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반남 옛 큰무덤에서 고대국가의 숨결을 느끼다

최혁 주필의 전라도 역사이야기
31. 마한의 비밀을 간직한 반남고분
나주 반남 옛 큰무덤에서 고대국가의 숨결을 느끼다
<古墳>
대안·신촌·덕산리 등 34개 고분 통칭해 나주 반남고분
6세기 중엽까지 존재하던 영산강 유역 강력세력 흔적
큰 고분과 대형 옹관, 금동관, 금동 신발 등 수준 높아
일제시대 서둘러 발굴 뒤 허술하게 관리해 무차별 도굴
한국 고대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의미규명이 학계과제
나주시, 마한문화축제 등 열고 역사자원으로 부각 노력
 

신촌리 9호분 전경

■우리는 마한인이었다

영산강변과 무등산 자락에서 살던 우리의 옛 조상들은 마한인이었을까? 아니면 백제인이었을까? 정답은 둘 다이다. 멀고도 먼 옛날, 남쪽 땅에 살았던 이들은 마한인이었다. 그 뒤에 마한 땅은 백제 땅이 됐고 마한사람들은 어찌어찌하다가 백제 사람이 돼 버렸다. 그런데 대부분의 전라도 사람들은 자신들을 백제의 후예라 여기고 있다. 어째서 그럴까?

우선은 이 땅위에 마한이라는 나라가 있었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부끄러워할 이유는 없다. 최근에서야 마한이라는 국가(혹은 지역공동체)에 대해 관심이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존재는 확실하나 실체가 정확하지 않다. 마한은 베일에 싸여있는 국가(혹은 지역공동체)이다.
 

북동쪽에서 바라본 나주 덕산리 1~5호분

이 땅의 역사를 거슬러 오르면 분명히 마한이라는 나라가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마한이 어떤 과정을 거쳐 백제가 됐는지는 불분명하다. 전남 나주에는 마한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바로 반남고분(潘南古墳)이다. 나주에서 13번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양산리 쪽에서 ‘반남고분’ 이정표가 나온다.

이곳에서 우회전해 4번 군도를 8Km 정도 서쪽으로 가다보면 불쑥 크고 작은 고분들이 나타난다. 아주 오래전 영산강 유역을 호령했던 걸출한 인물들의 묘이다. 반남고분은 한반도의 고대사에 여러가지 의문점을 안겨주는 난해한 과제물인 동시에 열쇠이다. 반남고분에는 두 개의 커다란 항아리를 이어붙인 ‘독널’이 층층이 묻혀있었다.

그런데 무덤형태가 일본 고분과 형태가 같다. 그렇기에 한일 양국의 역사학자들 사이에는 누가 영향을 미쳤고 누가 영향을 받았는지를 놓고 의견이 갈리고 있다. 반남고분의 형태는 분명히 마한지배세력이 일본 본토세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서쪽에서 바라본 덕산리 3대고분(3~5호분)

그러나 어떤 관계였는지가 불분명하다.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마한지배세력과 일본 지배세력들이 밀접한 교류를 갖는 과정에서 상호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상당수 일본학자들은 반남고분과 일본고분의 동일성을 ‘고대 일본이 조선남부를 경영했다’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 설의 근거로 사용하고 있다.

일본서기에는 마한이 백제 근초고왕 때인 369년에 멸망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나주 반남, 복암리 고분들은 마한이 백제에 일정부분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6세기 중반까지 존재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영산강 유역은 6세기 중반까지 백제의 영향밖에 있었으며 강력한 지도자가 일본의 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촌리 9호분 출토 독널

반남면에는 40여기의 고분이 있다. 고분에는 두 개의 커다란 항아리를 이어붙인 ‘독널’이 층층이 묻혀있었다. 이들 고분군은 본래 사적 76호의 나주대안리고분군(羅州大安里古墳群), 사적 77호의 나주신촌리고분군(羅州新村里古墳群), 사적 78호의 나주덕산리고분군(羅州德山里古墳群)으로 나눠져 있었다.

그러나 지난 2011년 7월 28일 문화재청이 역사성과 특성을 고려하여 인접 지역에 있는 세 고분군을 통합하고 사적 제513호로 재 지정했다. 고고학적으로 마한고분이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한반도에서 최초로 삼국시대(혹은 삼국시대 이전에 제작된)의 유물들이 발굴된 곳이기 때문이다.
 

