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사림의 태두이자 조선최고 시인이었던 눌재 박상

최혁 주필의 전라도역사이야기
34. 눌재 박상 선생과 광주 서창 절골마을
호남사림의 태두이자 조선최고 시인이었던 눌재 박상
정조 ‘눌재가 조선 최고의 시인’ 극찬
자연·가족애 담은 1천200편 한시 남겨
연산군 믿고 횡포부린 외척 杖殺 시켜
압송위기였으나 정조반정으로 위기모면
중종 때 ‘신씨복위소’ 상소해 귀양살이
강직한 성품에 직언 ‘完人’ 명성 얻어
광주 서구 서창마을 절골마을이 태생지
재실은 소촌동, 시인 용아 박용철이 후손
 

서창입구에서 바라본 절골마을 풍경
충주 박씨는 1400년대 중반 방하동(사동) 마을에 들어왔다. 세조의 왕위찬탈에 실망한 박지흥은 방하마을에 들어와 살던 중 처가 죽자 이 마을 처녀를 맞아들여 부인으로 삼았다. 박지흥 부부는 아들 셋을 두었는데 둘째가 눌재 박상 선생이다. 셋째 박우의 아들이 영의정을 지낸 박순이다. 눌재와 박순의 신위는 광산구 소촌동에 있는 송호영당에 모셔져 있다.

■호남의 정신이 태어난 서창 절골(방하)마을

조선시대 지금의 광주광역시 서구에는 아주 유명한 학자가 살았다. 눌재(訥齋) 박상(朴祥, 1473-1530)선생이다. 조선의 왕 가운데 가장 공부를 많이 했던 정조대왕은 ‘조선최고의 시인은 박상’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눌재 선생은 1천200여편의 한시를 남겼다. 선생이 남긴 시는 다양하다. 가족들에 대한 사랑,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탄, 세상의 부끄러운 일들에 대한 꾸짖음 등이 선생의 시에 담겨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눌재 선생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선생은 글만 잘 지었던 분이 아니었다. 목숨을 걸고 연산군의 잘못을 지적했다. 또 연산군을 믿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엄벌에 처했던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삶과 글이 동일했던 분이다. 그래서 더욱 존경스러운 분이다. 눌재 선생은 글이 권력에 아부하는 수단으로 쓰이고 불의한 권력에 침묵하는 대가로 부귀를 누리는, 현 세태에 귀감이 되는 분이다.

그 자랑스러운 눌재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 바로 절골마을이다. 절골마을은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에 있는 마을이다. 서구 매월동 전평제에서 회재로를 타고 나주방향으로 가다보면 백마교차로를 만나게 된다. 그곳에서 좌회전을 한 다음 1km 정도를 들어가면 절골마을이 나타난다. 절골은 예전에 그곳에 절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절은 없고 절 자리로 알려진 곳에는 일반 가옥이 들어서 있다.
 

눌재 절골마을 표지석

절골마을 안쪽에는 봉산재(鳳山齋)가 있다. 봉산재는 눌재 박상 선생의 아버지 찬성(贊成)박지흥(朴智興)의 재실이다. 찬성공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장남이 하촌(荷村)박정(朴禎), 둘째가 눌재 박상, 셋째가 육봉(六峯) 박우(朴祐)다. 박우의 아들이 사암(思菴) 박순(朴淳, 1523-1589)이다. 사암 박순은 선조 때 15년 동안 영의정을 지냈다. 봉산재 옆에 박정과 박상을 모시는 재실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3개의 재실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서창동(西倉洞)에 있는 송학산(201m) 북쪽 기슭이다. 봉산재는 예전에는 계곡 깊숙한 곳에 있었다. 그런데 재실과의 거리가 너무 먼 탓에 관리하기가 힘들어 지금의 자리로 옮겨두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마을 앞에 큰 저수지가 있었는데 연꽃이 많았으며 향기가 널리 퍼졌다. 그래서 마을이름이 방하동(芳荷洞)이었는데 일제가 마을이름을 한자식으로 정비하면서 사동(寺洞)으로 고쳐버렸다.

