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

충무공 정충신 장군<42>-제3장 의주로 가는 길

“너는 나를 따르라. 아짐씨는 그대로 누워있고요. 우리가 할 일이 좀 있승개요. 그래도 여그가 제일로 안전한 곳잉개 우리가 나갔다 올 때까정 쉬고 있으시요.”

여인은 어둠 속에서 머리를 끄덕였다. 정충신과 길삼봉은 초분골을 나왔다. 시간은 자시가 훨씬 지나있었다.

“동네가 모두 비었으니 보복당할 일은 없을 거이다.”

길삼봉이 혼잣소리로 중얼거렸다. 정충신은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이윽고 여인의 집에 당도했다.

“너는 안방에 들어가서 농을 열고 여자 옷을 찾아 입어라. 그것을 입고 나와서 저 언덕길을 서성거려라. 왜 병사들이 다가올 적시면 집으로 들어가 안방 이불 속에 들어가 누워있거라.”

눈치 빠른 정충신이 길삼봉이 시키는대로 행동에 옮겼다. 여인의 집으로 들어가 농에서 치마와 적삼을 주섬주섬 챙겨입고, 밖으로 나와 언덕길을 서성거렸다. 매캐하게 마을이 탄 냄새가 바람을 타고 스쳐오고 있었다.

저쪽 숲쪽에서 어렴풋한 달빛 아래 왜병 둘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도 여인의 집을 살피고 있었다. 어슬렁거리던 그들을 향해 치마를 펄럭이던 정충신이 숨듯이 집으로 들어가 이불을 덮고 누웠다. 왜 병졸들이 집 주변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방 앞에 이르러 주춤하며 뭐라고 주절대었다.

“이상하단 말이야. 오카모도와 스즈키 병관이 아직도 안들어왔어.”

“그자들 다른 집으로 옮겨갔을 거야. 지금 한창 기분 낼 땐데 쉽게 귀대하겠나. 내가 망보고 있을 테니 너 먼저 들어가 재미봐. 아마 이 집은 우리가 마지막일 거야.”

“소까(그래).”

한 놈이 사라지고, 한 놈이 방안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온 놈이 야릇한 웃음소리를 휘날리며 성질 급하게 옷을 벗더니 이불을 젖혔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그 자리에 절푸덕 고구라졌다. 어둠 속 방 귀퉁이에 붙어 섰던 길삼봉이 불쑥 나타나 도끼로 왜 병졸의 뒷머리를 내려쳐 반쪽으로 갈라버린 것이다. 동시에 정충신이 이불을 박차고 나왔다. 두 사람은 소리없이 시체를 들어 뒷마당으로 끌어냈다.

길삼봉이 죽은 왜병의 옷을 벗겨서 주섬주섬 갖춰 입고, 옷매무새를 추스른 다음 방으로 들어가 정충신이 다시 이불 속에 반듯이 누운 것을 보고 밖으로 나갔다. 길삼봉이 안방 문 앞 추녀 끝에서 휘파람을 씨익 불었다. 숲 쪽으로 물러가 있던 왜 병졸이 알았다는 듯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그가 가까이 오자 길삼봉은 집 뒤켠으로 몸을 숨기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와다시와 우찌니 시다데 호우초시마시다(나는 집 아래서 보초서겠다), 와다시와 쇼카이(나는 초계)!”

“소우데스.”

왜병이 알았다는 듯 열띤 마음으로 곧바로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도 급하긴 급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는 이상한 피비린내를 느끼고 주춤 그 자리에 섰다.

“이거 이상하잖나. 초병! 이게 이상하다!”

그가 소리질렀다. 그 순간 벼락같이 뒷문이 열리고 키가 큰 왜 병사가 나타나 멈칫거리고 서있는 병졸의 머리를 도끼로 내려쳤다. 잘못 맞았는지 그가 어깻죽지를 붙잡고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왜 병사가 다시 그의 몸통에 도끼를 내려쳤다. 그의 가슴에서 내장이 쏟아져 나오고 금방 숨통이 끊어졌다. 도끼를 든 왜 병사는 먼저 죽은 왜병의 제복으로 변복한 길삼봉이었다.

“아따 성님, 왜놈 해치우는 것 봉개 내 머리가 어질어질하요야.”

길삼봉과 정충신이 왜 병사 시신을 끌어내 먼저 죽은 병졸 시신과 함께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그 위로 볏가리를 가져와 쌓았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감쪽같이 은폐되었다. 길삼봉이 집에 불을 질렀다. 이곳저곳 마을에서 불에 탄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으므로 진지의 왜 병사들은 이 집 역시 꺼진 불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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