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대용, 나주 문평에서 10년 세월 거북선을 연구하다

최혁 주필의 전라도역사이야기
33. 거북선을 설계한 나주 문평의 나대용 선생
나대용, 나주 문평에서 10년 세월 거북선을 연구하다
마을 저수지에 시험용 거북선 띄워놓고 궁리
10년 실험 뒤 설계도면 들고 충무공 찾아가
거북선, 첫 출전 사천해전에서 돌격선 맹활약
화포사격 후 왜선 충돌 깨부수는 전술에 활용
나대용선생 충무공과 함께 15차례 해전 참가
창선·해추선(쾌속선) 개발 造船과학의 선구자
해군, 나대용잠수함 命名하고 매년 추모제 참가
나주 문평 생가·묘소 관리허술 정성·관심 가져야

■거북선의 고향 나주 문평
 

소충사전경
소충사(召忠祠)는 나대용 선생의 애국·충절정신을 기리기 위해 1977년에 건립됐다. ‘소충’(召忠)이라는 시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내린 것이다.
나대용장군 영정
소충사앞 나대용 장군상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나주 문평은 ‘거북선의 고향’이다. 조선 선조 때의 무인이었던 체암(遞菴) 나대용(羅大用,1556∼1612)선생은 거북선 연구와 제작에 심혈을 기울인 인물이다. 10여 년 동안 거북선제작에 매달렸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에 이순신 장군을 찾아가 거북선 제작을 협의했다. 선생이 ‘완벽한 거북선 제작’을 위해 ‘연구용 거북선’을 저수지에 띄워놓고 이모저모로 궁리를 거듭했던 곳이 바로 선생의 고향인 나주 문평이다.
 

나대용 장군 생가 안채
나대용장군 생가 대문

나주 문평에는 거북선을 실질적으로 제작해 해전에 투입, 이순신 장군과 함께 큰 공을 세운 나대용선생의 생가가 있다. 생가 앞에는 선생의 동상과 거북선 모형이 세워져 있다. 지금은 논으로 변해버렸지만 먼 옛날 거북선을 띄워놓았다는 저수지(방죽)터도 있다. 거북선을 만들었던 곳은 여수·보성 등 여러 곳이지만 거북선 제작을 연구하고 실험한 장소는 문평이 유일하다.

그래서 문평은 거북선의 고향이면서 거북선의 고장이다. 방죽 터로 알려진 곳에서 불과 2Km 정도 떨어진 곳에는 고막천이 흐르고 있다. 고막천은 예전에 수량이 많고 제법 깊어 큰 배들이 오갔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에는 고막천 인근 대굴포에 수군기지가 있기도 했다. 큰 배가 오갔던 고막천과 영산강 인근에서 자라난 나대용 선생이었으니 배에 관한 지식이 상당히 깊었을 것이다.
 

실험용 거북선을 띄워놓았던 방죽자리
나대용장군이 거북선을 만들어 성능을 실험했던 곳. 저수지 자리다. 지금은 논이지만 과거에는 큰 방죽이었다고 전해진다.

나대용 생가의 행정주소는 전남 나주시 문평면 오륜길 28-5이다. 예전주소는 문평면 오룡리 오륜리다.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무안광주고속도로 문평IC에서 내려 825번 도로 남쪽방향으로 향하면 된다. 825번 지방도로는 1번 국도와 만나게 된다. 문평면사무를 지나 1Km쯤 가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좌측방향으로 들어서야 한다. 굽이진 길을 300m정도만 올라가면 산기슭에 큰 기와집들이 나오고 먼발치에서도 동상이 보인다.

나대용 생가로 들어가는 길이 정비가 잘 돼 있다. 방죽골 마을 초입 오륜회관 앞에 너른 공터가 있는데 이곳에 차를 주차하면 된다. ‘풍류락도 석관정길’이라고 써진, 제법 세련된 안내판이 방문객들을 반겨준다. 차에서 내려 50여m를 걸어가면 곧바로 나대용 생가가 나온다. 생가는 남향집으로 너른 마당을 앞에 둔 앞면 4칸·옆면 1칸의 초가집이다. 이곳에서 호롱불 아래 나대용선생이 10년 세월을 거북선 설계도를 놓고 씨름했다 생각하니 새삼 가슴이 뭉클하다.