사동마을은 행정구역상으로는 서창1통이다. 서창1통 행정구역은 본 마을인 절골마을과 이곳에서 200m 정도 떨어져 있는 불암마을까지 합친 것이다. 광주광역시는 눌재 박상 선생이 태어난 방하동으로 들어가는 큰 길을 눌재로로 이름 붙였다. 눌재로 구간은 서창 IC에서 서창-칠석동을 거쳐 나주시 남평 경계에 이르는 큰 길이다. 매월동 전평제에서 나주로 가시는 분들은 백마교차로 좌측 왼쪽에 있는 사동마을을 바라보면서 눌재 선생을 떠올려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절골마을 안쪽에는 봉산재(鳳山齋)가 있다. 봉산재는 눌재 박상선생의 아버지 찬성(贊成)박지흥(朴智興)의 재실이다. 곁에는 박지흥의 장남 하촌(荷村)박정(朴禎)의 재실이 있다.

 

 

■사동마을에 들어온 충주 박씨 박지흥과 그의 아들들

충주 박씨 가운데 사동 마을에 처음 발을 디딘 사람은 박지흥이다. 바로 눌재선생의 아버지다. 박지흥의 조상은 원래 개경에서 살았으나 충남 대덕으로 옮겨와 살고 있었다. 충주 박씨의 8대 후손인 광리에게는 윤수, 진, 소 등 세 아들이 있었다. 셋째 소는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넷째가 지흥이다.

지흥은 1411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성균진사에 장원급제했으나 세조의 왕위찬탈에 실망, 벼슬의 꿈을 버리고 처가인 하동정씨 연고지인 광주로 낙향했다. 이때 장성 갈재를 넘다가 주막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는데 광주목 방하동이 살 곳이라는 꿈을 꾸게 된다.

그런데 그만 박지흥의 처 하동 정씨가 자식을 낳지 않은 상태에서 일찍 세상을 떠나버렸다. 박지흥은 방하마을 계성(桂城) 서씨 집안 처녀를 둘째부인으로 맞이했다. 박지흥과 서씨부인 사이에 태어난 아들들이 박정, 박상, 박우다. 호남사림의 문을 연 박상, 훌륭한 목민관이었던 박우, 의로움을 위해 권세가들에 맞서다 파직 당했으나 결국 영의정에 오른 박순 등이 모두 절골마을 태생이다. 절골마을은 조선선비의 기개와 높은 학문을 키워낸 곳이다.

박지흥의 장남 박정은 1467년 절골에서 태어났다. 23세 때인 1489년 부친이 세상을 뜨자 어머니와 함께 집안을 돌보며 16세 눌재와 14세 육봉을 보살폈다. 동생들을 가르치며 곧은 성품으로 클 수 있도록 애썼다. 눌재와 육봉의 학문이 크게 깨칠 수 있었던 것은 맏형 하촌공(荷村公)의 공이 크다. 그러나 하촌 박정은 향년 32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찬성공 지흥제각복원사적비와 하촌공 제각비
박지흥의 둘째 아들인 눌재 선생은 1474년(성종 5년) 절골마을에서 태어났다. 눌재 선생의 어머니 서씨부인은 입암산의 큰 바위가 치마폭에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박상 선생을 임신했다. 박지흥은 63세가 되던 어느 날 고향인 대덕을 가기위해 부인 서씨를 데리고 갈재를 넘다 입암산 아래, 주막에서 또 하룻밤을 지내게 된다. 이때 입암산 바위가 품에 들어오는 꿈을 꾼 것이다.