신촌리 9호분 을관 출토 금동관 1942년 촬영

신촌리 고분에서 발굴된 금동관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불분명하다. 마한을 지배하던 세력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백제의 왕이 하사한 것인지 특정할 수 없다. 혹은 마한을 다스리던 백제의 지배자가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금동관은 높이 18.5cm, 길이 19cm로 보존상태가 매우 좋다.

백제 시대의 관모 모습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하나뿐인 유물이다. 관의 형태가 전북 익산시 입점리와 일본 구마모토현 고분에서 출토된 것과 비슷해 백제의 영향을 받은 관인 것만은 분명하다. 영산강 유역 일대에 자리하고 있었던 마한세력은 어떤 과정을 거쳐 백제에 복속되고 말았을까?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나주에 남아있는 저 고분군은 알고 있을 것이다.
 

신촌리 9호분 을관 내 유물 출토 모습

 

 

■반남고분군 발굴의 역사

1917년 12월 20일 눈발이 흩날리는 반남면 일대 영산강변을 일본인 3명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연신 신촌리 일대의 조산(造山)을 오르내리며 어디서부터 파내려갈 것인지를 놓고 이야기를 나눴다. 마침내 그들은 데려온 조선인부들에게 산위의 소나무를 파헤치고 그곳에서 흙을 파 올리라고 말했다.

조산은 뜻 그대로는 ‘만들어진 인공 산’이다. 큰 무덤을 일컫는 말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소나무와 잡목이 우거져 작은 능선처럼 보였지만 오래 전 만들어진 ‘말무덤’(여기서의 ‘말’은 크다는 뜻으로 큰 무덤을 의미한다)이었다. 일본인들은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에 속해 있는 야쓰이 세이이쓰와 측량기사 오가와 게이키치, 화가 오바 쓰네키치였다.

조선총독부는 국권침탈 후 1916년 고적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조선의 고적과 문화재를 조사했다. 조사는 일반조사·특별조사·임시조사가 있었다. 일반조사는 조선 각지의 유적과 유물을 조사하는 것이고 특별조사는 중요한 유적에 대한 발굴이나 측량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임시조사는 고분의 자연붕괴나 도굴발견 시에 현지검증을 하는 차원의 조사였다.

 

 

 

 

 

덕산리 3호분 발굴조사 모습
고적조사위원회는 1917년 5월 7일부터 1918년 1월14일까지 2차 연도 조사를 실시했다. 이 조사는 가야유적과 경상도내 석기시대유적, 고구려 유적, 한사군·백제유적 조사 등 크게 네 개로 나눠져 있었다. 야쓰이 세이이쓰는 1917년 5월부터 7월까지 평안남북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대방군 관련 유적을 조사했다.

이후 야쓰이 세이이쓰등 4명의 조사단은 경기도 광주군과 고양군, 양주군, 충청남도 천안군, 공주군, 부여군, 청양군, 논산군, 전북 익산군과 전남 나주군을 차례로 돌아다니며 유적을 조사했다. 이들은 당초 15일동안 반남면에 머물면서 반남고분을 조사할 계획이었으나 실제로는 1917년 12월 17일부터 27일까지 11일간만 조사활동을 벌였다. 이들의 조사활동이란 다름 아닌 고분발굴이었다.

야쓰이 세이이쓰는 신촌리 고분중에서 가장 큰 고분의 외형을 실측했다. 그리고 20일부터 굴착조사에 들어갔다. 26일까지 진행된 굴착조사에서 야쓰이 세이이쓰의 일행은 숨이 막힐 정도로 놀라운 부장품들을 발굴했다.

 

 

 

 

 

 

신촌리 9호분 을관 출토 금동신발 1942년 촬영
봉분 중앙부 무덤방에서 지역 지배세력이 관으로 쓴 10여개의 옹관이 있었다. 그 중 하나인 ‘을옹관’이라고 이름 붙여진 대형 옹관에 금동관과 큰칼, 창, 화살촉, 옥기류, 금동신발이 가득 들어 있었던 것이다.

당시 한반도에서 금동관이 출토된 첫 번째 사례였다. 1921년 경주 금관총에서 나온 신라금관보다 4년이나 앞선 발굴이었다. 외관과 내관으로 이뤄진 금동관은 매우 정교했다. 영산강 유역 고대인들의 강한 세력과 독특한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걸작이었다.