나대용 생가는 지금까지 세 차례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받았다. 동네 주민들은 첫 번째 보수공사를 할 때 초가 벽에서 무엇인가가 그려진 한지가 많이 붙어있었다고 말한다. 관계자들은 그 벽지들이 ‘나대용 선생의 거북선 설계도면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추정하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만약 그 벽지가 거북선 설계도면이고, 지금까지 남아있었다면 거북선의 구조와 실체를 규명할 수 있는 결정적 자료가 됐을 것이다.

■소충사와 나대용장군기념사업

생가를 나와 오른쪽 길로 돌아가면 나대용장군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된 ‘소충사’(昭忠祠)가 있다. 소충사(召忠祠)는 나대용 선생의 애국·충절정신을 기리기 위해 1977년에 건립됐다. 197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나대용 선생은 충무공이순신 장군의 업적에 가려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1974년도에 노산 이은상선생을 중심으로 나대용장군 기념사업회가 발족되면서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다. ‘소충’(召忠)이라는 시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내린 것이다.
 

소충사 전경
소충사 충용문
소충사 묘정비

소충사 입구에는 외삼문인 충용문(忠勇門)이 있다. 충용문을 들어서면 묘정비와 관리사인 지인제가 나온다. 조금 더 들어가면 나대용 선생을 모시고 있는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사당에는 선생의 영정이 보관돼 있다. 영정은 실제의 인물을 본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상상으로 그린 것이다. 그렇지만 날카로운 눈매와 다부진 골격이 무인으로서의 풍모를 느끼게 한다.

나대용 선생은 무인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전선 설계자이자 과학자였다. 나대용 선생은 왜선과의 전투에서 거북선이 높은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많은 포를 실으면서도 빨리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애썼다. 왜 수군들이 즐겨 사용하는 근접백병전을 피하기 위해 판옥선에 철갑지붕을 덮고 그 위에 뾰족한 철심을 박는 방어수단을 강구했다. 거북선은 조선(朝鮮)의 조선술(造船術;배 만드는 기술)과 과학적 연구의 결정체다.

그래서 소충사에서는 매년 4월 21일 과학의 날에 추모제가 열리고 있다. 추모제에는 매년 해군 3함대 소속 나대용함 잠수함 승조원 30여명이 참가하고 있다. 나대용 선생은 바다에서 적을 무찌른 명장이다. 또 거북선연구? 설계뿐만 아니라 쾌속선인 해추선을 발명한 선박기술자이자 과학자이다. 그래서 해군은 지난 2000년 8번째로 건조된 잠수함을 ‘나대용함’이라 명명하고 나대용 선생의 구국충성심과 위업을 기리고 있다.

나대용함은 강력한 무기체계를 갖춘 최신형 잠수함이다. 작전에 투입되면 40여명의 승조원이 50여 일 동안 해상에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나대용선생 추모제에 참석한 나대용함 승조원들은 보통 1박2일 일정으로 나주를 찾는다. 나대용선생을 참배한 뒤 나주 동신대 박물관에 들려 나대용 장군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특강을 듣는다. 참으로 의미가 깊다. 해군 관계자들의 마음씀씀이에 새삼 감사한 마음이 깊다.

소충사 앞에는 ‘나대용장군상’과 거북선 모형이 자리하고 있다. 나대용장군상은 사단법인 체암 나대용장군기념사업회가 세운 것이다. 장군동상은 2008년 전남도와 나주시, 후손대표 나승옥씨가 각각 1억원 씩을 마련해 전남대학교 최규철교수에게 의뢰해 제작한 것이다. 2012년 4월21일에 세워졌다.

동상은 나대용선생이 전투를 지휘하고 있는 모습이다. 다부진 몸매에 눈이 매서워 용장의 모습이다. 동상과 거북선 모형은 일부러 만든 정사각형 연못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다. 연못은 바다를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나대용장군 기념사업계획도

동상 곁에 자리한 ‘나대용장군기념사업계획조감안도’에는 2020년까지 생가 옆에 한옥관광마을이, 방죽자리 옆에는 과학관이 들어선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2008년에 동상을 세울 때만 하더라도 많은 계획들이 세워졌으나 막상 이뤄진 것은 별로 없다는 생각이다.