눌재 선생은 1496년(연산군 2)에 진사시, 1501년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중시에 장원급제했다.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 등을 지내다 서른 두 살의 나이에 지금의 부지사 격인 전라도사에 임명됐다. 눌재는 훈구(勳舊)공신들의 전횡을 지속적으로 비판해 관직생활 대부분을 지방에서 보냈다. 중종이 성급하게 친척을 중용하려 하자 이의 부당함을 간언했다가 미움을 받아 옥에 갇히기도 했다.

눌재는 재신들의 간곡한 상소로 풀려나 임피현감(臨陂縣監)등을 지냈다. 그러나 담양부사 때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하다가 중종의 분노를 사서 나주 오림역(烏林驛)에 유배됐다. ‘신씨 복위소’는 폐위됐던 중종의 비(妃)를 다시 왕비에 올려야 한다는 것을 상소한 것이다.

박원종 등 연산군 폐출에 앞장섰던 이들은 중종의 장인이었던 신수근(愼守勤)에게 함께 반기를 들것을 권했다. 그러나 신수근은 반란이 실패할 것을 두려워해 가담하지 않았다. 중종반정이 성공한 뒤 쿠데타 세력들은 신수근을 죽이고 잠저(潛邸;나라를 새로 세웠거나 세자가 아닌 종실 가운데 즉위한 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 또는 그 기간을 일컫는 말)시절의 처였던 신씨의 딸을 폐위시켰다.

그 후 10년이 지난 1515년 중종의 새 왕비가 된 윤여필의 딸 윤씨(장경왕후)가 아들을 낳은 후 7일 만에 갑작스럽게 죽자 담양 부사 박상, 순창 군수 김정은 중종의 첫 번째 부인인 신씨의 복위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정부인이 있는데 첩을 왕비로 삼는 것은 부당하다는 내용이었다. 사림세력이 중요시하는 의로움을 행동으로 옮긴 것이었다. 반정공신들의 국정농단과 언로(言路)를 막으려는 횡포에 대한 저항의 의미도 담겨 있었다.

죽음을 무릅쓰고 폐비 신씨의 복위를 주장했던 박상 선생은 조광조 등의 도움을 받아 1516년 유배생활에서 풀려난다. 이후 의빈부도사(都事)·순천부사, 상주·충주·나주목사(牧使) 등을 지냈다. 1529년 신병으로 사직을 요청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지내다 다음 해인 1530년 세상을 떴다.

셋째 아들 육봉 박우는 1476년에 태어났다. 1507년(중종 2)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해 진사가 되고, 1510년(중종 5)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병조정랑, 직제학, 좌승지 등을 거쳐 강원도관찰사가 돼 선정을 베풀었다. 강직한 성품인 탓에 당시 권세가 김안로와 허확·허항 부자(父子) 등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파직당하기도 했다. 아첨을 하지 않고 직언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이후 병조참의·이조참의·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개성유수가 됐다. 인종 때 한성부좌윤 겸 동지춘추관사가 되어 <중종실록>(中宗實錄)편찬을 감수했다. 명종 때 전주부윤이 됐다. 박우는 박개·박순, 아들 둘을 두었는데 차남 순은 영의정에 올랐다. 사암 박순은 윤원형과 훈구대신 등 조정의 권력자들이 전횡을 하자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시정할 것을 곧잘 주장했다.

영의정에 오른 뒤 15년을 재직했으나 율곡 이이가 탄핵을 받을 때 그를 옹호했다가 정적들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이에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현재의 경기도 포천시 부근의 백운산에 은거했다. 사암 선생은 광주 월봉서원과 나주 월정서원, 영평 옥병서원, 개성 화곡서원등에 배향돼 있다. 광주 소촌동 송호영당(松湖影堂)은 눌재 박상 선생과 사암 박순 선생을 모시고 있는 재실이다.