야쓰이는 그러나 27일 발굴조사를 중단했다. 비용 때문이었다. 조사단은 9호분에 짚 가림막을 쳐놓고 경성으로 철수했다. 신촌리 고분들은 거의 10개월 동안 방치됐다. 야쓰이 조사단이 돌아온 다음해 10월까지 신촌리 고분들은 무차별 도굴을 당했다.

 

 

 

 

 

 

신촌리9호분 장식대도
야쓰이 조사단은 신촌리 고분에 대한 발굴을 재개한 뒤 신촌리 고분의 정상부와 가장자리에서 ‘하니와’라고 불리는 일본식 ‘원통형 토기’들이 줄줄이 열을 지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야쓰이는 고대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했던 직접적인 증거를 찾았다며 흥분했다.

야쓰이는 조선총독부에 제출한 요약보고서에 ‘고분들은 장법과 관계 유물로 추측하건대 아마도 왜인일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나주 반남의 왜인 유적>이란 제목의 특별보고로 제출하려 한다’고 적었다.

그러나 1921년 야쓰이가 일본으로 귀국하면서 그가 약속한 특별보고서 제출은 이뤄지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가 반남고분 발굴에서 찾아낸 고분내 토기들과 장법들은 일본 학계의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의 고고학적 기반을 마련하는 토대가 됐다.

신촌리 고분에서 발견된 토기들은 4~7세기 일본 고분시대 대형 무덤 봉분 외부를 장식한 전형적인 토기들과 모양이 거의 비슷했다. 야쓰이는 신촌리 발굴 토기들을 3~4세기 일본 야마토 국가가 한반도 남부를 일종의 식민지처럼 통치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입증하는 유물로 삼았다.

신촌리 고분 유물이 임나본부설의 증거로 제기되고 있는 것에 대해 한국 사학계는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저자인 유홍준은 미학·미술사학과 학생들과 함께 한 ‘남도답사’에서 반남고분과 관련해 자신의 해설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여기는 나주군 반남면(潘南面). 반남 박씨의 본관지입니다. 저 안쪽 들판은 대단히 넓은 곡창지인데 곧장 뻗으면 영산강 줄기와 맞닿습니다. 그래서 이 땅의 풍요를 바탕으로 일찍부터 토호들이 성장하여 백제시대에도 하남·공주·부여의 문화와는 다른 지방적 특성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반남고분군의 독무덤입니다.

반남면 신촌리, 대안리, 덕산리에는 7~8개씩의 큰 무덤들이 떼를 지어 있는데 그 무덤에서는 커다란 독 두세 개를 포개서 만든 옹관(甕棺)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런 옹관묘는 삼국시대에 오직 영산강일대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무덤형식인 것입니다. 지금 광주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는 무지하게 큰 옹관은 신촌리에서 수습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광주박물관장을 지낸 이을호 관장은 남도에 답사온 학생들을 보면 “여기는 금관은 없어도 옹관은 있어요잉”이라며 뼈있는 농담으로 시작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신촌리 제 9호 무덤에서는 다섯 개의 옹관이 한꺼번에 나오면서 그 가운데 옹관에서는 금동관이 출토되었습니다. 이것은 공주의 무녕왕릉이 발굴되기 이전에는 유일하게 백제지역에서 출토된 금동관으로 그것은 백제의 금관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금동관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그것이 고고학과 역사학에서 매우 흥미로운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데, 대체로 삼한시대 마한의 마지막 족장이 아닐까 추정되고 있습니다. 마한은 처음에 충청·호남지방에 근거를 두었는데 북쪽에서 내려온 백제에 밀려 충청도 직산에서 금강 이남인 전라도 익산으로 쫓겨 갔다가 4세기 후반 근초고왕의 영토확장 때 이곳 영산강까지 밀리게 되며 이후 백제가 공주·부여로 내려오면서 더욱 압박을 받게 되어 5세기 말에는 완전히 굴복하고 만 것으로 추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반남고분 군은 대개 5세기 유적으로 비정되고 있죠”

■우리에게 주어진 반남고분 과제들

 

 

 

 

 

 

국립나주박물관
국립나주박물관에서는 지난 2016년 <유리건판으로 보는 나주의 문화유산>도록을 발간하면서 82페이지에 ‘기억할 일과 해야 할 일’이라는 소제목으로 나주 반남고분 발굴조사에 대한 소회를 남겼다. 필자는 역사나 고고학 분야의 비전문가이다. 따라서 여러 가지 이론(理論)과 주장이 혼재해있는 반남고분군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필자는 국내의 최고 전문가들이 참여해 작성한 <유리건판으로 보는 나주의 문화유산>중의 반남고분관련 자료를 충실히 요약해 전달하는 것이 최선의 태도라 믿는다. <전남역사이야기>를 애독하는 독자들을 위해서 전문가들이 반남고분발굴조사 관련해 제시한 여러 과제를 그대로 싣는 것이 낫다는 판단아래 다음의 글을 전재한다.