■나대용 선생의 거북선 건조와 거북선의 위력

체암(遞菴) 나대용(1556∼1612)선생은 선조 16년(1583) 무과에 합격했다. 1591년(선조 24)에 전라좌수영 수사(全羅左水營水使)로 있는 이순신장군을 찾아가 그 동안 연구한 거북선의 설계도를 보이며 제작에 들어갈 것을 건의했다. 이에 이순신장군은 크게 기뻐하며 선생을 막하(幕下)에 두고 거북선 건조와 각종 무기를 제작하는 임무를 맡겼다. 나대용 선생은 이때 3척의 거북선을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수군이 거북선을 타고 화포발사 훈련을 한 것은 1592년 4월 12일이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제1군 1만8천명을 태운 800여척의 전선이 부산포 앞바다에 등장한 하루 전날이었다. <난중일기>에는 이날 훈련 상황이 이렇게 적혀있다.

‘식후에 배를 타고 거북선의 지자포(地字砲)와 현자포(玄字砲)를 쏘았다. 순찰사의 군관 남한이 살펴보고 갔다. 정오에 동헌으로 옮겨 활 10순을 쏘았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보유하고 있었던 화포는 천·지·현·황자총통이었다. 천자총통이 가장 큰 총통이었으며 지자총통, 현자총통, 황자총통 순이었다. <천자문>에 나오는 글자순서에 맞춰 총통이름을 지은 것이다. 이중 가장 많이 사용되던 총통은 현자총통이었다. 현자총통은 천·지총통보다 작아 제조하기가 쉬었다. 덩달아 화약도 적게 들었으나 포탄이 날아가는 거리는 비슷했다.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에 지자총통과 현자총통을 부착했다. 그리고 적선과 마주치면 먼 거리에서 화포사격을 해 타격을 입힌 뒤 가까이 다가가 들이받는 전술을 사용했다. 일본 전선은 배 밑바닥이 뾰족하고 판재가 얇아 무게가 많이 나가는 화포를 실을 수가 없었다. 이에 반해 조선수군의 거북선과 판옥선은 밑바닥이 편편하고 넓었다. 그리고 소나무로 만들어져 매우 튼튼했다. 무거운 화포를 실을 수 있었고 충격에 강해 육박전에 유리했다.

일본 수군의 전함인 안택선(安宅船:아다카부네)과 관선(關船:세키부네)은 주로 삼나무와 전나무를 이용해 만들었다. 이 나무들은 가공하기가 쉬워 얇은 판재로 만들어졌다. 얇은 나무로 만들어진 안택선과 관선은 가벼웠다. 그래서 속력이 빨랐다. 하지만 배 밑바닥이 V자 형태여서 급히 방향을 바꾸기가 힘들었다. 이에 반해 조선수군의 주력선들은 밑바닥이 U자여서 방향전환이 쉬었다.

조선수군은 일본 전선의 약점을 최대한 공략했다. 일본 전선은 화포가 없으니 장거리 포사격을 가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기선을 제압한 뒤 판옥선과 거북선이 다가가 들이박으면 일본전선은 그대로 깨져 물속에 수장됐다. 일본 수군은 배에 뛰어올라 싸우는 근접전에 강했으나 조선수군의 판옥선은 갑판을 이중으로 만들고 선체를 높여 이를 막아낼 수 있었다. 게다가 거북선은 지붕이 덮여 있어서 접근 자체가 불가능했다.

이순신 장군은 당포해전보고서인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에서 거북선의 장점과 위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신은 일찍이 왜적들의 침입을 우려해 별도로 거북선을 제조했습니다. 거북선 앞에는 용머리를 올려 그 입으로 대포를 쏘게 했습니다. 등에는 왜병들이 배에 올라오지 못하도록 쇠못을 꽂아두었습니다. 거북선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는 구조입니다. 적선 수백 척 속에서도 쉽게 돌진하여 포를 사격할 수 있으므로 이번 출전 때에 돌격장이 그 것을 타고나왔습니다’

나대용 선생이 만든 거북선은 최소한 1592년 2월 이전에 몸체가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난중일기> 1592년 2월8일자에 ‘거북선에 쓸 돛베 29필을 받았다’는 대목이 나타나있기 때문이다. 3월27일자에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을 연습했다’는 내용이 있어 2월과 3월 사이에 돛배를 단 것으로 추정된다.

