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 호남제일 의병장 심남일

최혁 주필의 전라도역사이야기
32. 목숨 바쳐 일제와 싸운 의병장 심남일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 호남제일 의병장 심남일
일제침략에 맞서 1908~9년
전남 중·남부지역에서 맹활약
13차례 전투 日軍에 큰 타격
능주에서 체포돼 대구서 순국

■호남의 3대 의병장 심남일

일제국권침탈에 맞서 1908~9년 전남 중·남부지역에서 맹위

13차례 전투 일본군경 400여명 사상, 능주에서 체포돼 순국

1910년 10월 4일 걸출했던 호남의병장 한명이 대구 감옥에서 순국했다. 그 분은 바로 심남일(沈南一)의병장이다. 함평 태생인 심남일 의병장은 서당 훈장과 향교 장의를 지낸 유생으로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제의 국권 침탈에 맞서 의병을 일으켰다. 심남일 의병장은 호남창의회맹소의 기삼연 의병부대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기삼연선생 등이 일본군에 체포당해 총살당하자 독자적으로 의병부대를 결성해 일제에 항거했다. 심남일 의병부대는 1908년 음력 3월 강진 오치동 전투를 시작으로 능주 노구두, 함평 석문산, 능주 석정, 남평 거성동, 보성 천동, 1909년 음력 7월의 장흥 봉무동 등지에서 13차례의 전투를 벌였다. 일본 군경 400여명을 사상시켰다.

심남일 의병부대는 1908~9년 사이 전남 중남부 지역에서 맹위를 떨쳤다. 일제는 심남일 의병장등 남도지역 의병장들을 체포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1908년 10월 영산포헌병분대는 일진회원들로 구성된 정찰대를 발족시켜 의병장들의 뒤를 쫓았다. 그 해 12월에는 영산포헌병분대장의 지휘를 받는 8개 부대와 광주수비대 3개 부대가 심남일 의병부대 등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했다.
 

헌병장흥분견소 1909년 촬영. 장흥은 동학농민군들이 일제에 맞서 거세게 저항했던 곳이기에 일제는 반일 세력에 대한 뿌리를 뽑기 위해 조선강점 초기 장흥에 일본헌병대를 파병했다.

일제의 ‘남한 폭도 대토벌 작전’이 거세지자 호남지역 10여 명의 의병장들은 잠시 의병부대를 해산키로 하고 몸을 피하기로 했다. 그러나 심남일의병장은 1909년 10월 9일 능주의 풍재바위굴 속에서 일본헌병에 체포된다. 일제는 심남일의병장을 체포하자 그 이튿날인 10월 10일에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을 종결지었다.

그만큼 심남일의병장의 활약이 대단했던 것이다. 심의병장은 9월 2일 광주교도소로 옮겨져 모진 고문을 받다가 대구 감옥으로 이감된다. 심의병장은 다음해인 1910년 10월 4일 처형당한다. 광주공원에 ‘심남일 의병장 순절비’가 세워져 있다. 정부는 고인의 장한 뜻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선생의 이름은 수택(守澤)이다. 선생이 의병을 일으키면서 ‘전남 제일의 의병장’이라는 의미로 스스로 남일(南一)이라 불렀는데 이후 세상 사람들도 선생을 심남일이라 불렀다. 이런 연유로 선생이 이끌던 의병부대인 호남의소 역시 ‘남일파’로 불렸다.

■ 심남일 의병장의 생애

심남일 의병장은 1871년 전남 함평군 월야면 정산리 새터(新基)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심의봉(沈宜奉), 어머니는 진주 강씨(姜氏)다. 선생의 집안은 오래전에 벼슬이 끊겼으나 선생은 어렸을 때부터 한학을 익혔다. 자그마한 서당에서 훈장을 하며 지냈다. 평택 임씨와 혼인해 두 아들과 세 딸을 두었다.

선생은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뒤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 조선강탈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자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하기로 결심했다. 그렇지만 선생에게는 의병을 일으킬 수 있는 재물이 없었다. 조그만 마을의 훈장이었던 탓에 의병들을 불러 모으기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집을 떠나 1907년 후반 호남창의회맹소에 가담했다. 호남창의회맹소는 1907년 10월 30일 전남 장성의 수연산(隨緣山)석수암(石水庵)에서 의병장 기삼연(奇參衍)의 의병부대를 포함한 4∼5개의 의병부대가 연합해 결성한 의병연합부대다. 김태원, 김율형제의 의병부대가 합류했으며 병력은 모두 400∼500명에 달했다.