■호남사림과 호남충의정신의 원조 눌재 선생

 

 

 

 

 

 

완절문. 박상 선생의 강직한 인품과 높은 학문을 뜻한다.
의로움과 충효를 중시하는 호남의 선비정신은 임진·정유재란과 정묘·병자호란 때 충의정신으로 발휘된다. 수많은 호남의 선비와 백성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호남의병정신은 뒤에 실학사상과 위정척사, 한말의병활동,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 유신체제하의 민주화운동, 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 호남정신의 태동과 형성, 그 중심에 박상 선생이 있다. 선생은 충(忠)은 정의로움을 실천하는데서 실현된다고 믿었다. 선생이 살아계실 때는 조선건국에 공이 컸거나 조정 권력을 쥐고 있었던 훈구파가 득세하던 시절이었다. 무능하고 탐욕스럽던 자들이 왕의 친척들이라는 이유로 관직을 꿰차고 조정을 어지럽게 하던 때였다. 선생은 이 훈구파들의 전횡에 맞서던 분이었다.

눌재 선생은 의를 중시했다. 의리는 절의다. 선생은 사림문화를 선도하며 후학들에게 정의로운 삶을 살도록 강조했다. 불의에 항거하며 올바른 정치를 펼치기 위해 노력했던 선생의 삶은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래서 생전의 조광조는 박상선생에 대해 ‘강상의 법도를 세웠다’고 칭찬했다. 퇴계 이황 역시 ‘하늘이 내린 원우(元祐) 와 완인’(完人;행동과 인품에 흠결이 없는 사람)이라고 극찬했다.

 

 

 

 

 

 

봉산재 현판
박상은 고려 말 이색과, 정몽주 등의 절의 정신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박상이 평생에 걸쳐 실천하고자 했던 절의정신은 그의 조카 박순을 통해 조선성리학 정신으로 뿌리내렸다. 박순은 서경덕의 문하에서 배우고 이황, 이이, 성혼, 기대승 등과 교우하며 조선성리학을 발전시켰다. 왕의 외삼촌이자 훈구파의 대부였던 윤원형을 축출하고 사림의 시대를 열었다.

새로운 정치를 열망하는 사림인사들은 박상과 박순으로 이어지는 학문계통을 통해 조선의 개혁을 시도했다. 이 개혁의 요람이 호남이었으며 그 주체가 호남사림이었다.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 올바름을 위해서는 목숨도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절의정신은 호남정신으로 구현돼 나라를 구하는 충의정신으로 확대됐다.

박상 선생이 권력에 굴하지 않고 불의를 없애는데 얼마나 용감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있다. 때는 1505년(연산군 11)8월이었다. 선생은 불과 32세의 나이에 전라도사(全羅都事, 오늘날의 전라도 부지사에 해당)가 돼 나주에 내려왔다. 지방도사는 지방관리들을 감독하는 자리였다.

그때 나주에서는 황쇠부리(黃牛夫里)라는 사람이 연산군의 권력을 믿고 갖은 횡포를 다 부리고 있었다. 이 쇠부리는 원래 미천한 사람이었는데 그의 딸이 연산군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당시 연산군은 채홍사를 풀어 미색이 뛰어난 처녀들을 성노리개 감으로 데려갔는데 끌려간 쇠부리 딸이 연산군의 눈에 들었던 것이다. 쇠부리는 딸이 왕의 총애를 받자 세도를 부리며 남의 처자와 땅을 빼앗는 등 행패를 일삼았다.

어떤 나주목사가 이를 보다 못해 저지하자 서울 딸에게 이를 알려 쫓아버리기도 했다. 연산군이 쇠부리를 감싸고 돈 것이다. 그래서 아무도 쇠부리의 비위를 건드리지 못했다. 쇠부리를 처벌하면 곧 연산군에 대항하는 모양새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박상선생은 쇠부리의 행패를 전해 듣고 곧바로 그를 잡아오도록 했다. 그런 다음 금성관(錦城館;나주 객사) 뜰에서 우부리를 곤장을 때려 처형했다.