■거북선과 나대용 선생의 활약상
 

소충사앞 나대용 장군상과 거북선 모형
나대용 선생은 무인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전선 설계자이자 과학자였다. 나대용 선생은 왜선과의 전투에서 거북선이 높은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거북선이 처음으로 출전한 해상전투는 사천앞 바다에서 벌어졌다. 1592년(선조 25) 음력 5월 29일 이순신장군은 거북선을 포함한 전선 23척을 이끌고 노량으로 향했다. 하동선창에서 원균이 이끌고 온 전선 3척과 합세해 일본군이 있는 사천선창으로 다가섰다. 이때 일본군은 사천에 상륙해 배는 해안가에 묶어두고 산위에 진을 치고 조선군이 상륙하기를 기다렸다.

이에 이순신 장군은 유인작전을 썼다. 싸움을 거는 척하다 거짓으로 도망을 가니, 육지에 있던 일본군은 전선에 올라 타 조선수군을 추격해왔다. 넓은 바다로 일본 전선들이 나오자 이순신 장군은 갑작스럽게 전선을 돌려 일본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 때 선두에서 일본 전선을 헤집고 다니며 공격을 한 배가 거북선이다.

돌격장인 이언량, 이기남이 지휘하는 거북선은 포를 쏘면서 충격에 약한 일본전선에 돌격해 배를 까부셨다. 조선 판옥선들 또한 무지막지한 공격을 퍼부었다. 치열한 전투 끝에 조선수군은 적선 13척을 모두 격침시켰다. 이순신장군은 <난중일기>1592년 5월29일자에 사천전투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왜적들이 육지로 올라가 산봉우리에 진을 쳤다. 왜적들은 배를 산봉우리 아래에 줄지어 묶어 놓았다. 왜적들은 대항하는 태세가 빠르고 옹골졌다. (바다에서 싸움이 시작되자)장수들을 독촉하여 한꺼번에 화살을 비 퍼붓듯이 쏘는 한편 각종 총통을 바람과 우레같이 날려 보냈다. 적들이 두려워하여 물러갔다.

화살에 맞은 적이 몇 명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적병의 머리는 많이 베었다. 군관 나대용이 탄환에 맞았다. 나도 왼쪽 어깨위에 탄환을 맞았다. 등을 관통 당했지만 중상은 아니었다. 사수(射手)와 격군(노 젓는 군사)들 중에 탄환을 맞은 이가 많았다. 적선 13척을 불태우고 물러났다’
 

소충사앞 나대용 장군상과 거북선 모형

나대용선생은 사천전투 이전에 벌어진 옥포 해전(玉浦海戰)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옥포해전은 1592년(선조 25) 음력 5월 7일(양력 6월 16일), 경상도 거제현 옥포 앞바다에서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의 도도 다카토라의 함대를 무찌른 전투다. 이 해전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수군이 일본수군을 상대로 해 이긴 첫 번째 싸움이었다.

나대용선생은 충무공 이순신장군과 함께 옥포해전(1592년 5월7일)과 한산대첩(1592년 7월8일)에 참전했다. 선생은 옥포?한산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선생은 사천해전과 한산해전에서 일본군의 총탄에 중상을 입었으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용감히 싸웠다. 이때 입은 상처는 세월이 흘러갈수록 깊어져 훗날 결국 선생의 목숨을 앗아갔다.

선생은 정묘왜란 때 명량해전(1597년 9월16일)과 노량해전(1598년 11월18일)에 참전했다. 맹활약을 해 조선수군이 대승을 거두는데 기여했다. 선생은 모두 15차례 이순신장군을 따라 해전에 참전했다. 1611년 경기수군을 관할하는 교동수사에 임명됐다. 그러나 두 차례 입은 총상이 악화돼 부임하지 못하고 1612년 세상을 떠났다.