호남창의회맹소 의병부대는 1907년 무장분파소(茂長分派所) 습격을 시작으로 고창읍성과 법성포를 공격해 세곡(稅穀)을 빼앗아 일부는 주민들에게 나눠 주고 일부는 군량미로 비축했다. 또 장성읍과 영광읍을 점거해 헌병대 분파소와 우편취급소·군아·세무서 등을 파괴하고, 일본인과 일진회원들을 살해했다.

1908년에는 담양·함평·고막원(古幕院) 등에 있는 일본인 관련 기구들을 습격해 큰 피해를 입혔다. 의병부대는 장성·영광·담양·고창·함평 등지에서 활동하면서 강력한 항일투쟁을 벌였다. 인명피해와 함께 일본인들의 상업 활동이 크게 위축되자 일제는 군경을 동원해 의병진압에 총력을 다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일제의 의병토벌작전에 따라 1908년 2월에 의병장 기삼연이 체포돼 광주천변에서 총살당했다. 한 달 뒤에는 김율이 체포됐다. 뒤이어 4월에는 김태원 의병장마저 전사하고 말았다.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호남창의회맹소가 거의 와해될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에 선생은 전남 각지에 국권회복의 의지가 담긴 격문을 돌려 의병을 규합했다.

격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국의 동포들은 풍파를 만난 배에 탄 신세입니다. 그런즉 악독한 왜놈들에게 잡혀 먹히기 전에 서로 분발해 의병을 일으켜 그들을 쳐부숴야 합니다. 우리 강토를 회복하고 종묘사직을 안정시키는 일은 오늘의 거사에 달려 있습니다(중략)

엎드려 바라건대 조정의 벼슬아치나 산림의 숨은 인재들은 저더러 그러한 자격이 못 된다고 하지마시기 바랍니다. 각자 의분심을 일으켜 함께 큰일을 치러 간다면 천하만국이 반드시 우리를 도울 것입니다’

선생이 남긴 의기결행시에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굳은 결심이 잘 나타나 있다.

沈南一 義兵將 義氣 決行詩(심남일 의병장 의기 결행시)

林下書生進鐵衣(임하서생진철의) 초야의 서생이 갑옷을 떨쳐입고

乘風南道馬如飛(승풍남도마여비) 바람타고 남도하니 말도 빨리 달리도다

蠻夷若末掃平盡(만이약말소평진) 왜놈들을 모두 다 쓸어버리지 못한다면

一死沙場誓不歸(일사사장서불귀) 모래밭에 죽어서 돌아오지 않으리

1907년 12월 5일(음력11월 1일) 선생과 의병 수 십 여명은 함평군 신광면 원산리 덕동 (얼밀재)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결의하고 항일투쟁에 나섰다. 선생은 토왜(土倭), 즉 친일파들에게도 나라를 빼앗고 있는 일본인들에게 협조하지 말고 의병에 참여할 것을 촉구했다.

또 향교에도 통문을 보내 서로 호응해줄 것을 요청했다. 각 고을의 면장과 세금영수원, 이장들에게도 경고문을 보내 일제에 협조할 경우 응징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선생은 ‘심남일 의병부대’의 출병을 널리 알리는 한편 의병부대를 체계적으로 조직했다. 선생은 전통적인 군제인 삼군체제(三軍體制)를 근간으로 삼아 의병부대를 선봉-중군-후군으로 나누고 강무경을 선봉 부장으로 삼았다.
 

능주 바람재 바위굴에서 피체된 심남일, 강무경 의병장
앞줄 왼쪽부터 호군장 강달주, 심의병장의 처 임사오, 강무경의 처 양방매. 일제의 기록에는 앞줄 왼쪽 사람이 강무경 처동생인 양용석(梁龍石)이라 적혀있다.

심남일의병장과 선봉장 강무경(姜武景)은 의형제를 맺은 관계였다. 강무경은 필묵상(筆墨商)이었다. 강무경의 뒤를 이어 선봉장으로 활동한 장인초는 목수출신이다. 작전참모격인 모사 권택은 한때 최익현의 문하에서 공부한 유생이었다. 중군장 안찬재도 유생이었다.

심남일 의병부대는 크게 세 가지 목표를 가지고 활동했다. 첫 번째는 일본 헌병과 경찰에 대한 공격이다. 두 번째는 각 지역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일본인과 일본인에 협조하고 있는 친일인사들에 대한 응징이다. 세 번째는 주민보호다.