- 기억해야할 일과 해야할 일

1917~1918년 고적조사위원회가 수행한 나주 반남고분군 발굴조사는 기본적으로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진열품 확보를 위한 것이었다. 발굴일수는 20일을 넘기지 않았고, 조사단은 단시간 내에 유물을 활보하기 위해 독널이 매장된 위치를 중심으로 분구를 굴착하였다. 고분 축조 방법이나 매장 순서 등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분구 조사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이렇게 봉분의 정상부에서 매장부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 좁고 깊은 트렌치를 파들어 가는 탐색 방법은, 그러나 한국에서의 고적조사를 위해 특별히 고안된 것은 아니었다. 한국에서 고적조사 5개년 계획이 시행되기 이전인 1912년 일본 미야자키현 사이토바루고분군 조사에서도 이러한 방식이 시도되었다. 발굴 당시 작성된 고분 실측도는 1917년의 기준으로도 결코 뛰어나다고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이 발굴에는 이마니시 류, 구로이타 가쓰미, 하마다 고사쿠, 도리이 류조 등 이후 한국에서 고적조사위원으로 장기간 활동했던 인물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한국에서의 고적조사기간 내내 계속된 졸속 조사는 이때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사실 그런 성과주의 조사의 병폐는 발굴 이후에 더욱 심각했다. 일찍이 야쓰이 세이이쓰는 독널고분의 무차별 도굴을 우려하였고, 그것은 현실이 되었다. 조직적인 도굴은 야쓰이 세이이쓰가 경찰관리에게 최우선으로 고분을 보호하라고 신신당부를 하거나 고분 앞에 ‘조선총독부 소관’ 팻말을 세우는 정도로는 척결되지 않는 ‘불법이지만 돈이 되는 사업’이었다. 고적조사 환경의 악화와 계획의 수정 그리고 발굴 책임자의 귀국으로 관심에서 멀어진 반남고분군에 정책적인 보존 조치가 이루어졌다는 정황은 감지되지 않는다.

1920년대의 불황기와 1930년대의 전시체제를 거치며 조선총독부는 문화재 조사·보존에 대한 이중적 시선을 보여주었다. 1923년의 인력감축과 1923년의 학무국 고적조사과의 폐지는 재정긴축정책 기조의 조선총독부가 고적조사의 효용성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다. 그러나 외부 지원금 기반의 운영을 목표로 한 조선고적연구회의 1931년 회칙 제정과 임원 선정 과정에서 조선총독부는 오히려 그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고적 조사에 적극적이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통제하려 했던 모습에서 조선총독부가 학술연구를 어디까지나 식민지 정책의 한 수단으로만 간주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고적의 조사와 보존은 언제나 부차적인 것으로 격하되어 관심도, 재원도, 인력도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진우 학예연구사(좌측)와 최혁 주필
<고적조사위원회규정> 10조에 의하면 조사에서 출토된 유물의 운반을 경찰관서에 맡길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반남고분군의 유물들도 이러한 경로를 거쳐 조선총독부박물관에 도착했다. 일견 경찰력을 동원해 유물의 안전한 운송을 기하는 법적 장치로 여길 수도 있지만, 어쨌든 현지의 비전문가에게 유물의 관리와 운반을 맡긴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넓은 범위에 걸친 무리한 조사를 최단기간에 완수하기 위해 마련된 편의적 규정이었다. 때로는 가장 엄정해야할 경찰관서의 장에게 유물 밀반출의 혐의가 씌어졌다는 것은 이 규정이 가진 맹점을 잘 알려주는 대목이다.