■나대용 선생, 새로운 전선을 개발하다
 

소충사앞 거북선 모형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과 함께 구국의 상징이다. 거북선의 활약상은 다소 과장된 것이 사실이지만 효과적인 전투수행을 위해 고안된 특수전함인 것은 사실이다. 이순신 장군이 이끌던 조선수군의 주력선은 판옥선이었다. 거북선은 왜선들의 전열을 흩어놓는데 주로 사용됐다. 판옥선에 지붕을 덮은 형태라 노를 젓는 격군과 포를 많이 싣지 못하는 단점이 있었다. 그렇지만 왜 수군들에게 공포를 심어주는 한편 적진을 헤집고 다니는 데는 최고였다.

정유재란 뒤에 나대용 선생은 새로운 전함인 창선(槍船)과 쾌속정을 만드는데 주력했다. 창선은 거북선을 개량한 전선이었다. 나대용선생은 임진·정유재란 당시 거북선이 맹활약을 했지만 전쟁이 끝난 평시에는 거북선 운용이 병력이 적은 조선수군에 부담이 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수군이 적게 타도 운용할 수 있는 전선을 많이 만들어 실전배치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거북선은 노 젓는 격군이 많이 필요했으며 활쏘기에도 불편했다. 그래서 나대용 선생은 1599년에 판옥선도, 거북선도 아닌 새로운 배를 25척 건조했다. 이 전선은 칼과 창을 빽빽이 꽂아놓아 적군이 접근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이름을 창선이라 했다. 창선에는 격군 42명이 노를 저었는데 매우 빨랐다고 전해진다. 활 쏘는 것도 매우 편리했다.

그래서 정유재란 후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이운룡(李雲龍)에게 새로운 전선개발을 건의했다. <선조실록>1606년 12월 24일자에 실려 있는 이운용의 상소에는 나대용의 창선건조건의가 자세하게 나와 있다. 나대용선생의 건의는 다음과 같다.

‘신(나대용)은 나주에서 성장했습니다. 계미년(1583년, 선조 16)에 과거에 급제해 6년 동안 북방을 방비했습니다. 이후 7년 동안 남쪽을 지켰습니다. 신묘년(1591년, 선조 24)에는 수사 이순신의 감조전선출납군병군관(監造戰船出納軍兵軍官)이 됐습니다. 임진왜란 초기에 옥포에 머물고 있던 왜적이 진격해와 싸움을 벌일 때 신은 발포가장(鉢浦假將)으로서 앞장서 돌격해 적선 2척을 포획했습니다.

사천·선창·당항포 등 15차례에 달하는 해전에서는 모두 으뜸가는 공을 세웠으므로 이름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마침내 강진현감(康津縣監)에 제수되었으며 그 이후로는 금구·능성·고성현감에 제수되었습니다.

신은 군사의 일에 경험이 많아지다 보니 군병(軍兵)의 이치에 대해서 조금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복(服:부모의 상)을 마쳤기에 한 가지 계책이 있어 구중궁궐에 찾아와 호소합니다. 왜적을 막는 데는 주사(舟師:수군)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정유재란 뒤에는 전선의 숫자가 삼도(三道:전라·경상·충청)를 통틀어 60여척에 불과해 뜻밖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 속수무책입니다. 그래서 같은 수의 군사로 전선을 많이 운용할 수 있는 계책을 말하고자 합니다.

거북선은 전쟁에 쓰기는 좋지만 사수와 격군의 숫자가 판옥선의 125명만큼 필요합니다. 활을 쏘기에도 불편하기에 각 영(營)에 한 척씩만을 배치하고 더 이상 만들지 않고 있습니다.

신이 늘 격군을 줄일 방도를 궁리하다가 기해년(1599)에 순찰사 한효순(韓孝純)의 군관이 되어 별도로 창선 25척을 건조했습니다.

격군 42명을 나누어 태우고 바다에 나가 노를 젓게 하였더니 빠르기가 나는 듯했습니다. 활쏘기와 편리함도 판옥선보다 나았습니다. 그 뒤 나라가 평화로워지자 한 번도 전쟁에 쓰지 않은 채 방치돼 썩어가고 있습니다.