당시에는 일부 무뢰배들이 의병을 사칭하며 주민들의 재산을 갈취하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심남일의병부대는 주민들이 이런 무뢰배들을 신고하면 응징하는 일까지 감당했다.

또한 선생은 안민적 의병활동을 크게 강조했다. 주민들에게 행패를 부리거나 군율을 어긴 자는 가혹하게 처벌했다. 일제 측이 작성한 기록에도 ‘심남일이 부하의 비행을 엄격히 다스리고 재물의 강탈을 금지시켰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심남일의병부대는 함평, 보성, 나주, 장흥 등지에서 일본군경과 수십 차례의 전투를 치르며 일제에 타격을 가했다. 영암 사촌에서는 일본 금평산(琴平山) 일본헌병수비대장을 사살하기도 했다.

심남일의병부대가 우체국 등을 공격한 것은 당시 우체국은 의병부대에 관한 정보를 일본군에게 신속하게 전달하는 중요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장흥은 동학농민군들이 일본군에 맞서 최후의 일전을 벌이는 등 다른 곳보다 항일기운이 높아 일제는 장흥에 헌병분견소를 설치하는 등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1905년 장흥우체국 개원기념사진

일제 군경과 싸워 수차례나 혁혁한 전공을 세우자 심남일의병부대는 용맹한 의병부대로 이름을 떨쳤다. 또 한편으로는 주민들을 보호하는데 정성을 들이자 심남일의병부대는 지역주민들로부터 큰 신망을 얻었다.

전남의 중남부지역을 근거삼아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선생의 존재는 일본군에게 눈엣가시와 같았다. 일제는 1908년 후반부터 선생의 체포에 혈안이 됐다. 일제는 1908년 10월 일진회원들로 구성된 정찰대를 의병부대에 대한 정찰을 실시했다. 정찰대는 영산포헌병분대의 후원으로 이뤄졌다.

또한 그 해 12월 15일에는 영산포헌병분대장의 지휘아래 8개 부대가, 광주수비대에서는 3개 부대가 심남일 의병부대 등을 진압하기 위하여 동시에 출동했다. 그리고 1909년 6월 초에도 3개월 예정으로 3개의 변장정찰대가 심남일과 전해산, 안규홍의병부대의 근거지를 찾기 위한 정찰활동에 들어갔다.

일제는 7월 중순에도 1개월 예정으로 11개 부대를 편성했는데 일제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이들 부대의 목표는 ‘심남일과 전해산을 죽이는데 있었다’. 일제가 심남일의병부대의 제거에 얼마나 골몰하면서 전투력을 모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후 일제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시작됐다. 일제는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30일까지 약 두 달 간에 걸쳐 남한 대토벌 작전(南韓大討伐作戰)을 실시했다. 작전의 주요내용은 전남과 그 외곽지대의 항일의병들을 일망타진한다는 것이다.
 

가족의 시체를 찾는 의병가족들
목포 유달산 아래 목포시청 근처에서 의병들에게 훈시하는 친일파 전남관찰사

일제의 공세가 심해지자 심남일 의병부대는 1909년 7월경 부대를 소규모로 분산한 뒤 활동을 일시 중단했다. 뒤이어 8월말 심남일의병장 등 10여 명의 의병장이 강진군 모처에 모여 대응책을 논의했으나 훗날을 기약하고 일단은 해산하기로 결정하고 흩어졌다.
 

심남일의병장이 은신했던 동굴
일본군에 체포돼 호송되고 있는 의병

선생은 선봉장 강무경등과 함께 능주의 풍치(화순군 청풍면 이만리 소재) 산속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나 1909년 10월 9일 사다케(佐竹) 대위가 이끄는 47명의 일본군에 의해 사로잡혀 광주감옥에 갇혔다. 1910년 6월 3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이 선고되자 이에 불복 항소해 대구감옥으로 이감됐다.

그러나 항소하는 것이 원수인 일제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모습으로 비춰질 것이라는 생각에 그 해 8월 25일 강무경과 함께 항소를 취하했다. 같은 해 10월 4일(음력 9월 2일) 일제가 사형을 집행해 대구감옥에서 순국했다. 선생의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8번)에 안장돼 있다.
 

전북 덕유산 근처 나제통문 입구에 있는 의병장 강무경 동상

강무경은 전북 무주 설천면 출신으로 심남일의 권고로 의병이 됐다. 강무경은 의병활동 중 부상을 입어 영암에 머물며 치료를 받던 중 양방매를 만나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된다. 양방매 역시 남편을 도와 의병활동을 해 부부의병으로 유명하다. 강무경은 1910년 8월 대구 감옥에서 순국하고 양방매는 평생을 수절하다 97세로 한 많은 삶을 마감했다. 강무경의 동상은 덕유산 나제통문 입구 근처에 있다.

