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 좀 빌려줄래?”

“노트 좀 빌려줄래?”

<문상화 광주대학교 외국어학부 교수>
 

누구에게든 유학은 힘든 일이지만 영문학을 전공하는 내게 수업은 정말 쉽지 않았다. 영문학 수업은, 특히나 나 같은 소설 전공자에게는 마치 뜬구름잡기 같아서, 개관적인 사실을 증명하는 것도 아니고, 분명한 해답을 찾아내는 것도 아닌 마치 토론회 같았다. 수학수업처럼 칠판 가득 교수가 문제를 풀고, 그 것을 바라보면서 강의를 따라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소설 다 읽어 왔죠? 오늘 우리가 얘기할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어디라고 생각해요?”

교수의 첫 질문으로 수업이 시작되면 미국학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손을 들었고, 기회를 얻은 학생은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그 의견에 교수는 대단히 감명 받은 표정으로 약간의 코멘트를 하거나, 다른 학생이 그 의견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거나 동의하는 형식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발표하는 학생이나 듣는 교수도 의견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업 시간 내내 다양한 의견이 쏟아지고, 학생들은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죽을 맛은 나 같은 동양인 학생이었다. 교수가 말하는 것을 잘 기억했다가 답안지에 그대로 적는 한국식 교육에 익숙한 나는 중구난방으로 떠드는 분위기에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다. 교수가 말하는 것을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을 즈음에 저쪽에서 얘기하는 미국학생의 말은 정말 남의 나라 얘기였다. 따라서 가장 두려운 것은 시험과 성적이었다. 아무 것도 알아들을 수가 없는데 어떻게 답안지를 메꿀 것인지 손끝이 저릴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겠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강의실의 맨 뒤에 앉은 여학생이 열심히 필기를 하는 것을 본 순간 구세주를 만난 느낌이 들었다. 저렇게 열심히 필기를 하고 있으니 그 노트를 복사해서 읽는다면 수업 중에 못 알아들은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아서 날아갈 것 같았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그 여학생에게 가서 애처로운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나는 이 수업을 듣는 학생입니다. 수업이 어려워서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당신 노트를 복사하기 위해 빌릴 수 있을까요? 나의 목표는 단지 이 수업에서 살아남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여학생의 대답은 기대와는 반대로 안 된다는 것이었다. 절박함 때문에 체면불구하고 한 번 더 부탁을 했지만 돌아온 것은 같았다. 그러더니 조금 있다가 어색한 어투로 말했다.

“실은 내 남자친구한테 편지 쓰고 있었어.”

세월을 지내다 보면, 상대방의 처지보다, 내 입장을 먼저 생각한 덕에 낭패를 겪는다. 쉽게 돈을 빌려줄 것 같은 사람에게 도움을 청했다가 배신감을 느끼기도 하고, 소심한 노총각이 친절하게 대해주는 숙녀에게 만남을 청했다가 툇자를 맞기도 한다. 사실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전에,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해석했기 때문이다.

평창올림픽이 끝나면 다시 북핵 문제가 정치권의 화두가 될 것이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는 우리가 북한을 도우면 한반도에 평화가 올 것이라는 희망적인 시각으로 북핵에 접근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문재인 정부가 북한의 의중을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만 해석할 가능성이다. 냉철해야 할 대통령이 북한을 국가가 아니라 민족이라는 낭만적인 태도로 대한다면, 그 것이야 말로 대통령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태도이다. 북한이 수용할 수 있는 것과 수용할 수 없는 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뭉뚱거려서 희망적으로만 바라본다면 돌이킬 수 없는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

희망하는 것과 희망적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은 다른 것이다. 그리고 희망적인 결론은 사실에 대한 확인이 전제되어야 한다. 희망과 사실이 상충되면 자신의 희망을 포기하고 대안을 찾는 것이 맞다. 그런 과정을 무시한 희망적 결론은 재앙을 부를 뿐이다.

그때 내가 필기를 잘했냐고 묻지 않고 노트를 빌려 달라는 부탁을 먼저 한 덕에 서로에게 어색한 장면을 연출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대통령의 북핵에 대한 희망적인 결론은 우리뿐만 아니라 사랑스런 우리의 아이들의 미래를 위협하는 일이다.

문재인 정부의 프로정신이 발휘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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