만일 이 배를 다시 만들도록 하여 여러 장수들에게 1척씩을 맡긴다면 전선의 숫자는 전에 비해 배로 늘어나지만 사수와 격군의 수는 더 늘리지 않아도 되니 매우 효과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운룡은 전선은 모름지기 커야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임진·정유재란 당시 거북선과 판옥선처럼 큰 배들이 일본 전선들과 싸우기 좋았다는 관념에 사로잡혀 새로운 전선 건조에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이운용은 상소문에서 나대용선생의 건의에 대해 “나대용을 조선차관(조선차관)으로 임명해 한 두 척을 만들어 보게 한 뒤 편리한 지 여부를 시험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올리고 있다.

결국 조선수군은 나대용선생이 제안한 창선을 건조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선수군의 주력선은 여전히 거북선과 판옥선이 차지했다. 임금과 신하들은 거북선이 있으면 왜적들을 능히 무찌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정조 때는 거북선을 40척 건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1895년 군영이 폐지되면서 각 수영에 소속된 거북선은 모두 폐선 처리됐다. 안타깝게도 거북선의 실물은 지금까지 발견된 것이 없다.

나대용 선생은 또한 남해현감(南海縣監)으로 있을 때는 쾌속정인 해추선(海船)을 발명했다. <충무전서>와 <난중일기>,<조선왕조실록> 등에는 해추선에 대한 기록이 전해지고 있는데 해추선은 매우 빠른 배였다. 지금으로 치자면 쾌속선이다. 나대용 선생은 거북선을 설계하고, 창선이라는 개량형 전선과 쾌속선을 개발해낸 조선기술자이자 과학자였다. 그러면서 용맹스럽게 싸웠던 군사였다.

■생가 관리와 묘소정비의 아쉬움

나대용선생 생가 및 묘는 시도기념물 제26호(전남)이다. 선생의 생가는 매우 단촐하다. 꾸민 것이라고는 마당 입구에서 초가집 댓돌까지 이어지는 마당 석 뿐이다. 관리는 허술하다. 방문을 열어보니 날벌레 죽은 것들과 소소한 쓰레기들이 치워지지 않은 채 널려 있다. 옛 모습을 살리기 위해 이엉을 얹었으나 지난 가을에 이엉 얹는 것을 한번 걸렀는지, 지붕 뒤쪽이 폭삭 무너져 있다.

마을 주민 중 한 사람은 “경상도에서 온 관광객 한명이 거북선관련 유적지를 이처럼 허술하게 관리할 수 있느냐며 언짢아했다”며 “관계기관이 관리를 좀 잘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생가 안내판에 ‘나대용장군 생가 및 묘소’라 적혀 있어 생가를 둘러본 탐방객들이 생가 뒤쪽에 있는 묘소를 찾아갔다가 다른 사람의 묘소인 것을 발견하고 당황해 하는 것도방문객들의 편의를 위해 바로잡아야할 대목이다.
 

나대용 선생의 묘소
나대용 선생의 묘소는 생가가 있는 마을에서 3㎞ 떨어진 마전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선생애와 업적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규모다. 선생의 구국정신을 기리려는 관심과 정성이 필요하다.

생가 뒤에 있는 묘소는 나대용선생의 묘소가 아니다. 그런데 탐방객중 열에 아홉은 생가 뒤 의 묘소로 헛걸음을 한다. 생가와 묘가 같이 붙어있는 것처럼 표시된 안내판이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정작 나대용 선생의 묘소는 생가가 있는 마을에서 약 3㎞ 떨어진 마전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생가와 묘소에 대한 안내판을 따로따로 제작해 부착해놓는 것이 바람직하다.

마전산 기슭에 있는 나대용 선생의 묘소는 선생의 생애와 업적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참으로 초라한 규모다. ‘충무공 이순신 신화’는 이 충무공의 지략과 리더십, 화포로 무장한 거북선과 판옥선, 육박전에 유리했던 조선 전선의 구조, 그리고 목숨을 바쳐 싸운 무명의 용사들과 뒤에서 조선수군을 돕던 백성들의 희생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이순신 선양사업은 이충무공 개인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을 도와 싸웠던 용감했던 부하들과 백성들에게도 관심이 모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거북선제작에 심혈을 기울였던 나대용 선생에 대한 기념사업 역시 좀 더 규모가 확대돼야할 필요가 크다. 우선 당장 나대용 선생의 묘소정비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도움말 = 김세곤, 정만진, 신병철, 정여선, 양성숙

사진제공 = 위직량, 류기영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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