심남일의병장의 체포는 곧 호남의병의 종식과 같았다. 일제는 심남일의병장에 대해 ‘현재 폭도 중에서 가장 교묘한 자’라고 일컬으며 선생을 체포하는데 전력했다. 훗날 백암 박은식은 그의 저서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심남일의병장에 대해 이 같은 평가를 내렸다.

‘그는 훤한 얼굴에 훤칠한 풍채로 재주가 뛰어나고 기지가 많았다. 의병 70여 명을 모집해 누차 기묘한 계책으로 토적하여 매우 위망이 있었으나 마침내 장흥군의 동쪽 산에서 패전하여 의병장 강무경과 함께 전사(체포의 誤記)했다.

■심남일(沈南一)의병장의 ‘湖南義將’(호남의장) 인영

심남일 의병 인장은 서신·연락에 사용되던 신표(信標)

전남 동서부 지역 의병부대에 문서 보낼 때 사용한 듯
 

심남일의병장 인장 인영
‘湖南義將’(호남의장)이라고 새겨져 있는 인장의 인영. 심남일 의병장 체포나 처형에 관련됐던 일본군 대위가 호남의장 인장을 찍은 뒤 기념으로 누군가에 넘겨준 것으로 추정된다. 장흥 향토사학자 양기수씨가 지난 1988년 외조부 유품에서 발견해 보관해 왔던 것이다.

심남일(沈南一)의병장 인장(인영)은 심남일 의병장의 의병활동과 관련된 유일한 유물이다. 이 인영은 실제 인장을 찍은 것으로 인장의 크기는 5㎝ × 5㎝이다. 심남일 의병장의 인영은 당시 조선의병 진압에 나선 일본 군인이나 체포에 동원됐던 헌병이 압수한 인장을 종이에 찍어 보관하고 있던 것이다.

심남일 의병장이 사용했던 인장의 ‘湖南義將’(호남의장)은 조선시대 관아의 인부(印符)처럼 사용된, 신표(信標)로 보인다. 즉 문서에 적힌 명령과 지시가 심남일 의병장의 뜻임을 밝히는 인장이었던 것이다.

전남 동부의 안규홍 의병부대와 서부지역의 전해산 의병부대와 긴밀히 연락할 때, 또 1909년 7월께 일제의 체포를 피해 의병부대를 소규모로 분산하고 활동을 잠시 중단하던 당시 사용한 신표(信標)로 추정된다.

심남일 인장이 찍힌 이 인영은 지난 1988년 장흥의 향토사학자 양기수씨가 일제 초기 장흥재판소에 근무했던 외조부 박진옥(朴珍玉)씨의 집(장흥읍 남외리 16번지)에서 유품을 정리하던 중 발견한 것이다.

심남일 의병장의 인영이 찍혀진 종이에는 ‘韓國派遣步2. 12中隊 ?竹 大尉之賜 全南暴徒首魁沈南一之使用 印影’이라는 글이 적혀 있다. ‘한국파병 2대대 12중대 유우다케 대위가 주다 전남폭도괴수심남일이 사용한 인영’이라는 내용이다. 일본군 보병 2대대 12중대장이던 유우다케가 준 인영이라는 것은 밝히고 있지만 수령자가 누구인지는 미상(未詳)이다.

양기수씨에 따르면 외조부 박진옥씨는 광복직전에는 산림조합의 경찰로도 근무했다. 1945년 광복 당시 일본으로 철수하던 장흥의 일본인들이 미처 가져가지 못한 귀중품과 기념품들을 박 씨에게 상당량 건네주었는데 이때 인장인영이 그 안에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인들의 장흥재향군인회 회원발회식(大正6年春 長興在鄕軍人會 會員發會式)
1918년 장흥에 거주했던 일제 헌병과 경찰, 그리고 군 관계자들이 모여 모임을 갖고 찍은 사진. 심남일 의병장 인영 사진 역시 이들 중 한명이 보관하고 있다가 고 박진옥씨에게 준 것으로 보인다. /양기수씨 제공

