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

충무공 정충신 장군<32>-제3장 의주로 가는 길

“왜놈의 침략을 받은 오늘의 사태를 보자. 조선의 장수는 목사, 현감 등 지방의 수령들이다. 그들이 언제 군사학을 배운 자들인가. 각지의 수령들이 자기 고을 사람들을 편성해 병력을 이끌었으나 뚜렷한 지휘 체계를 갖추지 못하니 우왕좌왕 개판 오분 전이지. 수령을 따르는 직업적인 군관들이 배치되긴 했지. 하지만 수령들의 보좌나 호위하는 정도다. 전령, 정찰병, 돌격장이 분화되어서 체계적으로 전투를 해야 하는데, 이것을 지휘할 능력있는 지휘관이란 게 사서삼경을 옆구리에 끼고 수염이나 매만지며 행세하는 수령들이란 말이다. 이 자들이 조상의 제문에는 능통하지만 병법을 제대로 익혔겠나, 화약과 총통의 성질을 알았겠나. 도덕적 의분은 높이 살 수 있지만 활 한번, 칼 한번 휘두른 적이 없으니 나가면 전멸하는 것이지. 병졸을 지휘하는 지휘부가 이 모양이니 부산포, 동래포, 진주, 상주, 탄금대 장호원, 여주, 용인을 무인지경으로 내주었지 않았느냐. 그래서 왜군은 겨드랑이에 날개를 달았다고 하지 않았더냐. 이런 지경이라면 귀신 잡는 신립이라도 어림없지.”

길삼봉은 제대로 된 상층부와 허리가 없는 지휘체계를 보고 서울 함락은 순식간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내다보았는데, 과연 불행히도 그렇게 되고 말았다.

개전이 되고 수 만의 왜병을 만나 야전을 치렀지만 아군은 적군과 접전하자마자 궤멸되었다. 정규군이라는 신립 장군 부대도 탄금대에서 패퇴하고 말았다. 후방의 병사들이 정신줄 놓고 도주하기 시작했고, 통제불능 상태인 다른 지휘관도 도망가기 바빴다.

그나마 전열을 가다듬어 싸우는 병사가 의병과 승군들이었다. 삽질과 괭이질을 해본 농군들과 절간에서 무도를 닦은 승군들이 적군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싸워서 진격을 다소나마 저지했던 것이다. 그들은 정연한 예법은 잘 몰랐지만 싸움에는 능했다.

“성님은 왜 그렇게 아는 것이 많습니까. 성님 같은 분이 일선에 나가셔야 하는데, 왜 안나가세요?”

그가 물끄러미 정충신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나가면 잡히고, 잡히면 죽는데 그런 죽는 수를 왜 스냐. 죽는 꼴이 환한데 나설 수 있겠느냐. 또 그런 판에 나가 싸우고 싶은 충심이 생기겠느냐. 지금은 쓸모 있다고 그냥 넘어갈지 몰라도 종당에는 붙들어 매고 어떻게든 목을 칠 것이다. 실컷 이용해 먹고는 어느 순간에 목을 칠 것이다. 내가 한두 번 속았냐? 개자식들이지.”

“그야 그들도 후환이 두려워서 그러겠지요.”

“그러니 비열한 놈들이지. 그런 야만에 나는 말려들고 싶지 않다.”

“내가 중심부에 들어가면 성님을 꼭 불러내겠습니다. 불러내서 성님을 활용하겠습니다.”

“틀렸어.”

그가 절망적인 어조로 말했다.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네가 장성했을 때는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런 섭섭한 말씀을…”

“나는 지금 거저 살고 있다. 뜬구름처럼 살고 있다. 내 한 목숨 버린 지 오래다.”

그가 비로소 입을 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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