반남고분군 출토품은 발굴된 후 1~2년 이내에 목록으로 정리되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조선총독에게 조사결과를 보고하고 전시진열품으로 등록하기 위한 최소한의 정리작업이었다. 각 조사자가 자신이 발굴한 고분의 출토품을 정리하는 것이 원칙이었기에, 각자가 고적조사 출장이 없는 휴지기에 집중적으로 유물을 정리해야 했지만 현실적으로 담당자 몇 명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양이었다. 5년간의 고적조사는 물론, 이후로도 정리 인력의 확충이나 조사 계획의 수정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고적조사위원회는 유물의 정리와 보고에는 구조적으로 취약한 조직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최근 한국학계에 고적조사 5개년 사업의 실제 설계자로 알려진 야쓰이 세이이쓰는 고적조사위원으로 활동하는 동안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조사 현장에 투신하였다. 그 배경에 소위 임나일본부설과 신공황후삼한정벌설을 자기 손으로 입증하고자 하는 야쓰이 세이이쓰의 개인적인 욕망이 잠재되어 있었음이 지적되고 있다. 그 열망이 결정적으로 노출된 시점이 바로 1918~1919년 사이에 이루어진 창녕 교동 고분군의 무리한 동시다발적 발굴조사 때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런 관점을 비단 야쓰이 세이야쓰만이 아니라 고적조사에 참여했던 이른바 관학자들 거의 모두가 ‘역사적 사실’로서 공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식민지에서 쌓은 발굴 경험과 조사 자료들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간 그들은 ‘조선고고학’의 전문가로서 일본의 학계를 주름잡았다. 태평양전쟁 패배의 기억은 그들의 역사관을 조금이라도 바꿔 놓았을까. 그러나 반남고분군의 금동관을 ‘상고시대 임나의 영역인 경상도’의 금관과 연결지은 우메하라 스에지나 ‘조선의 고적조사보존사업이야말로 반도에 남긴 일본인이 가장 자랑할 만한 기념비의 하나’라고 술회한 후지타 료사쿠의 생각 앞에서 일말의 기대를 거두게 된다.

반남고분군은 일제강점기에 처음으로 조사되었으나 제대로 된 보고서가 발간되지 않았고, 무수한 도굴로 인해 대부분의 부장품을 잃고 말았다. 제국주의에 봉사한 지식인들과 피식민지에 대한 차별적 정책의 합작품이었다. 그 결과 광복 후 우리 손으로 반남고분군이 고대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의미를 복원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그러나 이 작업은 지금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어서, 언젠가는 일제강점기의 고적조사가 한국학계의 성취로 다시 자리매김할 날이 올 것이라고 기대한다.

 

 

 

 

 

 

덕산리 4호분 갑관

■마한이라는 역사유산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나

 

 

 

 

 

 

광촌리 신촌 고인돌군(건판 7950)
나주시는 최근 들어 반남고분과 영산강을 ‘천년고도 나주’를 드러내는 유산과 자연환경으로 꾸미면서 앞장세우는 작업을 하고 있다. 바로 ‘영산강 역사 문화도시 조성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는 그동안 잠들어 있던 영산강의 역사와 문화를 자원으로 해 지역발전 전략을 수립해서 새로운 천년을 만들어가는 원동력으로 삼자는 취지에서 비롯됐다.

2018년은 ‘전라도 정도’(全羅道 定道) 천년이 되는 해다. 1018년 고려 현종은 전주의 전(全)과 나주의 라(羅)를 합해 ‘전라도(全羅道)’라고 이름 지었다. 전라도 정도 천년을 맞이하고 있는 전남도와 전북도, 광주광역시는 다양한 기념사업들을 준비하고 있는데 나주시는 이 사업 중의 하나로 ‘영산강 역사문화도시 조성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나주시는 마한의 역사를 널리 알리는데 우선 주안점을 두고 있다. ‘중ㆍ고교생용 마한 역사교재’를 발간하고 금동관 국제학술대회,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행사를 개최했거나 계획 중이다. 또 일본·중국 등 아시아와 활발하게 소통했던 영산강을 역사문화자산으로 가꿔나갈 방침이다.

나주시는 올해 4회째를 맞는 마한문화축제를 전라도 정명 천년 기념행사와 연계해 확대 추진한다. 올해 마한문화축제는 반남 고분군과 유적지 위에 세워진 ‘국립나주박물관’을 연계해 오는 10월19일부터 21일까지 3일 동안 열린다.

 

 

 

 

 

 

산제리 고인돌(건판 7955)
도움말 = 국립나주박물관, 이진우, 김정선, 양성숙

사진제공 = 국립나주박물관, 류기영, 정유진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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