박씨는 지난 1970년 사망했다. 양기수씨는 지난 1988년 외조부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심남일 의병장 인영 사진을 발견했다. 양씨는 여러 정황상 광주지역의 영향력 있는 일본인들과 교류가 잦았던 장흥지역 일본인 중 누군가가 일본 군부 혹은 헌병대 관계자들로부터 이 인영사진을 선물로 받아 보관하다가 외조부에게 주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심남일 의병장 기념관
 

함평에 있는 심남일의병장기념관

‘남일 심수택 의병장 기념사업관’은 전남 함평군 월야면에 자리하고 있다. 이 기념관에는 사단법인 의병정신선양중앙회 수석연구위원 이태룡 박사가 국가기록원에서 찾아낸 심남일 의병장 관련 자료와 전남 장흥 향토사학자인 양기수 선생이 보관하고 있던 ‘湖南義將’(호남의장) 인영(印影)등 수십여 점의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이태룡 박사가 국가기록원에서 발굴한 사료들은 심남일 의병장의 이름이 적힌 ‘형사사건부’와 ‘수형인명부’, 심남일 의병부대 선봉장 장인초(張仁初), 군량장 이세창(李世昌), 모사였던 권영회(權寧會), 기군장 김치홍(金致洪)의 판결문 사본과 심남일·강무경(姜武景)·이세창·장인초 의병장의 사형집행 기사가 실린 ‘조선총독부관보’ 등이다.

또 1909년 6월 27일 권영희 의병장에게 사형집행 명령을 한 일제통감부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당시 내각총리대신 임시서리 박제순에게 통지한 ‘통감부래안(統監府來案)’ 사본 등이다.

이와 함께 오준선(吳駿善)이 엮은 심남일의병장의 항일투쟁기인 <沈南一實記>가 보관돼 있다. <심남일실기>는 격고문과 ‘토왜(土倭)에게 타이름’ 등의 격문, 접전일기(接戰日記),시, 황제밀조 등이 수록돼 있다.

접전일기는 1908년 3월 7일의 강진 오치동전투를 비롯 장흥·남평·능주·영암·나주·해남·보성 등지에서의 전투내용과 일본군에 체포된 후 광주감옥에서 일경과 나눈 대화인 ‘광주담판’등이 담겨있다.

또 이 책에 실려 있는 대구 담판 시에서 심의병장은 “500년을 내려온 예의의 나라/하루 아침에 왜놈세상이 된단 말인가/이 몸이 차라리 죽을 망정/원수와 함께 차마 살 수는 없다”라는 시를 남기고 나라를 빼앗긴 한을 통분해하고 있다.

<심남일실기>에는 을사(1905) 11월 22일자로 된 고종의 조칙이 실려 있다. 내용은 최익현(崔益鉉)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고 호서(忠義軍)·호남(壯義軍)·영남(奮義軍)·관서(勇義軍)·관동(强義軍)·해서(扈義軍)·관북(熊義軍)에 의병을 소집한다는 것이다.
 

심남일의병장 손자 심만섭 씨와 증손자 심창남씨(좌측)
심남일 기념관앞의 심만섭씨

기념사업관은 심남일의병장의 증손자인 심창남씨가 실질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순국 107주년인 10월4일을 맞아 지난 3월부터 미공개 자료와 관련 사료들을 일반에게 공개했었다. 기념관 주소: 전남 함평군 월야면 가차길 47.

문의(심창남) : 010-9442-2760 / 061-323-2760

■심남일 의병장 순절비가 광주공원에 있는 까닭은?

광주공원에는 함평 출신인 심남일의병장을 기리는 ‘의병장남일심공순절비’가 서 있다. 고향이 아닌 광주에 순절비가 세워져 있는 것이 의아스럽다. 이유는 심남일의병장의 며느리 때문이다. 1962년 정부는 심남일의병장에게 건국훈장독립장을 수여했다. 유족인 며느리는 정부에서 받은 연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광주향교로 가져왔다.
 

심남일의병장 며느리

시아버지 심남일의병장이 광주향교에서 의병활동을 시작한 것을 잊지 않아서이다. 광주향교 어른들은 며느리가 가져온 그 연금을 꼬박꼬박 모았다. 그리고 그 연금에 성금을 더해서 광주공원에 순절비를 세웠다. 순절비는 심의병장의 고향인 함평을 향하고 있다. 이것이 광주공원에 순절비가 세워진 연유다. 장한 며느리와 의연한 향교의 어른들이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일이다.
 

광주공원에 있는 심남일의병장순절비

 

 

도움말 = 이태룡, 양기수

사진제공 = 양기수, 광주시립사진전시관, 광주광역시시립민속박물관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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