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

충무공 정충신 장군<41>-제3장 의주로 가는 길

“이대로 갈 수 없어요. 어떻게 이 지경이 됐는데도 가려고 하세요? 제발 원수를 갚아줘요. 소 돼지 잡아가고, 쌀가마니 훑어가고, 식구들을 죽인 놈들을 보고 스쳐지나 가다니요? 그것이 남정네가 할 일인가요? 이런 것을 보고도 참을 수가 있나요. 놈들을 가만 두고 가면 비겁하지 않나요?”

“남편은 어디 있소?”

“죽었어요. 소 돼지 잡아가고 쌀독 장독까지 훑어가는 놈들을 보고 낫을 들고 대들었어요. 그랬더니 놈들이 남편의 낫을 빼앗아 얼굴과 가슴을 난자하고, 그놈들 검으로 또 찔러서 죽였어요. 그리고 우리를 세워놓고 자기 무덤을 파라고 한 거예요. 이런 욕을 두 눈 번히 뜨고 보았어요. 이러니 내가 어떻게 죽어도 눈을 감겠습니까.”

“다 죽었단 말이오?”

“내가 당한 것은 남편, 시아버지, 시아주머니가 당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 한 목숨 무슨 쓸모가 있나요. 아무 쓸모짝이 없잖아요. 여자 정절 무슨 의미가 있나요. 하지만 식구들을 요렇게 무참히 요절낸 것을 참고 있으라니요. 나도 무엇이든 할 거예요.”

그녀가 일어설 자세를 취했다. 어둠 속에서도 여자의 두 눈이 빛났다.

“아이들은 어떻게 됐습니까요?”

길삼봉이 다시 물었다.

“외가로 보냈어요. 여덟살이에요. 그 애까지 당할 것 같아서 다른 사람을 시켜서 먼저 외가로 보냈지요. 그애만은 살려야 하니까요.”

“그건 잘했소. 그럼 마을은 어떻게 됐소.”

“불탄 냄새 못맡았나요. 우리 집이 외따로 떨어져서 맨 나중에 당한 것이지요. 그놈들이 마을에 쳐들어와사 양식 내놓으라고 사람들을 쫓고, 잡히면 검으로 찔렀지요. 일부 산 자들은 도망을 갔어요. 그놈들이 젊은 장정들과 처녀들부터 잡아가는데 부모들이 가만 있나요. 낫을 들고 대들면 낫을 빼앗아서 가슴팍을 찔렀어요. 칼에 찔려죽은 사람도 수도 없이 많습니다.”

“쳐죽일 놈들.”

“그러니 이대로 가시면 안돼요. 그놈들 간을 뽑아먹어도 시원찮아요. 억울하고 분이 나서 견딜 수 없어요.”

“마을이 지금 모두 비었다 이 말이지요?”

길삼봉이 다짐을 받듯 다시 물었다.

“네. 저놈들이 쓸어버렸다니까요. 이젠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어요. 모두 타버렸어요.”

잠시 생각하던 길삼봉이 여인에게 재차 물었다.

“몸을 갱신할 수 있겠소?”

“물 한모금 먹으면 낫겠어요. 하지만 움직이기는 힘들어요. 아래가 쏟아질 것 같아요.”

정충신이 바가지 물을 그녀 입에 갖다 댔다. 물을 벌컥벌컥 마시던 그녀가 제 설움에 겨워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읊조렸다. 그것은 흡사 미친 여자 같았다.

“이놈의 난리가 무슨 난리요? 왜 우리에게 이런 고통을 주는지, 우리가 무슨 죄를 저질렀다고 이런 슬픔을 주는지 하느님도 무심하셔라. 나는 절대로 나쁜 짓 안했어요. 우리 집안은 동정심 많고, 인정많은 사람들이라는 칭송을 받았지요. 그런데 쑥대밭이 돼버렸어요. 이런 집안을 없애버렸어요. 내 그놈들 복수하지 않으면 눈을 못감아요. 원수를 갚아야 제 분이 풀려요.”

“그럴 것잉마요. 무작스런 놈들이요.”

그리고 길삼봉이 정충신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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