■당당한 행동과 고양이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한 박상

 

 

 

 

 

 

봉황정 앞에서 눌재선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정인서 서구 문화원장(좌측)과 최혁주필
박상이 우부리를 죽여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연산군은 금부도사에게 박상을 체포해 오라고 명령했다. 박상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이 돼 버렸다. 그러나 박상은 개의치 않았다. 잡혀가는 것보다 스스로 왕 앞에 나가는 것이 당당하다고 생각하고 한양을 향해 길을 떠났다. 한양을 가려면 노령산맥이 걸쳐져 있는 장성 갈재를 넘어야 하기에 발길을 그쪽으로 향했다.

장성 갈재는 아버지가 낙향해 광주로 향할 때 산신령이 꿈에 백마를 보내 들어가 살 곳으로 방하마을을 찍어준 곳이다. 또 어머니가 자신을 임신할 때 태몽을 꾼 곳이기도 하다. 이래저래 갈재는 박상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그런데 장성 갈재를 넘을 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커다란 고양이 한 마리가 길을 막아선 것이다.

고양이는 박상 선생이 탄 말을 위협하면서 자꾸만 앞을 막았다. 그리고 따라오라는 시늉을 했다. 이상하다 싶어 박상 선생은 고양이를 따라갔다. 고양이는 좁은 산길로만 박상 선생을 인도했다. 며칠을 걸려 도착해보니 그곳은 바로 금강산 정양사였다. 정양사 주지는 며칠째 사라졌던 절 고양이가 박상과 함께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며 어찌된 영문인지를 박상 선생에게 물었다.

박상의 대답을 들은 주지스님은 신령의 도움이라며 정양사에 거처를 마련해주고 박상을 숨겨주었다. 그런데 한 달 만인 9월에 종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이 왕위에서 쫓겨났다. 그래서 박상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조정은 그 뒤에 이를 불문에 붙였다. 박상은 세상을 뜨기 전, 경기 하남 오산리에 있는 논 40마지기를 사서 정양사에 주고 여기서 나온 소출을 목숨을 살려준 고양이를 보살피는 데 사용하도록 했다. 그래서 이 논을 ‘묘답’(猫沓)이라 부른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이 묘답은 주인이 없다 해서 몰수당했다고 전해진다.

■송학산 눌재 부부 묘소

 

 

 

 

 

 

송학산 눌재 부부 묘소
절골마을 뒤쪽 송학산에 있는 눌재 부부의 묘소
사동마을 뒤편 문중 선산에는 눌재 선생 부부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송학산 북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눌재 부부 묘소는 300여 평의 넓은 묘역에 위치해 있다. 볕이 잘 들어 땅은 따사롭고 소나무가 빙둘러 자리해 바람이 분 날에도 아늑하다. 오래된 상석과 비석 등 석물이 눈길을 끈다.

■송호영당(松湖影堂)

 

 

 

 

 

 

광산구 소촌로 46번길 46에 있는 송호영당
박상 선생의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후손들은 1728년 선생의 출생지인 광주시 서창동 절골마을에 송호영당을 세우고 선생을 기렸다. 송호라는 이름은 임금이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건립연대를 따져보면 아마도 영조인 듯싶다. 송호영당은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없어졌다.

광주시 광산구 소촌동 일대에서 모여 살던 충주 박씨 문간공파 후손들이 1998년 소촌동 299번지에 송호영당을 세우고 박상 선생과 조카 사암 박순 선생을 모셨다. 그런데 KTX철로가 지나가면서 광산구 소촌로 46번길 46으로 이전됐다. 송호영당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로 46번길 24에 있는 용아(龍兒) 박용철(朴龍喆)생가와 맞붙어 있다.

박용철은 박상 선생의 16대 후손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한글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린 대표적인 서정시인이다. 충주 박씨 조상들의 높은 학문과 시성(詩性)이 수백 년의 세월 동안 면면히 이어져 박용철 시인에게 그대로 전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용아 박용철 생가 사랑채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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