을 따지고, 좋은 일을 하면 주는 상이오.”

그제서야 초소장이 알게 모르게 희미하게 웃더니 가볍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는 의심할만한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정충신을 한낱 떠도는 도꼬다이 무위도식자로 보고 있었다.

망태기의 비밀을 그들은 알 리가 만무했다. 정충신은 스스로 낸 꾀에 스스로 만족했다. 사실 그의 꾀는 어려서도 발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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